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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7:21-38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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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을 위협하던 산헤립을 향해 처녀 딸 시온이 도리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한다고 선언하시고, 그가 자랑하던 모든 정복이 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행하시고 정하신 일이었음을 밝히시며, 갈고리로 코를 꿰고 재갈을 물려 오던 길로 돌려보내겠다 하십니다(21-29절). 이어 히스기야에게는 삼 년의 징조가 주어집니다. 두 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둘 것이며, 남은 자가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인데,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30-32절). 선포된 말씀은 그대로 역사가 됩니다. 앗수르 왕은 이 성에 화살 하나 쏘지 못한 채 돌아가고, 여호와의 사자가 하룻밤에 십팔만 오천을 치며,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은 자기 신의 신전에서 아들들의 칼에 죽습니다(33-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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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어제 우리가 읽은 히스기야의 기도(37:14-20)에 곧바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협박의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했던 왕에게, 하나님은 21절에서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라고 응답을 여십니다. 기도가 하늘에 접수되었다는 이 한 문장 위에서 본문 전체가 펼쳐집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 36-39장을 두고, 운문 신탁이 압도적인 이사야서 다른 장들과 달리 산문이 지배하는 독특한 단락이며, 그 주인공은 "의로운 왕의 전형적인 인물로 기술되는" 히스기야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히스기야 왕은 성전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간구에 구원약속으로 응답하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신다"고 이 이야기의 뼈대를 요약하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응답'(21-35절)과 '실행'(36-38절)에 해당합니다.

# 역사의 자리는 주전 701년, 산헤립의 유다 원정입니다. 앗수르 왕의 연대기는 히스기야를 "새장에 갇힌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고 자랑하지만, 정작 그 새장을 끝내 열지 못한 채 철군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침묵의 자리를 성경이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한편으로는 앗수르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만들어 불순종한 다윗 왕조를 징계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의 포위공격이 실패하도록 만들어 앗수르를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이 잠시 고용하신 진노의 막대기였을 뿐(사 10:5), 그 막대기가 스스로 도끼 든 손을 자랑하는 순간 부러뜨려집니다.

# 정경의 자리에서 보면 이사야 36-39장은 앗수르 시대를 다루는 전반부(1-35장)와 바벨론 포로기의 위로를 선포하는 후반부(40-66장)를 잇는 다리입니다. 연대기로는 38-39장의 사건이 먼저이고 36-37장의 구원이 나중이지만, 성경은 순서를 뒤집어 예루살렘의 구원을 앞세웁니다. 김필회 교수가 지적하듯 38장 6절에서 히스기야에게 주신 구원 약속이 36-37장에서 성취된 것으로 읽히도록 배열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학적 확신이 역사 서술의 뼈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 산헤립의 죽음(주전 681년)까지 내다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하룻밤의 구원과 이십 년 뒤의 심판을 한 호흡에 담아, 성경은 더디 오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한 절도 땅에 떨어지지 않음을 증언합니다.

