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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6:01-27:01 구원을 성벽 삼은 성읍과 티끌에 누운 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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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유다 땅에서 부를 노래로 본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으나 그 성벽은 사람이 쌓은 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삼으신 구원이며, 그 문은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에게 열립니다(1-4절). 높은 데 거하던 자의 솟은 성은 진토에 미치도록 헐리고 그 위를 빈궁한 자의 발이 밟습니다(5-6절). 이어 노래는 탄식으로 바뀝니다. 밤새 주를 사모하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은총을 입고도 의를 배우지 않는 악인이 있습니다(7-12절). 백성은 다른 주들이 자기를 관할하였음을 고백하고, 산고를 다 겪고도 바람을 낳은 것 같다고 신음합니다(13-18절). 그 빈손 위에 티끌에 누운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는 이슬 같은 약속이 내립니다(19절). 끝으로 분노가 지나기까지 밀실에 숨으라는 권면과 리워야단을 벌하시는 여호와의 칼이 선포됩니다(20절-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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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4장에서 27장까지를 성서학자들은 흔히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 부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네 장이 특정 나라가 아니라 온 땅을 대상으로 하는 예언이며, 그 시점이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정리합니다. 13장에서 23장까지가 개개의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선포했다면, 여기서는 온 세상이 그 대상입니다. 예언자의 시선은 파국적인 땅의 심판을 넘어 새롭게 시작하는 미래까지 내다보며, 이런 종말론적 대사건들은 결국 여호와께서 우주의 왕이심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큰 흐름의 한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 26장 자체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절에서 6절까지는 여호와께서 행하실 때 그분을 의뢰하는 이들이 부르는 찬양이고, 7절에서 21절까지는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의 탄식시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25장과 26장이 이사야 묵시록 안에서 청중을 향한 가장 실질적인 권면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날에 이루어질 세상의 역전을 전하는 이 메시지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사실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던 빈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핵심 권면은 놀랍게도 폭풍 같고 폭양 같은 악인의 기세 속에서 여호와를 굳게 신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찬양과 탄식이 한 장 안에 나란히 놓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노래는 이미 이긴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아직 이기지 못한 사람이 미리 부르는 노래입니다.

# '성읍'은 이사야 묵시록 전체를 꿰는 열쇠말입니다. 24장 10절의 '혼란한 성읍', 25장 2절의 '견고한 성읍', 26장 5절의 '솟은 성', 27장 10절의 '견고한 성읍'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며 스스로 높아진 인간 문명의 자부심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26장 1절에서 단 한 번, 같은 표현이 정반대 의미로 뒤집힙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이 성읍이 다른 모든 성읍과 다른 이유는 오직 하나, 성벽의 재료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지는 성과 무너지지 않는 성을 가르는 것은 높이가 아니라 재료입니다.

# 19절의 부활 언급과 27장 1절의 리워야단은 각각 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김근주 교수에 따르면 19절의 본래 의미는 포로 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귀환이며, 이 선포는 이사야 묵시록의 마지막인 27장 12절과 13절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사야 본문 자체가 죽음 이후의 삶을 직접 논하지는 않지만, 제2성전기 이래 부활 신앙이 유대 백성 가운데 전면적으로 등장하면서 이 구절은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애초에 부활 교리를 의도하지 않았으나 부활 신앙의 분명한 단초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27장 1절의 리워야단과 용(탄닌)은 고대 근동의 혼돈 괴물입니다. 우가릿에서 발견된 바알 신화에서 바알은 바다와 용과 꾸불거리는 뱀을 물리친 자로 소개되는데, 그 뱀을 꾸미는 말이 '꿈틀거리다'여서 본문의 "꼬불꼬불한 뱀"이라는 묘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경은 이 신화적 소재를 빌려 오되 전복시킵니다. 리워야단은 신들과 겨루는 대등한 신이 아니라 창세기 1장 21절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일 뿐이며,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이르러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큰 용"으로 그 정체가 최종적으로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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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1-6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으로 삼으신 성읍

하나님은 사람이 쌓은 성벽 대신 당신의 구원 자체를 성벽으로 삼아 주시고,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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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미래에서 시작합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사 26:1). 부를 노래의 첫마디는 성읍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어 성문 앞에서 명령이 떨어집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라(2절). 그 성 안에서 누리는 복이 곧바로 이어집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다(4절). 그리고 시선이 성 밖으로 옮겨 갑니다.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는데(5절), 그 무너진 자리를 밟는 발은 뜻밖에도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입니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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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섯 절은 이사야 묵시록 전체가 걸어온 길의 도착점입니다. 24장에서 온 땅이 뒤집히고 25장에서 만민의 식탁이 차려진 뒤, 26장은 마침내 그 나라의 성읍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성읍의 방어 시설 목록에는 돌도 나무도 병사도 없습니다. 성벽과 외벽이라는 이중 방어선의 재료가 오직 '구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성벽은 한 도시의 자존심이자 신학이었습니다. 성벽이 두꺼울수록 그 도시의 신이 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성벽의 두께를 자랑하지 않고 성벽의 재료를 바꿔 버립니다. 이것은 방어 방식의 개선이 아니라 안전에 관한 개념 자체의 교체입니다.

