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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5:01-12 가난한 자의 요새와 만민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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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굉음이 지나간 자리에서 예언자는 뜻밖에도 감사의 노래를 시작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성읍은 돌무더기가 되고 외인의 궁성은 다시 세워지지 못하는데, 그 무너짐을 본 강한 민족들이 도리어 주를 경외합니다(1-3절). 같은 손이 힘없는 자에게는 폭풍 중의 피난처가 되고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됩니다(4-5절). 이어 무대가 산 위로 옮겨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고, 얼굴을 덮은 가리개를 걷어 내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십니다(6-8절). 그 날에 백성은 우리가 그를 기다렸다고 고백하며 즐거워하고, 교만을 요새로 삼은 모압은 진토에 이르도록 낮아집니다(9-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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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4장에서 27장까지를 성서학자들은 흔히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 부릅니다. 어제 읽은 24장이 온 땅을 뒤집으시는 심판과 시온 산에 세워지는 여호와의 왕좌로 끝났다면, 오늘 25장은 그 왕좌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로 시작합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25장은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처음 단락(1-5절)과 마지막 단락(9-12절)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고, 그 사이에 놓인 두 번째 단락(6-8절)은 민족들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과 민족들의 운명이 언제나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이 배치 자체에 담겨 있습니다.

# 주목할 것은 1절에서 5절까지의 감사기도에는 종말론적 색채가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시는 본래 어느 불의한 성이 무너진 구체적 경험 앞에서 드려진 평범한 감사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편집자는 이 소박한 감사기도를 종말론적 싸움을 그린 24장 바로 다음에 배치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환난 한가운데를 지나는 공동체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인 자리 덕분에, 이 시는 결정적인 싸움의 시대를 사는 여호와의 공동체에게 포악한 민족들의 기세를 두려워하거나 그들의 세력에 좌절하지 말고 여호와에게서 피난처를 찾으라고 권면하는 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옛 신앙인의 작은 감사 하나를 온 역사의 마지막을 견디는 힘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 2절의 무너진 성이 어떤 성인지 본문은 끝내 밝히지 않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사건이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름을 지운 것일 수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후자에 무게를 둡니다. 예언자에게 그 성의 멸망은 감사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을 뿐이며, 그는 눈앞의 한 경험에서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놀라운 일 전체의 확실성을 읽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의 이름은 중요성을 잃습니다. 13장과 21장에서 바벨론이 그러했듯이, 무너진 성은 여호와께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대표하는 이름 없는 상징으로 남습니다. 김근주 교수 역시 이 '성읍'과 '견고한 성읍'을 잘 방비되고 번성한 도시, 나아가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10절 이하에 갑자기 등장하는 모압입니다. 모압에 대한 적대감은 출애굽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수기 22장 이하에 따르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선견자 발람을 불렀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신명기 23장 3절에서 6절은 암몬과 모압 사람이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다만 성경은 그 문을 완전히 닫아 두지 않았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다윗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압은 혈통으로서의 이방인이 아니라, 견고한 성벽을 자기 요새로 삼은 교만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읽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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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5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그리고 폭양을 피하는 그늘

하나님은 미리 세우신 계획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시면서, 그 큰 역사의 한가운데서 가장 힘없는 자의 그늘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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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사 25:1)는 고백으로 입을 엽니다. 그가 주를 높이고 그 이름을 찬송하는 이유는 주께서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 감사의 근거가 구체적으로 진술됩니다.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고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2절). 그 결과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게 됩니다(3절). 그리고 시선이 정반대편으로 옮겨 갑니다.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주는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습니다(4절).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하듯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고, 폭양을 구름으로 가리듯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십니다(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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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1절의 신앙고백이 신조의 암송이 아니라 찬양과 감사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고 지적합니다. 예언자는 교리를 외운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알았고, 그래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기사'는 초자연적 기적이 아니라 전쟁이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구원 행위를 가리킵니다. '옛적에 정하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에 따라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성실함과 진실함'은 그 구원 행위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말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히브리어 '에무나 오멘'이 계획을 꾸며 주는 말일 수도 있고 그것을 실행하시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꾸며 주는 말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비슷한 뜻의 두 단어가 겹쳐 쓰여 '완전한 신실함'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즉흥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이 확신은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모티브이며, 40장 이후에서도 되풀이됩니다(사 46:10-11).

