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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9:1-14 꿈같은 구원과 봉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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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곧 다윗이 진 쳤던 성읍 예루살렘을 향한 화의 선포입니다. 절기는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성을 에워싸 진을 치시니, 축제로 소란하던 도성이 티끌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낮아집니다(1-4절). 그러나 함락을 목전에 둔 순간 만군의 여호와께서 개입하시어, 성을 치던 열방의 무리가 세미한 티끌과 날려 가는 겨처럼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주린 자가 꿈에 먹고 깨어난 것처럼 허망한 끝입니다(5-8절). 그런데 그 기적을 겪고도 백성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이 부어져 눈이 감기니 모든 계시가 봉한 책이 되어, 글 아는 자도 모르는 자도 읽지 못합니다(9-12절). 입으로는 가까이 하나 마음은 멀리 떠난 이들에게 주님은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여 지혜자의 지혜를 없애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13-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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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이사야 28장에서 33장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화' 신탁 가운데 두 번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예언자는 사망과 언약한 정치가들을 고발했고, 그 신탁의 끝은 뜻밖에도 곡식마다 다른 도구로 알맞게 떠는 농부의 비유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농부의 손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치시되 부수지 않으시고, 구하시되 그 구원으로 백성의 상태를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 김필회 교수는 29장 1절에서 8절까지를 5절을 중심으로 1-5절과 6-8절의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전혀 예기치 못한 개입으로 극적인 국면 전환을 경험하는 단락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갑자기 한순간에 구원을 받고,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적들은 무엇엔가 홀린 듯 포위를 풀고 도주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주전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과 그 갑작스러운 철수에 일치합니다. 히스기야가 애굽에 손을 뻗고 있던 그 시기, 왕궁과 성전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분주했습니다.

# 본문을 여는 이름 '아리엘'은 그 어원과 의미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어의 뜻풀이가 불분명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1절에서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과 나란히 놓이므로 예루살렘 또는 그 일부를 가리키고, 2절 후반부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고 봅니다. 아리엘은 에스겔 43장 15절과 16절에서 번제물을 태우는 제단의 가장 윗부분, 곧 화덕을 가리키는데, 2절 후반부는 아마도 이런 의미로 사용된 듯합니다. 심판을 받는 아리엘 예루살렘이 제물을 태우는 아리엘 제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젝맨은 이 말장난을 두고, 끝없이 반복되는 연례 종교 절기로부터 소환된 예루살렘이 자신이 곧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리라는 판결을 듣는 장면이라고 정리합니다.

#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은 '화'라는 말의 성격입니다. 젝맨은 알렉 모티어를 인용하여, 이사야서 이 부분에 나오는 여섯 개의 '화' 선포가 각각 심판석에 나오라는 소환의 언어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주의 주문이 아니라 법정 출두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을 파괴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법정에 세워 그 실상을 보게 하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재판정에서 드러난 진단이 곧 13절과 1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7장 6절과 7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인용하신 구절이 바로 이 대목이며,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서 십자가의 도를 논증하며 끌어 쓴 구절도 여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한 페이지로 닫혀 있지 않고 신약의 심장부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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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다윗이 진 쳤던 성읍에 임한 화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하신 자리라 하여 눈감아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사랑하신 성읍을 친히 에워싸 그 실상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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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은 탄식과 고발이 함께 담긴 부름으로 열립니다.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1절). 성읍의 이름이 두 번 불리고, 그 이름 옆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놓이고, 그 뒤에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가 놓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화자가 바뀝니다.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2절). 괴롭게 하시는 분이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직접 군대의 자리에 서십니다.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3절).

그 결과는 소리의 변화로 그려집니다.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4절). 절기의 함성이 있던 자리에 이제 땅바닥에 붙은 웅얼거림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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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다윗이 진 친 성읍'을 김필회 교수는 완료형이 사용된 히브리어 본문에 따라 '다윗이 진을 쳤던 성읍'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정복한 후 군대를 주둔시켜 보호하였던 성읍입니다. 예언자는 간접적이지만 다시금 예루살렘의 현재를 그 처음에 대비시킵니다. 이사야에게 있어 다윗의 점령으로부터 출발하는 예루살렘은 한때 신실하였던 성읍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이 아름다웠던 곳일수록 지금의 모습이 더 아프게 드러납니다.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라는 말은 그래서 위로가 아니라 풍자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을 두고, 예언자가 예루살렘에 화를 선포하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계속 축제나 즐기라고 풍자적으로 말한다고 읽습니다. 눈앞에 긴급한 위기가 닥쳤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제의적 축제에 매달리는 자들의 무지를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거행되는 생명의 축제에 참여한 자들에게 예언자는 당신들이 이미 죽음의 영역에 발을 내디뎠다고 선언합니다. 달력은 어김없이 돌아가는데 그 달력을 지키는 사람들의 영혼은 정지해 있습니다.