# 이 이야기가 열왕기하 18-19장에 거의 그대로 다시 나온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반복 현상을 예레미야 52장과 열왕기하의 병행에 견주면서, 이 이야기들이 두 책에 자리 잡기 전에 독자적인 전승으로 존재했으리라는 학계의 일치된 견해를 소개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역사서와 예언서에 두 번 실렸다는 것은, 이 사건이 이스라엘 신앙에 얼마나 깊은 각인을 남겼는지를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은 단지 한 차례의 군사적 행운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온을 당신의 거처로 삼아 지키신다는 시온 신학의 살아 있는 근거가 되었고, 훗날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이 40장 이하의 위로를 믿을 수 있는 역사적 담보가 되었습니다. 다만 김필회 교수는 이 구원이 "일회적 성격"의 사건이기도 하다고 경계합니다. 한 세기 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기억을 성전과 도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미신으로 굳혀 버렸고, 그 미신은 주전 586년의 폐허 앞에서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과거의 구원 경험은 오늘의 순종을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어제의 은혜가 오늘의 신앙의 토양이 되게 하되, 오늘의 회개를 면제해 주는 부적이 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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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9절 갈고리로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교만한 제국의 걸음까지 태초부터 정하신 경영 안에 두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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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21절). 하나님의 대답은 먼저 산헤립을 향합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다는 것입니다(22절). 이어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23절). 산헤립은 병거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올라 백향목을 베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며 애굽의 모든 하수를 발바닥으로 말리겠다고 큰소리쳤지만(24-25절), 하나님은 그 모든 정복이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26절)라고 선언하십니다. 성읍들이 무너진 것도, 그 주민들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같이 된 것도(27절) 하나님의 정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집니다.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28-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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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첫 대답이 '처녀 딸 시온의 조소'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포위된 성, 곧 함락될 것 같던 예루살렘이 도리어 정복자를 비웃으며 머리를 흔듭니다. 머리를 흔드는 것은 조롱의 몸짓입니다(시 22:7). 어제까지 랍사게의 조롱을 침묵으로 견디던 성이,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조롱하는 자리와 조롱받는 자리가 뒤바뀝니다. '처녀 딸'이라는 호칭은 이 성이 끝내 침략자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으리라는 보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눈에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정반대의 판결문이 낭독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3절은 이 전쟁의 본질을 폭로합니다. 산헤립이 능욕한 대상은 유다의 군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였습니다. 이사야서가 즐겨 쓰는 이 호칭(카도쉬 이스라엘)이 여기서 날카롭게 빛납니다. 24-25절에 인용된 산헤립의 자랑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올라갔고, 내가 베었고, 내가 이르렀고, 내가 팠고, 내가 말리리라. 주어가 온통 '나'입니다. 레바논의 높은 백향목을 베고 애굽의 하수를 말리겠다는 말은 단순한 군사적 허풍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제 발바닥 아래 두겠다는 신성 참칭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29절의 원어를 풀면서, '네 오만함'(샤아난)이 하나님의 귀에 "올라왔다"(알라)는 표현이 마치 산헤립의 오만이 하늘 보좌에까지 상달된 장면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기도만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도 하늘에 올라가 접수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26절입니다.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산헤립의 혁혁한 전과는 그의 능력의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에차) 안에서 잠시 맡겨진 역할이었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당신의 계획에 따라 역사를 이끌어가시며, 세상의 어떤 권력도 그분의 결정을 꺾거나 돌릴 수 없습니다." 27절의 '지붕의 풀' 은유가 그래서 통렬합니다. 지붕 위의 풀은 높은 곳에서 한껏 자란 듯 보이지만 흙이 얕아 해가 뜨면 이내 마릅니다. 높이 올라갔다는 바로 그 사실이 뿌리 없음의 증거가 되는 것, 그것이 제국의 운명입니다.

28-29절의 갈고리와 재갈은 앗수르 자신의 형벌 도구였습니다. 앗수르는 정복한 왕들의 코나 입술에 쇠고리를 꿰어 끌고 다니며 제국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갈고리'(하흐)가 짐승을 끄는 쇠고리이고 '재갈'(메테그)이 야생마를 길들이는 도구라고 풀면서, 하나님께서 산헤립을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다루어 강제로 돌려보내실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남을 짐승처럼 끌고 다니던 자가 짐승처럼 끌려 돌아갑니다. 심판은 종종 이렇게 자기가 휘두르던 도구의 모양으로 돌아옵니다. 신약은 이 교만한 제국의 초상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비방하며 성도를 삼키려는 짐승의 권세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무장 해제하셨다고 선언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갈고리에 꿰여 돌아간 산헤립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질 모든 오만한 권세의 첫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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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사회는 힘이 곧 정의가 되는 논리에 깊이 길들어 있습니다. 더 큰 자본,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언성이 이기는 세상에서, 교회조차 규모와 영향력을 곧 하나님의 복으로 읽는 유혹에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높이 올라간 것들의 목록이 아니라 뿌리 내린 것들의 목록이 하늘의 장부임을 보여 줍니다. 지붕 위의 풀처럼 화려하게 자라는 길과, 낮은 땅에 뿌리를 내리는 길 사이에서 광양사랑의교회는 뿌리의 길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본문은 우리가 당하는 능욕의 최종 당사자가 하나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신앙 때문에 조롱받는 자리에서 우리가 할 일은 발끈하여 같은 언어로 되받는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처럼 그 조롱을 하나님 앞에 펴 놓는 것입니다. 판결은 우리의 몫이 아니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스스로 신원하십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온라인의 말들 속에서 우리가 삼킨 억울함이 있다면, 그것을 되갚을 궁리로 밤을 새우는 대신 그분의 법정에 접수해 두는 믿음을 연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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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2절 심지 않은 해의 양식과 뿌리 내리는 남은 자

하나님은 심지 않은 해에도 양식을 내시고, 남은 자를 살려 구원의 역사를 이어 가시는 열심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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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히스기야를 향합니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30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고,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고,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는 것입니다. 이어 남은 자에 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31-32절).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의 보증으로 한 문장이 선포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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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조의 내용이 뜻밖에도 소박합니다. 하늘의 불도, 기이한 천체 현상도 아니고, 세 해 동안의 농사 이야기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30절의 원어를 풀면서 첫해의 양식 '사피아흐'가 떨어진 씨앗에서 저절로 자란 곡식을, 둘째 해의 '샤히스'가 거기서 다시 자생한 곡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전쟁으로 파종을 놓친 땅에서 두 해 동안은 심지 않은 곡식이 백성을 먹이고, 셋째 해부터는 정상적인 농사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중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침략자의 수탈이 끝났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수고가 미치지 못하는 두 해 동안 하나님이 친히 식탁을 차리신다는 약속입니다. 심지 않은 해의 양식, 그것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임을 몸으로 배우게 하는 하나님의 교육 과정입니다. 김필회 교수가 강조하듯 이 징조는 믿음 없는 자를 억지로 설득하는 마술이 아니라,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살면서 확인하게 하여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인(印)과 같은 것입니다.

