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3:01-24 소멸하는 불 곁에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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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하는 자를 향한 마지막 화 선언으로 문이 열립니다.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않던 세력에게 그 차례가 반드시 돌아올 것을 선포한 뒤, 예언자는 곧바로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1-6절). 외교는 무너지고 대로는 황폐하며 레바논과 사론과 갈멜까지 시들어 버린 절망의 한복판에서(7-9절), 하나님은 내가 이제 일어나겠다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10절). 그 불 앞에서 시온의 죄인들은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느냐고 떨지만, 공의롭게 행하는 자에게는 그 불이 도리어 요새가 됩니다(14-16절). 마침내 백성은 아름다운 왕을 보고, 예루살렘은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않는 장막이 되며, 그 거주민은 다시는 병들었노라 말하지 않습니다(17-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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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8장부터 33장까지는 "화 있을진저"라는 외침이 여섯 번 울리며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룹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호이'라는 감탄사가 28장 첫머리뿐 아니라 29장과 30장과 31장과 33장 첫머리에도 반복되면서 28-33장을 한 덩어리로 보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앞의 다섯 번과 여섯 번째는 방향이 다릅니다. 앞의 것들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애굽을 의지하던 유다를 겨냥했다면, 33장 1절의 "학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그들을 짓밟던 앗수르입니다. 데이비드 젝맨은 이 마지막 신탁이 앗수르인들을 향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윗 계열의 왕이 이끄는 하나님의 백성이 적어도 그들의 교훈을 배웠고 여호와의 자비에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병거를 믿다가 모든 길이 막힌 백성이 마침내 손을 들고 여호와께로 돌아선 자리, 거기서부터 33장이 시작됩니다.
# 역사의 자리는 주전 701년, 산헤립의 사절들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 서 있던 그 절박한 시각입니다. 히스기야는 은과 금을 긁어모아 조공으로 바쳤지만 앗수르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성 밖에는 대군이 진을 쳤고 성 안에는 물과 양식이 줄어들었습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동맹은 소용없었으며 왕은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다 소진된 자리, 그것이 이 장의 배경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33장을 1-6절, 7-16절, 17-24절의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읽으면서, 이 장의 중심을 "당신 백성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세력을 진멸하고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실 여호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규정합니다. 그에 따르면 1-6절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믿음에 관한 증언"입니다.
# 여기에 이 장의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민족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다 멸망을 거듭하는 일이 억압당하는 이스라엘에게 결코 기쁜 소식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 폭력이 물러가면 이스라엘은 또 다른 폭력에 떨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가 무너지면 바벨론이 오고, 바벨론이 무너지면 페르시아가 옵니다. 강대국의 교체는 약자에게 해방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이 바뀌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때만 민족들의 폭력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 문학적으로 이 장은 탄식과 신탁이 번갈아 울리는 예배의 구조를 지닙니다. 1절의 화 선언, 2절의 공동체 탄원, 3-6절의 확신, 7-9절의 비탄, 10-13절의 신적 응답, 14절의 두려운 질문과 15-16절의 대답, 17-24절의 환상. 성전 뜰에서 실제로 드려졌을 법한 예배의 순서가 그대로 본문이 되었습니다. 특히 14-16절은 시편 15편이나 24편 3-6절과 같은 형식을 지닙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는 성전 입장 예식의 물음을 빌려, 33장은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놀랍게도 제사의 규모가 아니라 삶의 윤리로 주어집니다. 젝맨은 33장의 설교 제목을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로 붙이고, 14절을 이 장 전체가 제기하고 탐구하는 중심 문제로 보라고 권합니다. 오늘 우리도 그 조언을 따라 읽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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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소서
하나님은 폭력에게도 기한을 정해 두시고, 은혜를 구하는 백성에게 아침마다 새 팔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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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를 당하지 않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당하지 않고도 속이는 자에게 화가 선포됩니다.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일 것입니다. 그 선언 바로 뒤에 기도가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집니다. 황충의 떼같이 사람이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같이 그 위로 뛰어오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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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그치면"이라는 작은 낱말에 이 단락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낱말이 "이들이 승리를 즐길 수 있는 기간이 제한적임을 시사해 준다"고 풀이합니다. 파괴자에게도 허락된 기한이 있고, 그 기한이 지나면 파괴자 자신이 파괴와 배반에 넘겨집니다. 그러므로 배반과 파괴를 일삼는 불의한 세력의 승리 앞에서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고, 그분께서 그것을 실행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 선언의 주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분은 앗수르에게 복수하는 유다가 아니라 여호와이십니다. 억울한 자가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 할 때 그는 자신이 미워하던 그 얼굴을 닮아 갑니다. 본문은 그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 내어,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되돌려 놓습니다.