3절이 특히 무겁습니다. 성 둘레에 진을 치고 성벽을 뚫기 위해 누벽과 공성 보루를 쌓는 그 손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서 다윗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의 대적자가 되신다고 요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편에 세워 두고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이보다 분명히 보여 주는 문장은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 진영의 소속이 아니십니다.

4절의 '신접한 자의 목소리'로 옮겨진 히브리어 오브는 죽은 자의 영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죽음은 비존재가 아니라, 운동력을 잃고 최소한의 생명력만 지닌 채 음부에 거하는 상태입니다. 영매가 불러 올리는 죽은 자의 영은 음절을 분명히 발음하지 못하고 중얼거립니다. 김필회 교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아직 음부의 손에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은 자와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고 봅니다. 한때 축제의 기쁨으로 소란스럽던 도성이 이제 희미한 신음 소리를 낼 뿐입니다. 소리는 그 사람의 상태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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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는 절기를 잘 지킵니다. 부활절과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 어김없이 돌아오고, 순서지가 인쇄되고 특송이 준비됩니다. 그 성실함 자체는 귀합니다. 문제는 절기가 돌아오는 속도와 우리 영혼이 자라는 속도가 어긋날 때입니다. 달력은 돌아가는데 삶은 제자리라면, 우리는 축제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축제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무너지는 것들은 대개 소리부터 바뀝니다. 광장에서 외치던 목소리가 골방의 중얼거림이 되고, 확신에 차 있던 신앙 고백이 어느새 남들 앞에서만 꺼내는 상투어가 됩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사회 앞에서 잃어버린 것도 결국 목소리였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는 말과 사는 삶이 어긋나면서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 각자의 신앙 언어를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문장들이 몇 년째 같은 말의 반복은 아닌지, 감사의 목록이 매번 똑같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이 웅얼거림이 되지 않으려면, 그 말이 실제 삶의 어느 지점에서 길어 올려진 것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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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순식간에 갑자기 임하는 구원

하나님은 사람의 계산이 끝나는 자리에서 아무 예고도 없이 개입하시는 분이며, 그 구원은 우리가 확보한 권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자유에 속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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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까지 이어지던 심판의 문장이 5절에서 갑자기 방향을 틉니다.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날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순식간에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5절). 성을 짓밟던 무리가 흙먼지와 겨가 됩니다.

이어 하나님의 개입이 폭풍의 언어로 묘사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6절). 그리고 그 결과가 두 개의 꿈으로 그려집니다.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요새를 쳐서 그를 곤고하게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7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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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5절의 해석이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티끌과 겨의 표상이 한순간의 사라짐과 덧없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경우라면 예루살렘을 포위한 적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티끌처럼 갑자기 사라진다는 뜻이 되고, 뒤의 경우라면 5절은 4절의 연속으로서 예루살렘이 무수한 적들에게 포위공격 당할 것을 보여 줍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5절 마지막 구절, 곧 '순식간에 갑자기'는 그대로 남습니다. 예루살렘이 무수한 적들에게 포위공격 당하는 그 한순간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예루살렘의 적들을 치십니다.

6절의 동사 파카드를 김필회 교수는 '보복하다'가 아니라 '돌봐 주다'로 읽습니다. 창세기 21장 1절, 50장 24절과 25절, 출애굽기 4장 31절과 13장 19절, 사무엘상 2장 21절에 나오는 그 돌보심입니다. 그러니 6절은 대적을 향한 진노의 문장이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을 향한 돌보심의 문장입니다. 우레와 지진과 폭풍이 누군가에게는 심판이고 누군가에게는 품에 안기는 일입니다. 같은 손이 하는 두 가지 일입니다.