2절의 "문들을 열고"는 성전 입장 예식의 언어를 반향합니다. 시편 24편의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나 시편 118편 19절의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가 그러합니다. 다만 여기서 문을 통과할 자격은 혈통도 신분도 아니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성문 앞에서 묻는 것은 당신이 누구의 후손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지키며 살았느냐입니다.

3절의 '심지'는 히브리어 '예체르'입니다. 김근주 교수의 설명대로 이 단어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쓰는 틀과 관계가 있어서, 틀로 만든 토기(사 29:16)나 우상을 만드는 틀(합 2:18)을 뜻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쓰신 틀이라는 의미에서 '체질'을 뜻하기도 하며(시 103:14), 사람 마음속의 틀이라는 의미에서 '품은 뜻'이나 '계획'을 뜻하기도 합니다(창 6:5; 신 31:21). 그러므로 '심지가 견고하다'는 것은 마음의 틀이 자기 안에서 튼튼하게 지탱된다는 뜻이며, 자신의 생각을 저버리지 않고 뜻한 대로 지켜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예체르 싸무크'를 마음이 요동하지 않으며 언제나 일관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견고함은 완고함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단단한 것과 신뢰가 단단한 것은 전혀 다릅니다. 3절 후반절이 곧바로 그 실제 내용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심지의 견고함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고 신뢰의 대상에게서 나옵니다.

여기에 주어지는 복이 '샬롬 샬롬'입니다. 개역개정이 "평강하고 평강하도록"으로 옮긴 이 반복은 히브리어의 강조 용법으로, 완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평강을 뜻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믿음은 언제나 핵심 주제였습니다. 아하스에게 주어진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는 말씀은 원래 정치적, 군사적 맥락에서 나왔지만, 26장에 이르러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삶의 근본 원리로까지 확장됩니다. 김근주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 드릴 인간의 최대 응답은 잠잠한 신뢰입니다.

5절과 6절의 역전은 한나의 노래(삼상 2:4-10)와 마리아의 노래(눅 1:51-53)로 이어지는 성경의 오랜 가락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서늘한 아름다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솟은 성을 헐어 진토에 미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인데, 그 폐허를 밟고 지나가는 발은 하나님의 발이 아니라 빈궁한 자의 발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고, 그 결과 위를 걷는 영광은 가장 낮은 자에게 돌아갑니다. 신약의 성취는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0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 말하며,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은 성벽의 재료가 벽옥이되 그 성에 성전이 없는 성입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친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 10:9)라고 하셨습니다. 성벽이 구원이라면 성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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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성읍을 쌓는 일에 대단히 유능했습니다. 건물을 올렸고 조직을 갖추었고 프로그램을 정비했습니다.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성벽의 재료입니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근거가 무엇인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재정이 안정되어 있어서, 사람이 모여서, 이름이 알려져서 안전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26장 1절의 성읍이 아니라 26장 5절의 솟은 성입니다. 두 성은 겉모습이 아주 비슷해서 무너져 봐야 구별이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붙들 것은 심지의 견고함입니다. 다만 이 단어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소신 있는 사람'은 대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념이 강한 사람이 곧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통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견고함은 내 생각을 관철하는 힘이 아니라, 흔들릴 이유가 차고 넘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께로 향한 얼굴을 돌리지 않는 방향의 일관성입니다. 자기 확신이 단단한 사람은 부딪히면 깨지지만, 신뢰가 단단한 사람은 부딪히면 오히려 붙듭니다.