2절은 이 장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사 33:2). 환난에 처한 공동체를 대표하여 예언자가 하나님의 간섭을 간구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전반절의 기도가 간구인 동시에 고백이라고 지적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만 자신들의 구원이 가능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팔'은 힘의 상징입니다. 이미 30장 30절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팔로 앗수르를 내리치시는 모습이 나온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아침마다"입니다. 고난이 매일 새롭기 때문에 도움도 매일 새로워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한 번의 극적인 구출을 구하지 않고 날마다의 동행을 구합니다. 예레미야애가가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라고 노래한 것과 같은 결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하루치씩만 내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축한 은혜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매일 아침 당신께 손을 내밀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3-4절에서 예언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본 사람처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셨다는 소식만으로 민족들이 흩어집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것을 두고, 그분께서 당신 백성의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소식만으로도 이들이 싸움을 포기하고 황망히 도망한다고 설명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수가 아니라 누가 일어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4절의 황충과 메뚜기 비유는 이해가 쉽지 않지만 전체 의미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께 대적하던 세력이 철저히 멸망하고, 그들이 남긴 것은 남김없이 거두어집니다. 본문은 그 약탈품을 누가 갖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은 오직 하나, 그분이 일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5-6절은 이 단락의 결론이자 찬양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사 33:5). 여기서 '높은 곳'은 세상과 무관하게 초연한 자리가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여호와께서 높은 곳에서 민족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세상을 통치하시고, 공의와 정의를 무시하다가 심판에 떨어진 예루살렘을 그분께서 공의와 정의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위협은 그분께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의 보호자이시지 예루살렘이 그분을 지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6절이 그 모든 것을 한 낱말로 묶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거짓 지혜와 지식이 사라지고, 여호와를 아는 참된 지혜가 풍성해집니다. 애굽도 앗수르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 백성이, 마침내 두려워해야 할 단 한 분을 되찾은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뀌는 것, 그것이 회복의 첫 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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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큰 위기 앞에서 단번의 해결을 구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는 "아침마다"입니다. 하루치의 힘을 하루치의 기도로 구하는 사람이 결국 오래 걷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새벽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일은 종교적 성실의 과시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감당할 팔을 오늘 아침에 받으려는 정직한 가난입니다. 지난주에 받은 은혜로 이번 주를 버티려 할 때 신앙은 회고담이 됩니다.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벌레가 생겼습니다.
또 하나, 우리를 억울하게 하는 세력이 영원할 것처럼 보일 때 1절의 "그치면"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도 기한을 정해 두셨습니다. 우리의 몫은 그 기한을 앞당기려고 같은 방식으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시는 분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때로는 가정에서 우리는 학대하는 자를 만납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은밀한 갈망입니다. 본문은 그 갈망을 기도로 바꾸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베푸소서,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소서.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복수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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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6절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방책이 모두 무너진 자리에서 홀로 일어나셔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불이 도리어 요새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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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합니다.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여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립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이르십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라.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입니다.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을 것입니다.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겠느냐고 합니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할 것이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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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의 그림은 참혹합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 할 용사들이 거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절망적으로 부르짖습니다. 평화의 사신들은 좋은 소식 대신 나쁜 소식을 들고 돌아와 비통하게 웁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사신들을 평화 협상을 위해 보냄받았다가 결렬을 보고하며 슬피 우는 사절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바치고도 앗수르를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왕하 18:14-17). 8절은 그 결과입니다. 대로가 황폐해져 다니는 사람이 끊겼고, 조약이 파기되었으며, 사람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젝맨의 표현대로 외교는 실패했고 온 땅이 앗수르의 철권 아래서 타 버린 땅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은 전쟁의 그림인데 9절은 전쟁이 아니라 가뭄의 그림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장면이 왜 나란히 놓였을까요. 김필회 교수는 그 답을 언약 신학의 틀에서 찾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다는 신명기의 논리입니다. 사람들에 의한 계약의 파기가 땅에 저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레바논은 고대 근동 최고의 목재를 내던 산림지대였고, 갈멜은 이름 자체가 과수원을 뜻하는 기름진 산지였으며, 사론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 펼쳐진 곡창이었고, 바산은 초지의 비옥함으로 유명한 평야였습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푸르던 네 이름이 한꺼번에 시들었다는 것은, 땅이 사람의 배신에 함께 앓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8절 끝의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짧은 구절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그분의 피조물인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차라리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그 바닥에서 10절이 터집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사 33:10). '이제'가 세 번, 일어남과 관련된 동사가 세 번 겹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반복이 새로운 신적 사건의 시작과 그 확실성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젝맨도 같은 지점을 짚습니다. 인간적인 해결책이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판을 바꾸십니다. 오랫동안 침묵하시며 얼굴을 감추셨던 분이 이제 행동을 시작하십니다. 11-12절의 심판 묘사도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리치신다고 하지 않고, 대적들이 겨를 잉태하고 짚을 낳으며 자기 호흡이 불이 되어 자신을 삼킨다고 말합니다. 악은 스스로를 태울 연료를 이미 제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로 달려가는 자들, 그것이 교만한 제국의 초상입니다.