여기서 김필회 교수가 강조하는 신학적 논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후대의 성전 신학이 생각하듯 예루살렘의 구원은 예루살렘의 특별한 종교사적 위치나 하나님과의 사적 관계에서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개입은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속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시기는 하지만, 응답이 그분의 의무는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왕조의 존재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을 택해 주신 분께 의존할 경우에만 성전과 왕조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를 두고 구속사에 속박당하지 않고 자유로우신 여호와라고 표현하며, 성경 안에 하나님을 가두면 하나님이 무한자가 아니라 유한자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7절과 8절의 꿈 이미지는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예루살렘의 해방은 마치 꿈속에서 이루어진 일처럼 당혹스럽습니다. 눈앞에 보이던 그 많은 적들이 한순간에 사라짐을 보고 꿈을 꾼 듯한 착각 상태에 빠집니다. 동시에 공격하던 적들에게도 꿈입니다.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다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패배를 당합니다. 꿈속에서 푸짐하게 먹고 마시지만 깨어나면 허기지고 목마른 것처럼, 초읽기에 들어갔던 점령이 허망하게 끝납니다. 젝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꿈같은 구원은 그들이 실로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역설적 확증이 되며, 이것 자체가 여호와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조차 깨우지 못하는 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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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갑자기'라는 말은 신앙생활에서 위험하게 오해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붙들고 아무 준비 없이 기적만 기다리기도 하고, 반대로 이 말을 잊은 채 모든 것을 내 계산 안에 넣으려 하기도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갑작스러움은 게으름의 근거도 아니고 통제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예측 밖에 계신다는 사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확보해 두었다는 무언의 확신이 있습니다. 이 건물이 있으니, 이 역사가 있으니, 이만큼 헌신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성전을 두고 품었던 생각과 정확히 같습니다. 본문은 그 확신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건물이나 우리가 쌓은 공로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분께 의존할 때에만 우리의 자리가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지금 벼랑 끝에 서 계신 분들에게 깊은 위로가 됩니다. 계산이 끝났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우리의 계산표 바깥에서 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 가운데 오늘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서 계신 분이 있다면, 그 막다른 곳이야말로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 구원이 오거든 꿈처럼 흘려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겪고도 잠에서 깨지 못하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가장 깊은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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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2절 봉한 책이 된 말씀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며, 그 깨달음을 스스로 거절한 자리에는 아무리 정확한 계시라도 봉인된 문서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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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인 구원을 노래한 직후에 본문의 어조가 다시 무거워집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9절).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인이 곧바로 밝혀집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10절).

그리고 그 상태가 두 장면으로 그려집니다. 봉해진 책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읽으라 하면 봉해졌으니 못 읽겠다 하고(11절),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읽으라 하면 나는 글을 모른다고 대답합니다(12절). 이유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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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현재의 문맥에서 9절부터 12절까지가 기적적인 구원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명령을 받는 자들이 누구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지만, 내용상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전혀 눈먼 자들처럼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배후를 보지 못하고 진행되는 사건들에 놀라 당황해할 뿐입니다. 역사를 보이지 않게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정치 세력에 의존합니다. 술 취한 자들이 비틀거리듯 이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당혹감에 사로잡혀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비틀거립니다.

10절의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은 히브리어로 타르데마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어가 의식이 완전히 차단되는 깊은 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취하신 그 잠이며(창 2:21), 아브라함이 깊은 잠 가운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그 잠입니다(창 15:12). 원래 이 깊은 잠은 하나님의 창조와 언약이 이루어지는 신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같은 잠이 심판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을 감기셨다는 문장을 두고 우리는 흔히 곤란해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눈이 멀게 된 지도자들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맹목적 선택에 사로잡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스스로가 택한 부자유에 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악함의 굴레가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임의로 눈을 감기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은 눈을 계속 감고 있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6장 9절과 10절의 소명 말씀이 실제로 성취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11절과 12절의 두 사람이 인상적입니다. 봉인 때문에 못 읽는 사람과 문맹이라 못 읽는 사람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이 이미 예언자의 선포 일부가 글로 기록되어 수집되었음을 전제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글을 아는 자들도 봉인 때문에 읽을 수 없고, 글을 모르는 자는 봉인과 상관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완악함의 사슬에 사로잡힌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젝맨은 여기에 한 줄을 덧붙입니다. 영적인 것들은 영적으로 분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은 겸손해지거나 완악해지거나 둘 중 하나이지 중립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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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이렇게 널리 보급된 시대는 인류 역사에 없었습니다. 번역본이 여럿이고 주석이 검색되고 설교가 무한히 재생됩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봉해진 책처럼 느껴지는 일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문자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읽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원인을 지적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서 찾습니다.