그리고 2절이 우리에게 문을 열라고 명령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견고한 성읍의 첫 번째 실천은 방어가 아니라 개방입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면 문은 자연히 닫힙니다. 이 여름 우리 교회의 문턱은 누구에게 낮았고 누구에게 높았는지 돌아봅시다. 처음 온 사람이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서성이지는 않았는지, 사정이 어려워진 성도가 조용히 발길을 끊을 때 그 빈자리를 알아챘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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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7-12 의인의 첩경과 밤에 사모하는 영혼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친히 평탄하게 하시며, 밤에 당신을 사모하는 영혼에게 당신을 알리시고, 우리의 모든 일까지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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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이 끝나고 탄식이 시작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사 26:7). 그 길에서 공동체는 기다립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으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한다고 고백합니다(8절). 그 사모함에는 시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그 이유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이 이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습니다(10절). 주의 손이 높이 들려도 그들은 보지 못하지만,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며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를 것입니다(11절). 그리고 단락은 뜻밖의 고백으로 닫힙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며,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다는 것입니다(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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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의 '첩경'은 사람이 다니고 수레가 지나 다져진 길을 가리킵니다. 주목할 것은 문장의 주어입니다. 의인의 길이 저절로 평탄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신 주께서 평탄하게 하십니다. 의인이라 불리는 사람도 자기 길을 스스로 닦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8절과 9절의 기다림과 사모함이 왜 그렇게 절박한지를 설명해 줍니다. 길을 닦으실 분이 오셔야만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의 '밤'을 흘려 읽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밤은 대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씨름한 것도 밤이었고, 겟세마네의 기도도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바로 그 밤을 사모함의 시간으로 부릅니다. 낮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응답이 눈에 보이고 증거가 손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밤에 하나님을 찾는 것,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여전히 그분을 향하는 것이 신앙의 실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중심'으로 옮겨진 말은 사람의 가장 안쪽을 가리키는데, 밤은 바로 그 안쪽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10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뼈아픈 관찰 중 하나입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않습니다. 은총이 자동으로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받으면 달라지고 용서받으면 뉘우친다고 전제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정직하게 본 사람입니다. 은총을 받고도 그것을 자기 무죄의 증거로 삼는 사람이 있고, 심판이 유예된 것을 심판이 없다는 뜻으로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의를 배운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의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려면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그 자세의 이름이 11절의 '봄'입니다. 주의 손이 높이 들려도 그들은 보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습니다. 영적 무지의 본질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시선의 거절입니다.

12절은 이 단락 전체를 신학적으로 뒤집는 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 26:12). 우리가 한 일조차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마지막 겸손입니다. 밤새 사모한 것도, 의를 배운 것도, 견딘 것도 결국 그분이 이루신 일입니다. 바울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쓴 것과 정확히 같은 자리입니다. 은총을 입고도 의를 배우지 않는 악인과, 자기가 배운 의조차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의인. 10절과 12절 사이에 놓인 이 간격이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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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장 흔한 죄의 형태는 파렴치가 아니라 무감각입니다. 뉴스에 오르는 이름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 무감각이 개인의 성품 문제만은 아니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나쁜 소식에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견디는 법을 배웠습니다. 문제는 교회도 그 익숙함을 함께 배웠다는 데 있습니다. 은총을 가장 많이 말하는 공동체가 은총을 가장 값싸게 소비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밤에 주를 사모하는 법을 배웁시다. 신앙이 좋다는 말이 종종 감정이 뜨겁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본문이 칭찬하는 사람은 뜨거운 사람이 아니라 밤에도 방향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 계절, 사업이 풀리지 않는 계절, 자녀가 마음을 닫아 버린 계절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가 우리 신앙의 실제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새벽 자리가 소중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시간은 아직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2절을 우리 공동체의 언어로 삼읍시다. 한 해를 결산하며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다고 말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셨다고 먼저 말합시다. 이 순서가 바뀌면 교회는 아주 빠르게 솟은 성이 됩니다. 헌신한 사람이 대접받기를 요구하고, 오래 섬긴 사람이 발언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이미 12절을 잃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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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13-19 바람을 낳은 산고와 빛난 이슬

하나님은 다른 주들의 관할 아래 이름을 빼앗긴 백성에게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티끌에 누운 자들을 이슬로 깨우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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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그 다른 주들의 최후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하는데,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시고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기 때문입니다(14절). 반면 이 나라는 크게 되었고 이 땅의 모든 경계가 확장되었습니다(15절). 그러나 그 사이의 실제 시간은 환난이었습니다.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고 주의 징벌이 임할 때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16절). 그 기도의 모습을 예언자는 산고로 묘사합니다.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17절). 그리고 결과가 참혹합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 26:18).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래가 터집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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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의 '다른 주들'은 역사적으로는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이었고, 상징적으로는 하나님 백성을 다스리며 압제한 모든 세력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14절의 '그들'이 곧 13절의 이 주인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흥미로운 것은 14절이 그들의 죽음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이 다시 살지 못한다는 말의 실질적 의미는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입니다. 고대인에게 완전한 죽음이란 심장이 멎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잊히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제국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박물관 유리 너머에서 읽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죽은 자와 방불한 처지에서도 이름을 잃지 않습니다. 13절 후반절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부르는 이름이 있는 자에게는 불러 주실 이름도 있습니다.