3절은 개역개정에서 탈락된 서두의 '그러므로'를 되살려 읽어야 뜻이 분명해집니다. 3절은 적대적인 성읍이 멸망한 결과인 것입니다. 견고한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심판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강한 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김필회 교수는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시인의 청자인 유다 사람들로 볼 수도 있고, 도읍이 파괴된 이방 백성들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유다로 볼 경우 그들을 '빈궁한 자, 환난 당한 가난한 자'로 부르는 4절과 긴장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강한'과 '포악한'을 정치적, 군사적 사실 묘사로 읽지 말고 신학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여호와께서 강한 자의 성읍을 황폐케 하시는 것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강하고 능력 있는 자들 가운데 왜곡된 이들을 바로잡으시는 행위라고 봅니다. 사람의 복수는 또 다른 악을 낳지만, 하나님의 재판은 악한 이들을 돌이키게 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은 특정한 백성의 승리가 아니라 폭력과 포학이 가득한 세상이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4절과 5절에서 시의 온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앞에서 성을 무너뜨리시던 그 손이 이제 요새와 피난처와 그늘로 묘사됩니다. '요새'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오즈'는 보호, 안전한 장소, 힘을 뜻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뜨겁게 달구어진 폭염은 생명에 적대적입니다. 그 두 위협을 그대로 가져와 하나님을 피난처와 그늘로 고백한 것입니다. '폭양'으로 옮겨진 '호렙'이 4절과 5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면서, 내리쬐는 열기와 메마름 속에서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곤경이 부각됩니다. 이 그늘의 이미지는 이사야 4장 5절과 6절에서 시온 위에 드리우는 구름과 초막의 그늘과도 이어집니다. 곧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을 덮으셨던 그 그늘이 여기서 다시 호명되는 것입니다. 시편이 자주 보여 주듯 가난한 자란 달리 의지할 곳이 없어 하나님만을 피할 곳으로 삼은 자를 가리킵니다(시 72:12). 가난한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포악한 자를 억누르시는 분이십니다. 이 두 얼굴은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의 한 가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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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큰일과 나의 작은 사정을 자꾸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라면 내 몫의 폭양쯤은 그분의 관심 밖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성을 무너뜨리시는 손과 그늘이 되어 주시는 손을 같은 문단 안에 나란히 놓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이 여름을 지나며 붙잡아야 할 첫 번째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세계사의 판을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운행하시면서, 동시에 오늘 아침 병원 대기실에 앉아 계신 한 분의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크심과 자상하심은 그분 안에서 모순이 아닙니다.

또 하나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서 이 시를 읽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견고한 성읍'은 여전히 매력적인 이름입니다. 더 튼튼한 자산, 더 확실한 스펙, 더 두꺼운 인맥. 교회조차 규모와 시스템으로 자신을 방비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견고한 성읍이 돌무더기가 되는 자리에서 감사가 터져 나온다고 말합니다. 무너진 것을 고소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요새로 삼고 살았는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도의 형편을 물을 때 실적을 묻지 않고 그늘이 필요한 자리를 묻는다면, 우리는 4절의 하나님을 조금은 닮아 가는 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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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6-8 이 산에서 베푸시는 잔치, 걷히는 가리개, 삼켜지는 사망

하나님은 만민을 자기 식탁에 초대하시고, 슬픔의 덮개를 걷어 내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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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십니다. 그것도 그냥 기름진 것이 아니라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이며, 그냥 포도주가 아니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입니다(6절).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7절). 그리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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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물론 24장 23절에서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 시온 산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6절에서 8절이 24장 23절의 연속이라면 이 종말론적 잔치가 곧 여호와 대관식의 일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종말의 전쟁에서 하늘과 땅의 적대 세력을 물리치시고 보좌에 앉으신 왕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잔칫상을 차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이스라엘도 아니고 택함받은 종말론적 공동체도 아닌 '만민', 곧 세상의 모든 민족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점에서 이 단락이 매우 독자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시온을 향한 민족들의 순례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오지만(사 2:2-5; 시 96:7-8; 슥 14:16), 민족들이 하나님의 초대를 받고 올라오는 것은 오직 이곳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공로로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라 불려 온 것입니다. 잔치에서 더 좋은 포도주를 마지막에 내어놓으시는 그 넉넉함은, 훗날 가나 혼인 잔치에서 좋은 포도주를 나중까지 두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겹칩니다(요 2:1-11).