14절의 질문은 이 장의 심장입니다. 앗수르의 불을 피했더니 이제 하나님의 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사 33:14). 김필회 교수는 '영원한 불꽃'이 제물을 태워 바치는 번제단의 화덕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제단의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처럼, 죄인에게는 그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여기 쓰인 '거하다'라는 동사는 객으로 정착한다는 뜻입니다. 객은 완전한 시민은 아니지만 그 사회에서 법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곧 이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이 불 곁에 누가 살 자격을 얻겠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고 말한 그 하나님이십니다. 젝맨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을 짚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각성이 물리적 공포에 그치지 않고 영적 성질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앗수르의 침략에서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을 보는 것은 충분히 공포스럽지만, 진짜 물음은 그 거룩하신 분과 함께 살 수 있는가입니다.
15절의 대답은 놀랍도록 세속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공의롭게 행하는 것, 정직히 말하는 것,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것, 뇌물을 받지 않는 것,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않는 것, 악을 보지 않는 것. 여섯 항목이 모두 윤리적 내용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설명대로 '토색한 재물'은 권력을 남용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부당하게 얻은 재산이고, '피 흘리는 일'은 살인뿐 아니라 무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모든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며, '악한 일을 보지 않음'은 불의한 음모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성전 출입증은 제물의 크기가 아니라 장부와 법정과 골목에서 결정됩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목록은 자격을 스스로 갖추라는 요구이기 이전에, 불 곁에 살게 된 자가 그 불에 의해 빚어지는 삶의 모양입니다. 젝맨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자신들이 이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 모두가 그와 마찬가지라고 말한 뒤, 그 필요에 대한 의식과 함께 곧바로 17절에서 약속의 말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자격 없음을 아는 자리가 은혜의 문턱입니다. 그리고 16절의 "높은 곳"은 이미 5절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말해진 자리입니다. 의인이 안전한 것은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높은 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같은 불이 누구에게는 소멸이고 누구에게는 요새입니다. 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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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교회가 두려워해야 할 불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조롱이나 제도의 압박보다 무서운 것은, 우리가 예배하는 그 거룩하신 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따뜻한 위로로만 상상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임재를 불이라고도 부릅니다. 예배가 뜨거워질수록 삶이 정직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5절의 목록을 주일의 언어가 아니라 월요일의 언어로 읽으십시오. 계약서에 정직한가, 회계에 투명한가, 약자를 희생양 삼는 자리에 동석하지 않는가, 남의 험담이 오가는 자리에서 눈을 감을 줄 아는가. 광양사랑의교회가 지역에서 신뢰를 얻는 길은 더 큰 행사가 아니라 이 여섯 항목의 반복입니다. 교회의 재정이 투명하고, 교회의 말이 정직하고, 교회가 약한 이를 대신 변호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가 섬기는 분이 살아 계심을 짐작합니다.
그리고 이 목록 앞에서 스스로 미달임을 발견하거든 절망하지 말고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 14절의 떨림 없이 17절의 아름다움에 이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불 곁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그 불 속으로 먼저 걸어 들어가신 한 분 때문입니다. 골고다에서 소멸하는 불을 온몸으로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자리를 비워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15절의 목록은 구원의 조건표가 아니라, 이미 그 성에 들어온 자들이 살아 내는 시민의 일과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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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4절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
하나님은 몸소 우리의 재판장과 율법을 세우신 이와 왕이 되셔서, 다시는 말뚝을 뽑지 않아도 되는 처소를 당신 백성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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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볼 것입니다.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려니와,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으며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으며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됩니다.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니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합니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으나,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입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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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의 왕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윗 계열의 인물이나 메시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김필회 교수는 10절과 14절과 22절의 문맥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당신 모습을 감추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이 왜 그토록 놀라운지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전 시대에는 모세나 예언자와 같은 특별한 인물들만 그분을 직접 볼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15절의 의로운 자라면 누구나 그분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성문 앞에 적군이 진을 친 성 안에서, 사람들은 적군 대신 왕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18-19절은 구원 시대의 축복을 이전 시대의 두려움에 대조하여 그립니다. 계산하던 자와 공세를 계량하던 자는 조공을 거둬 가던 앗수르의 관리들이고, 망대를 계수하던 자는 유다의 재무장을 통제하기 위해 방어시설의 수를 세던 자들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며 거만하게 거리를 활보하던 이방인 정복자들이 예루살렘 주민에게 안겨 주던 좌절과 굴욕감을,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 28장 11절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입니다. 본문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는 것입니다. 지나온 밤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아침의 의미를 압니다.