17절과 18절의 산고 비유는 이 본문에서 가장 정직한 대목입니다. 잉태했고, 산기가 임박했고, 부르짖었는데, 낳은 것이 바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이며 숨이며 헛것입니다. 산모가 겪은 고통은 전혀 가짜가 아니었는데 결과가 없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신앙이 아니라 성실했던 신앙의 실패입니다. 우리는 흔히 열매가 없으면 진정성이 없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만, 성경은 진정성이 있어도 열매가 없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더 나아가 18절은 그 실패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했고, 그것이 애초에 자기 몫이 아니었음을 여기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빈손 위에 19절이 놓입니다. 김근주 교수가 짚은 대로 19절의 '티끌'은 히브리어 '아파르'인데, 이 단어는 25장 12절에서 모압의 성벽이 무너져 이르는 진토였고 26장 5절에서 솟은 성이 엎어져 미치는 진토였습니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 낮아져 이르는 자리의 이름이 티끌입니다. 그런데 19절은 같은 단어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씁니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야말로 티끌까지 낮아져 있고 대적들은 높이 솟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면 그 자리가 통째로 뒤바뀝니다. 높은 자는 티끌에 이르고, 티끌에 누운 자는 깨어 노래합니다.

이 소생의 원동력을 예언자는 이슬이라 부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의 설명대로 이슬은 강수량이 절대 부족한 가나안 땅에서 매우 중요한 물 공급원이었습니다(창 27:28; 삼하 1:21; 왕상 17:1). 일교차가 큰 근동에서 매일 생성되는 이슬은 메마른 대지를 적셔 시든 초목을 소생시켰고,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에는 사실상 유일한 물이었습니다. 이슬의 신학적 아름다움은 그것이 오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슬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밤새 공기 중에서 맺힙니다. 소리가 없고, 사람이 만들 수 없으며, 오직 밤에만 생깁니다. 9절에서 밤새 주를 사모한 그 영혼에게 19절의 이슬이 응답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배치가 아닙니다.

앞서 밝혔듯 이 구절의 본래 지평은 포로 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귀환이며,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과 같은 신학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이 이슬은 한 무덤 앞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티끌에 누운 자들에게 깨어 노래하라 하신 그 음성은,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신 분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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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낳아 본 사람만 이 본문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십 년을 기도했는데 달라진 것이 없는 가정이 있습니다. 평생을 바쳐 키운 자녀가 교회를 떠난 부모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일했는데 결과가 초라한 사업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지난 세대에 세계 선교를 감당하겠다고 산고를 겪었으나, 지금 돌아보면 낳은 것이 무엇인지 서로 묻기 부끄러운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실패를 변명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실패한 자리가 바로 이슬이 맺히는 자리라고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절은 노력하면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격려가 아닙니다. 18절과 19절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습니다. 산고 끝에 바람을 낳은 사람이 더 노력해서 아기를 낳는 이야기가 아니라, 낳지 못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낳으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위로는 "조금만 더 힘내라"가 아니라 "이제 네 손에서 놓아라"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거민을 출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 일을 하실 분이 누구인지 비로소 보입니다.

그리고 13절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다시 읽읍시다. 다른 주들은 지금도 우리를 관할합니다. 그 이름은 더 이상 앗수르나 바벨론이 아니라 실적, 평판, 건강, 자녀의 성적, 부동산 시세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서 실제 시간과 감정의 지배권은 그것들에게 내어 준 채 살아갑니다. 이번 한 주간 나의 시간을 가장 많이 가져간 주인이 누구였는지 정직하게 적어 보십시오. 그 목록이 곧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이 매일 아침 그 목록을 다시 정리하며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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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0-27:1 잠깐 숨을지어다, 그리고 여호와의 칼