7절의 '가리개와 덮개'를 김필회 교수는 영적 무지의 상징이라기보다 슬픔의 표지로 읽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애도의 표시로 얼굴을 천으로 가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삼하 15:30; 렘 14:3-4). 그러니 가리개를 걷으신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죽은 자를 애도하느라 얼굴을 가릴 일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8절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여기서 '죽음을 삼킨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죽음의 신 모트를 이기는 바알의 승리와 형태는 닮았지만, 이사야서에서 이 모티브는 여호와의 왕 되심과 결합되어 전혀 다른 의미를 얻습니다. 또한 그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 육체적 죽음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질병과 대적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해진 상태, 풍성함을 누릴 수 없고 사람들과의 사귐이 끊어지며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끊어지는 그 모든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견고한 성읍'과 '포학자'의 기세가 그토록 높았던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죽음이 왕 노릇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지평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논하면서 바로 이 구절을 끌어와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 15:54)고 선포했고,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에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계 21:4)라고 다시 노래합니다. 구약의 한 예언자가 산 위에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며 더듬거리듯 말했던 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실체가 되었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탁의 축소판이 오늘 우리 교회의 성찬상입니다. 우리는 매번 그 상 앞에서 만민을 위한 잔치의 예고편을 미리 먹고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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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치의 손님 명단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식탁이 만민에게 열려 있는데, 우리의 식탁은 종종 우리끼리의 자리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오래 다닌 사람들끼리 앉고, 처음 온 사람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서성입니다. 우리 지역에는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민, 홀로 사시는 어르신, 마음이 아픈 청년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식탁이 그들에게 열려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만민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우리끼리의 잔치만 벌인다면, 우리는 6절을 읽되 6절을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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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눈물을 씻기신다는 말씀은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허락이기도 합니다. 신앙이 좋으면 울지 않는다고 배운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감추고 얼굴에 가리개를 두른 채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리개를 걷어 내시는 분입니다. 우는 얼굴을 그대로 보시고 손수 닦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소그룹과 묵상 나눔의 자리가 서로의 가리개를 억지로 벗기는 자리가 아니라, 벗어도 안전한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실을 겪은 성도 곁에서 서둘러 위로의 말을 찾기보다 함께 울어 주는 것, 그것이 8절의 하나님을 흉내 내는 가장 정직한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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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9-12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리고 거름물 속의 교만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의 기다림을 헛되게 하지 않으시며,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을 진토에까지 낮추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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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십니다(10절 상). 반면 모압은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입니다. 그가 헤엄치는 자가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손을 펴겠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입니다(10절 하-11절). 마지막으로 그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십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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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에서 '기다렸으니'라는 동사가 두 번 반복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 역시 1절에서 5절처럼 뚜렷한 종말론적 용어 없이 문맥에 의해 종말론적으로 읽히는 감사시라고 봅니다. 여기서 '그 날'은 시온 산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잔치에 초대하시는 그 때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는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표현으로, 여호와의 지속적이고도 완벽한 보호를 함축합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기다림에 각별한 무게를 둡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다리신 것은 정의와 공의였고(사 5:7), 이제 그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를 그분이 건지십니다(사 8:17; 26:8; 40:31). 구약은 부활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왕으로 임하셔서 죽음을 멸하실 것을 기다리며 오늘의 고난을 이겨 내는 신앙이야말로 참된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의 핵심은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날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10절 이하의 모압 심판은 그 표현이 거칠어서 낯설게 느껴집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서 예언자가 절망적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타작마당을 거름 구덩이로 옮겨 놓았다고 설명합니다. 지푸라기가 거름 구덩이에서 짓밟히듯 모압이 짓밟힙니다. 11절의 비유는 더 신랄합니다. 헤엄치는 자가 손을 뻗어 물을 가르듯 모압도 빠져나오려고 손을 뻗지만, 그가 빠진 곳은 물이 아니라 거름 구덩이입니다. 능숙한 손놀림이 오히려 그를 더 깊이 가라앉힙니다. 그의 교만이 목숨을 구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여기서 모압의 특징이 혈통에 근거한 이방인이라는 데 있지 않고 '성벽의 높은 요새'로 표현된 힘에 기반한 교만에 있다고 짚습니다. 그러므로 모압은 특정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자리의 이름입니다. 이사야 34장에서는 에돔이, 다니엘 7장에서는 짐승들이 같은 자리에 섭니다. 어떤 강한 세력이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는 순간 그는 장차 훼파될 모압이 됩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오늘 본문의 신학이 선명해집니다. 한쪽에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스스로를 건지려는 자가 있습니다. 전자는 산 위의 식탁에 앉고, 후자는 자기 손이 능숙할수록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4절의 '빈궁한 자'와 12절의 '성벽의 높은 요새'가 이 대조의 양 끝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요새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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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훈련되지 않은 신앙의 근육입니다. 우리는 빠른 응답, 빠른 회복, 빠른 결론에 익숙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기도의 방법을 바꾸고,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을 바꿉니다. 그러나 9절의 고백은 기다림이 끝난 뒤에 나온 말이 아니라, 기다리는 중에 미리 부르는 노래입니다. 아직 손에 쥔 것이 없는데도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기도 자리가 요구의 목록을 낭독하는 자리를 넘어, 그분이 하실 일을 미리 기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모압의 거름 구덩이는 우리 시대를 향한 서늘한 경고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는 능숙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칩니다. 더 빠르게 헤엄치는 법, 더 효율적으로 손을 젓는 법을 배우는 데 온 생애를 씁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헤엄치고 있는가입니다. 방향이 틀린 자리에서의 유능함은 사람을 더 깊이 가라앉힙니다. 한국 교회 역시 지난 세월 성장의 기술에는 능숙해졌으나 그 능숙함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왔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대안은 더 나은 기술이 아니라, 성벽 위에서 내려와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무너뜨리시는 분과 그늘이 되시는 분이 같은 분이심을 아는 사람만이 그 자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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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뜻을 오늘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견고하다 여기던 것들이 돌무더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 무너짐 너머에서 일하시는 손을 보게 하옵소서.