특히 조심할 것은 '봉인된 채 읽는 습관'입니다. 매일성경을 펴고 본문을 읽고 해설을 읽고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 말씀이 내 결정 하나를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봉인된 책을 매일 손에 들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의 무서움은 그들이 성경을 멀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성경을 손에 들고도 읽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정보가 넘치는데 분별은 사라진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각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는 화면 앞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확신에 차고 점점 더 눈이 멀어 갑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께서는 이번 주 묵상 가운데 한 가지만 붙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읽고 감동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말씀 때문에 바꿀 행동 하나를 정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봉인을 뜯는 가장 확실한 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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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4절 입술의 공경과 기이한 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시어 우리 예배의 중심이 입술인지 마음인지를 물으시며, 사람의 계명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종교를 무너뜨리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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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진단들이 마침내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13절). 가까이 있는 것은 입이고, 멀리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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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사야의 고발에 맞서 그의 청자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제의 규정으로 대체시켰습니다. 이들에게는 제의 준수의 열심과 철저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눈에 이들의 제의적 경건은 입술의 위선에 불과합니다.

13절의 '사람의 계명'을 김필회 교수는 제의 규정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며 찬양과 감사와 탄식의 노래를 부르지만, 이는 단지 입술의 움직임에 불과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제의적 경건이 이들로 성전을 찾게 하지만, 이들은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하거나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제의적 가르침을 통해 습득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리에 제의 규정을 올려놓습니다.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7장에서 장로들의 전통을 앞세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 7:6-7). 이사야가 주전 8세기에 진단한 병이 주후 1세기에도 똑같이 살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종교는 언제나 마음보다 규정을 다루기가 쉽습니다. 마음은 측정되지 않지만 규정은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14절의 '기이한 일'을 김필회 교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시는, 놀라움을 야기하는 신적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출애굽과 같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서늘한 반전이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 사이의 연관성을 전제하는데, 14절은 양자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통하여 그분의 기이한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데,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의 지혜는 참된 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지혜자들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보여 줄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에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를 함께 보라고 지시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전 1:19)라고 오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의 정체를 십자가로 밝힙니다. 예루살렘을 하룻밤 사이에 구하신 그 갑작스러움이 결국 골고다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 지혜자들이 도무지 읽어 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봉한 책을 여는 열쇠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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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배의 자리를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입니다. 찬양은 뜨거운데 삶은 차갑고, 헌금은 정확한데 이웃과의 셈은 흐리고, 예배 출석은 성실한데 가정에서의 말은 거칠다면,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이 멀리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진단도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 배운 매뉴얼의 총합이 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은혜받는다, 이 정도는 해야 신앙이 좋은 것이다 하는 문장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대신 차지합니다. 그 매뉴얼은 편안합니다. 측정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아니라 사람에게 배운 습관일 뿐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규정과 성과를 다루는 데 능숙해졌습니다. 출석과 헌금과 사업의 숫자로 신앙을 환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능숙함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지만, 동시에 그 능숙함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사회 앞에서 겪는 부끄러움의 뿌리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입술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번 주에 아주 작은 실천 하나를 권합니다. 주일 예배 전에 삼 분만 눈을 감고, 오늘 내가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는 그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를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위치를 자꾸 확인하는 사람만이 마음의 이동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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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를 성실히 지키면서도

정작 그 절기의 주인이신 당신을 잊고 살았습니다.

달력은 돌아가는데 마음은 제자리인 저희를

오늘 이 말씀 앞에 세워 주십시오.

한때 신실하였던 자리를 기억하게 하시고,

지금 저희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지

정직하게 듣게 하여 주십시오.

.

주님,

저희 계산이 끝나는 자리에서

순식간에 갑자기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막다른 곳에 선 성도들의 곁에 서 주시고,

우레와 폭풍 속에서도 저희를 돌보시는

그 손길을 알아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은혜를 겪고도 잠들어 있는

어리석음에서는 저희를 건져 주십시오.

.

주님,

말씀이 봉한 책처럼 닫혀 있는 날들을 고백합니다.

읽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들었으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희 눈을 덮고 있는 깊은 잠을 걷어 주시고,

오늘 읽은 한 구절 때문에

바꿀 수 있는 행동 하나를 주십시오.

순종으로 봉인을 뜯게 하여 주십시오.

.

주님,

입으로는 가까이 하면서 마음은 멀리 두었던

저희 예배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사람에게 배운 습관이 아니라

살아 계신 당신을 경외하게 하시고,

지혜자의 지혜가 무너진 자리에 세워지는

십자가의 기이한 일을 붙들게 하여 주십시오.

저희의 입술이 아니라 저희 자신을 받아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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