하나님은 분노가 지나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밀실에 감추시고, 마침내 혼돈의 괴물 리워야단을 당신의 칼로 벌하시어 옛 싸움을 끝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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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노래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뜻밖에도 숨으라는 명령입니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사 26:20). 그 이유가 곧바로 제시됩니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인데, 그때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할 것입니다(21절). 그리고 그 나오심의 첫 번째 일이 27장 1절에 선포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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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의 '밀실'은 히브리어 '헤데르'로 침실이나 다락방을 뜻하며, 그 방의 주인 외에는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창 43:30; 삿 15:1; 삼하 13:10). '닫고'에 해당하는 '싸가르'는 사방으로 에워싸 완전히 밀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명령은 문자적으로 '네 침실에 들어가 네 뒤로 문을 완전히 잠가라'입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두 장면을 함께 떠올립니다. 하나는 홍수 때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가고 여호와께서 친히 문을 닫으신 밤이고(창 7:16), 다른 하나는 유월절 밤 이스라엘 자손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아침까지 문 밖에 나가지 않았던 그 밤입니다(출 12:22-23). 두 밤의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그 밤에 하나님의 백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안에 있었을 뿐이고, 밖에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잠깐'이라는 말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키므아트'는 아주 짧은 순간을 뜻합니다. 시편 30편 5절이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라고 노래한 그 잠깐입니다. 밀실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결코 잠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셈법에서 진노의 시간은 언제나 짧고 은총의 시간은 언제나 깁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권면의 내용을 한마디로 '기다리라'로 요약하며, 그 기다림이 25장과 26장이 줄곧 말해 온 여호와를 향한 굳은 신뢰와 결부된다고 봅니다.

21절은 종말의 심판이 무엇을 하는 일인지를 압축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 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4장 10절에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호소했던 그 장면의 확장판입니다. 땅은 지금까지 피를 덮어 왔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흙이 쌓이고 사건이 잊히면서 억울한 죽음은 지면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날에 땅이 덮기를 그만둡니다. 심판이란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덮여 있던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며 억울한 죽음과 희생이 밝혀지고 신원됩니다.

27장 1절의 리워야단은 앞서 배경에서 살핀 대로 고대 근동의 혼돈 괴물이며, 시편 74편 13절과 14절, 이사야 51장 9절과 10절에서 하나님의 태곳적 승리의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제가 중요합니다. 시편과 51장은 하나님이 이미 리워야단을 부수셨다고 과거로 노래하는데, 27장 1절은 "그 날에" 벌하시리라고 미래로 선포합니다. 창조 때 이미 제압된 혼돈이 역사 안에서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끝나는 날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의 현재가 정확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미 이겼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 그래서 밀실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이 이 뱀의 이름을 최종적으로 밝히고, 요한계시록 20장이 그 마지막 결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27장 1절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은 결국 십자가에서 이미 휘둘러진 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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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은 도피처가 아니라 구별된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하셨을 때, 그 골방은 이사야 26장 20절의 밀실과 같은 계보에 있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문을 닫고 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 문 닫음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아가 방주에 있던 동안 세상이 심판받았듯, 밀실은 세상을 외면하는 자리가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리입니다. 나가서 싸우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싸움은 그분의 칼에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이 자주 지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칼을 자기가 대신 휘두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21절은 우리 사회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덮인 피가 많은 땅입니다. 여전히 이름조차 온전히 불리지 못한 죽음들이 있고, 산업 현장에서 매년 반복되는 죽음이 있으며, 통계 숫자 뒤로 사라지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피가 영원히 덮여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잊는 편이 편한 자리에서 기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지역의 아픈 자리를 기억하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기억이야말로 부활을 믿는 사람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시는 대상은 압제자였지, 희생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7장 1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어둠은 하나님과 대등한 힘이 아닙니다. 리워야단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힘겨운 것은 사실이나, 그 싸움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결말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말이 정해진 싸움을 정직하게 살아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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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여호와여,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쌓은 성벽이 아니라 주께서 이루신 구원이 우리의 성벽임을 믿습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왔는지 정직하게 들여다보게 하시고

높아진 것들이 진토에 미치는 것을 볼 때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는 주님,

고집이 아니라 신뢰로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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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는 주님,

우리 힘으로는 한 걸음도 길을 닦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밤에도 주를 사모하는 영혼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응답이 보이지 않고 증거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 방향의 일관성을 배우게 하옵소서.

은총을 입고도 의를 배우지 않는 무딤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가 이룬 모든 일이 사실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임을

잊지 않는 겸손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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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낳은 밤을 아시는 주님,

산고를 다 겪고도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이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 빈손을 부끄러워하지 말게 하시고

바로 그 자리에 주의 이슬이 맺히게 하옵소서.

티끌에 누운 자들아 깨어 노래하라 하신 음성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지치고 낮아진 이들을 일으켜 주옵소서.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는 시대에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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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지나기까지 밀실에 우리를 감추시는 주님,

싸움을 우리 손에 쥐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게 하시고

주의 칼이 이미 십자가에서 휘둘러졌음을 믿고 잠잠하게 하옵소서.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낼 그 날을 기다리며

잊는 편이 편한 자리에서 기억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문을 여는 성읍이 되게 하시고

지친 이들이 이곳에서 이슬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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