무엇을 요새로 삼고 살아왔는지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하시고

폭풍 중의 피난처, 폭양을 피하는 그늘 되신 주께로 걸어 들어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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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을 부르시는 주님,

이 산에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시는 주님,

우리의 식탁이 우리끼리의 자리로 좁아지지 않게 하옵소서.

얼굴을 가린 가리개를 손수 걷으시는 주님,

슬픔을 감추느라 지친 이들이 이 교회에서는 마음 놓고 울게 하시고

그 눈물을 친히 씻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상실을 견디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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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자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

아직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로도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고백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스스로를 건지려는 교만을 내려놓게 하시고

성벽 위에서 내려와 주님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그늘이 필요한 이들의 그늘이 되게 하시고

마침내 산 위에 차려진 그 식탁에서 함께 웃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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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이사야 14:01-23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긍휼로 다시 택하시는 하나님과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지는 교만의 종착점 평화의길벗 2026.08.01 50
1222 이사야 13:01-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검열하시는 군대와 제국의 화려한 궁전 위에 임하는 여호와의 날 평화의길벗 2026.07.31 22
1221 이사야 12:01-06 진노를 거두시고 구원의 우물이 되신 하나님과 만국 중에 울려 퍼지는 감사 찬송 평화의길벗 2026.07.30 13
1220 이사야 11:01-16 베어진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한 싹과 만민을 모으시는 여호와의 대로 평화의길벗 2026.07.29 29
1219 이사야 10:20-34 제국의 오만한 망치를 부수시는 여호와의 친히 펴신 손 평화의길벗 2026.07.28 24
1218 이사야 10:05-19 진노의 막대기를 꺾으시는 역사의 절대 주권자 평화의길벗 2026.07.27 22
1217 이사야 09:08-10:04 지속되는 배역에 임할 전능자의 펴신 손과 자멸하는 탐욕의 불길 : 위선적 종교와 불의한 법령을 꺾으시는 야웨의 공의" 평화의길벗 2026.07.25 36
1216 이사야 09:01-07 흑암에 비친 큰 빛, 평강의 왕으로 오신 한 아기 평화의길벗 2026.07.25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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