31절의 은유는 이사야서 남은 자 신학의 절정입니다.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카리스 종합주석은 여기 쓰인 '남은 자'(쉬에리트)와 '피하는 자'(펠레타)가 각각 살아남은 생존자와 탈출한 자를 가리키며, 펠레타가 비유적으로 '구원'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이사야는 부름받던 날부터 이 소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루터기에서 거룩한 씨가 난다 하였고(사 6:13), 아들의 이름을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스알야숩)라 지었으며(사 7:3),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사 10:21)을 내다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남은 자의 생존 방식이 나무의 언어로 그려집니다. 위로 서둘러 오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것, 보이는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깊이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지붕 위의 풀(27절)과 뿌리 내린 나무(31절)의 대조가 이 장 전체의 그림입니다. 제국은 높이로 서고 남은 자는 깊이로 삽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키느아트 아도나이 체바오트)은 이 약속 전체의 서명란입니다. '열심'(킨아)은 본래 질투라 옮길 만큼 뜨거운 사랑, 자기 백성과 자기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애정을 가리킵니다. 이 문구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정의와 공의의 나라가 굳게 서리라는 약속에도 똑같이 서명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곧 남은 자를 살리시는 열심과 메시아를 보내시는 열심은 같은 열심입니다. 다윗의 뿌리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아래로는 더러운 역사의 밑바닥까지, 죽음의 깊이까지 뿌리를 내리시고, 위로는 부활의 열매를 맺으신 참 남은 자이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신 말씀처럼, 교회는 그분께 접붙여져 오늘도 뿌리에서 열매로 자라 가는 남은 자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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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교회는 성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등록 교인이 줄고 다음 세대가 얇아지는 통계 앞에서, 한국교회는 초조하게 프로그램을 바꾸고 화려한 행사를 기획하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처방은 반대 방향입니다. 두 해 동안 심지 못하는 시간을 하나님의 식탁으로 받아들이고, 그 시간에 아래로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새벽 묵상과 목장의 나눔과 이름 없는 중보기도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뿌리의 일입니다. 열매가 더디다고 뿌리 내리기를 멈추면 우리는 지붕 위의 풀이 됩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승진과 성취의 사다리에서 잠시 내려선 것 같은 시간, 병상의 시간, 자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실은 뿌리의 계절일 수 있습니다. 그 계절에 우리가 할 일은 조급한 자책이 아니라, 스스로 난 곡식으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손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난 두 해를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심지 못한 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온 것은 누군가 우리가 심지 않은 자리에서 거두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손길을 세어 보는 것이 감사의 시작이고, 감사는 다시 뿌리를 내릴 힘이 됩니다. 그리고 기억합시다. 이 모든 회복의 주어는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우리가 뿌리 내리기를 힘쓰되, 열매는 그분의 열심이 맺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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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8절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 말씀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시듯, 하나님은 선포하신 말씀을 한 치도 어김없이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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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최종 판결을 선고하십니다.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33-34절). 그 이유가 35절에 선명합니다.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그리고 말씀은 그 밤으로 역사가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인을 치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체뿐이었고(36절), 산헤립은 떠나 니느웨에 거주하다가,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의 칼에 죽고, 그 아들 에살핫돈이 왕위를 잇습니다(37-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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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절의 판결문은 공성전의 절차를 하나하나 짚으며 그 전부를 부정합니다. 화살도, 방패도, 흉벽도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세계 최강의 군대가 목표를 눈앞에 두고 활시위 한 번 당기지 못한 채 돌아간다는 이 선언은, 예루살렘의 구원이 군사적 행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임을 미리 못 박아 둡니다. 35절은 그 행동의 동기를 밝힙니다.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김필회 교수는 이 구절을 이 단락의 열쇠로 꼽으면서, 예루살렘의 구원이 히스기야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랍사게와 산헤립의 편지가 짓밟은 것이 바로 그 이름이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 일어나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같은 문법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분이 신실하셔서,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맺으신 언약 때문에 우리는 보호받습니다.