20절의 장막 비유는 유목민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새 목초지를 찾아 끊임없이 말뚝을 뽑고 줄을 감아야 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그 반복 속에 배어 있는 정서를 이렇게 짚습니다. 이들은 내일을 걱정하며 불안에 사로잡혀 말뚝을 뽑고 줄을 정리하며 장막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미래의 불안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이나 성벽이 아니라 굳이 '장막'이라 부른 것이 인상적입니다. 견고함은 재료에서 오지 않고 함께 계시는 분에게서 옵니다. 21절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장막이 거두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이 없는 예루살렘에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다는 초현실적인 그림은, 시편 46편 4절이나 에스겔 47장이 그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강물과 같은 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강물처럼 성 주변을 흐르기에 적의 배는 접근조차 하지 못합니다.
22절은 이 장의 신학적 정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불리고, 재판장과 율법을 세우신 이와 왕이라는 세 직임이 한 분께 모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마지막 고백이 2절의 간구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던 기도가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는 확언으로 닫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구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기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재판장들이나 지파 지도자들이나 왕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3절의 돛대 줄이 풀린 배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은 제대로 싸울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전리품은 나누어집니다. 심지어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합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전리품을 나눈다는 이 이상한 문장은, 이 승리가 예루살렘 주민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임을 못 박습니다. 은혜의 정의가 여기 있습니다. 싸우지 않은 자에게 승리의 몫이 돌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 24절이 가장 놀랍습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24). 병들었노라 하지 않는 성의 근거로 제시된 것은 의료도 번영도 아니고 사죄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죄 사함이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예루살렘은 죄로부터 해방된 공간이기에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될 수 없다고 정리합니다. 신약은 이 순서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은 먼저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그다음에 일어나 걸으라 하셨습니다(막 2:5-11). 앗수르에게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깊은 해방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에서 놓인 백성이 사는 성, 그것이 이사야가 본 마지막 그림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 성의 완성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 21:3). 이사야가 본 옮겨지지 않는 장막이 거기서 영원히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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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말뚝을 뽑으며 삽니다. 전셋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 관계를 옮기고, 때로는 교회를 옮깁니다. 옮김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안이 삶의 기본값이 되어 버린 것은 슬픈 일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사할 곳을 알려 주는 대신, 이사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재판장이시요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말뚝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사람의 호의나 통장의 잔고나 건강 검진 결과에 박혀 있다면 언제든 다시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이신 그분께 박혀 있다면 이제 짐을 풀어도 됩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도 결국 이것입니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뚝을 뽑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서로의 죄를 들추는 대신 서로의 사죄를 확인해 주는 공동체가 그 장막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실패를 털어놓았을 때 그 말이 다음 주에 다른 입을 통해 돌아오는 교회라면, 사람들은 그곳에 말뚝을 박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죄가 선포되고 그 선포가 지켜지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은 거기서 비로소 짐을 풉니다.
마지막으로 24절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가운데 병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몸이 아니면 마음이, 마음이 아니면 관계가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본 성에서는 아무도 병들었노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성의 아침을 오늘 여기서 미리 살아 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사죄를 믿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그 사죄가, 언젠가 우리 몸의 모든 앓음까지 거두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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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는 주님,
학대하는 자가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날에도
그에게도 기한을 정해 두신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단번의 해결을 구하기보다
오늘 하루치의 힘을 오늘 아침에 구하는
정직한 가난을 우리에게 주소서.
비축한 은혜로 살지 않고
날마다 손을 내미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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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하는 불로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밖의 위협보다 안의 부패를 더 두려워하게 하소서.
공의롭게 행하고 정직히 말하게 하시고,
부당한 이익과 뇌물과 침묵의 공모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그 목록 앞에서 우리의 미달을 발견할 때
도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먼저 그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주님의 은혜를 붙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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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재판장이시요 율법을 세우신 이시요 왕이신 주님,
날마다 말뚝을 뽑으며 살아온 우리에게
다시는 옮기지 않아도 될 처소가 되어 주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서로의 죄를 들추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사죄를 확인해 주는 장막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운데 누구도 내가 병들었노라 말하지 않는
그 성의 아침을 오늘 여기서 미리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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