36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압축된 전쟁 기사일 것입니다. 전투 묘사는 한 줄도 없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쳤다"는 문장 하나가 전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유월절 밤 애굽을 치던 그 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출 12:23). 애굽의 하수를 말리겠다던 자가 애굽을 치셨던 그 손에 쓰러진 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더라는 담담한 문장은, 인간의 어떤 무용담도 끼어들 수 없는 하나님의 단독 행동을 증언합니다. 오스월트 같은 주석가들이 지적하듯,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앗수르 군의 재앙 이야기나 산헤립 연대기가 예루살렘 함락을 끝내 말하지 못하는 침묵도 이 밤의 사건을 바깥에서 둘러 증언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심은 사망자 수의 고증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37-38절의 결말은 시간을 훌쩍 건너뜁니다. 니느웨로 돌아간 산헤립이 암살당한 것은 주전 681년, 예루살렘에서 물러간 지 이십 년 뒤의 일입니다. 성경이 이 긴 세월을 한 절에 접어 넣은 것은, 7절에서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신 말씀이 반드시 성취됨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가 통렬합니다. 그는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들들의 칼에 죽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조롱하던 자가 저를 지켜 주지 못하는 우상 앞에 엎드린 순간 무너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 살았고, 산헤립은 신전에서 경배하다 죽었습니다. 두 예배의 대조가 이 장의 마지막 그림입니다. 어디에 엎드리는가가 생사를 가릅니다. 그리고 이 신실하심의 문법은 신약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며(고후 1:2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요 1:14) 선포와 성취 사이의 간격은 마침내 한 인격 안에서 닫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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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응답의 속도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판정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룻밤 만에 이루어진 십팔만 오천의 구원은 쉽게 믿으면서, 이십 년 걸린 산헤립의 최후 같은 성취는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하룻밤과 이십 년이 나란히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안에도 오래 응답을 기다리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자녀의 돌아옴을, 몸의 회복을, 깨어진 관계의 화해를 십 년 넘게 아뢰어 온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기다림에게 말합니다. 선포된 말씀은 소멸 시효가 없다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그 약속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우리가 어디에 엎드려 있는지를 묻습니다. 위기의 날에 우리가 달려가 경배하는 니스록이 무엇인지, 통장 잔고인지, 연줄인지, 여론인지 정직하게 살펴야 합니다. 우상은 함께 무너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붙든 자를 지키십니다. 한 주간 우리의 예배가 습관의 자리가 아니라, 살아 계신 분 앞에 생사를 맡기는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일 아침 예배당에 앉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읍시다. 나는 지금 니스록 앞에 앉아 있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가. 그 물음이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예배는 낡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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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처음과 끝을 쥐고 계신 주권자 하나님,

제국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던 날에도

태초부터 정하신 주님의 경영은 흔들린 적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높이 오르는 것을 힘이라 부르는 세상에서

우리로 지붕 위의 풀의 운명을 분별하게 하시고

능욕과 억울함을 되갚을 궁리 대신

주님의 법정에 조용히 접수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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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 않은 해에도 식탁을 차리시는 은혜의 하나님,

성과가 보이지 않는 계절을 조급해하지 않고

아래로 뿌리를 박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스스로 난 곡식으로 저희를 먹이시는 손을 알아보게 하시고

저희의 결심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저희 삶과 광양사랑의교회에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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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것을 한 치도 어김없이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하룻밤의 구원과 이십 년의 성취를 같은 손으로 이루시니

오래 기다려 온 기도의 제목들을 주님의 시간표에 맡깁니다.

위기의 날에 니스록 앞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고

다윗의 뿌리로 오셔서 죽음의 깊이까지 내려가시고

부활의 열매를 맺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저희의 오늘과 내일을 잇대어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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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 이사야 30:1-17 내려가는 길과 돌이키는 길 평화의길벗 2026.08.19 47
1240 이사야 29:15-24 숨긴 계획과 토기장이의 손 평화의길벗 2026.08.18 39
1239 이사야 29:01-14 꿈같은 구원과 봉한 책 평화의길벗 2026.08.17 27
1238 이사야 28:14-29 거짓의 피난처와 시험한 돌 평화의길벗 2026.08.16 75
1237 이사야 28:01-13 시드는 화관과 거절된 쉼터 평화의길벗 2026.08.15 29
1236 이사야 27:02-13 밤낮으로 간수하시는 포도원지기 평화의길벗 2026.08.14 45
1235 이사야 26:01-27:01 구원을 성벽 삼은 성읍과 티끌에 누운 자의 노래 평화의길벗 2026.08.13 53
1234 이사야 25:01-12 가난한 자의 요새와 만민의 식탁 평화의길벗 2026.08.12 46
1233 이사야 24:14-23 땅 끝에서 들려온 노래와 시온에 세워진 왕좌 평화의길벗 2026.08.11 39
1232 이사야 24:01-13 온 땅을 흔드시는 심판과 가지 끝에 남기신 은혜 평화의길벗 2026.08.10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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