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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8:14-29 거짓의 피난처와 시험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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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큰소리치는 지도자들은 사망과 언약하고 스올과 맹약하였으니 넘치는 재앙이 밀려와도 자기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리라 장담하며 거짓을 피난처로 삼습니다(14-15절).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에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기춧돌을 두시고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정의를 측량줄로 공의를 저울추로 삼아 거짓의 은신처를 쓸어버리십니다(16-19절). 그들이 마련한 대비책은 몸 하나 덮지 못하는 짧은 침상과 좁은 이불이어서, 일찍이 다윗을 도우셨던 그 하나님이 이번에는 낯선 손님처럼 기이한 일을 행하십니다(20-22절). 그런데 신탁은 뜻밖에도 농부의 비유로 닫힙니다. 곡식마다 다른 도구로 알맞게 떠는 농부처럼, 하나님의 경영은 기묘하고 지혜는 광대합니다(23-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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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예언자는 술에 취한 제사장과 선지자를 고발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자리에서 시선을 옆으로 옮깁니다. 김필회 교수는 7절에서 13절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교만을 고발한 데 반해, 14절부터는 청자가 2인칭 복수로 바뀌면서 새로운 단락이 열린다고 정리합니다. 이제 예언자 앞에 선 이들은 성전 뜰의 사람들이 아니라 왕궁의 사람들, 곧 유다의 안전을 자신하는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술에 취해 하나님의 경고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 지도자들은 허황된 자만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취한 방식만 달랐을 뿐 취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 이 말씀이 선포된 시점을 김필회 교수는 주전 705년에서 701년 사이로 봅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2세가 죽고 산헤립이 즉위하면서 제국 전역에 반란의 기운이 돌던 때입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가 씌워 놓은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의 동맹을 서둘러 강화해 나갔습니다. 다윗 왕조의 처음 신학적 토대인 사무엘하 7장의 약속에서 유다의 생존 가능성을 찾는 예언자와, 강대국의 군사력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세속적 정치가들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말씀입니다.

# 김필회 교수는 14절에서 18절까지가 동심원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봅니다. 바깥에 사망과 스올과 맺은 계약이 놓이고, 그 안쪽에 거짓과 속임수의 피신처가 놓이고, 그 안에 다시 공의의 줄과 정의의 추가 놓이며, 가장 깊은 중심에 "믿는 이는 물러나지 않는다"는 여호와의 권면이 자리합니다. 겹겹이 쌓아 올린 인간의 방어벽을 하나씩 벗겨 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조 자체가 오늘 본문의 신학입니다.

#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은 이 단락이 농부의 비유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심판 신탁이 갑자기 농사 이야기로 넘어가는 이 전환을 두고 일찍부터 여러 해석이 제시되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그 해석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보충적이라고 하면서, 특히 농부가 도식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고 형편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듯 하나님께서도 때와 상황을 고려하여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점, 그리고 심판이 이스라엘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고 미래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김근주 교수도 심판이 심판으로만 끝나지 않고 거름과 기초가 되어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때로 이어진다고 읽습니다. 심판의 문장들 끝에 농부의 손이 놓여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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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절 사망과 맺은 언약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세운 안전 장치의 정체를 정확히 이름 붙여 부르시고, 그 자기기만에 정면으로 말을 거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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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은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앞 단락의 고발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표시입니다.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4절). 부름을 받은 자들은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사람들, 곧 국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들입니다.

이어 예언자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15절). 언약, 맹약, 피난처, 숨김. 안전을 뜻하는 말이 네 겹으로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네 겹의 안전 위에 사망과 스올과 거짓과 허위라는 말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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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안셰 라촌은 김필회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말만 앞세워 큰소리치는 자들, 허풍 떠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실력이 아니라 말로 나라를 지키려 한 사람들입니다. 회의 탁자에서 결의를 다지고 언론 앞에서 자신감을 과시하지만, 그 말을 떠받치는 실체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습니다.

'사망과의 언약, 스올과의 맹약'을 두고 김필회 교수는 지하 세계의 신들을 숭배하는 강령술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애굽과 체결한 정치적 동맹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애굽이 앗수르의 위협을 막아 주리라 믿었던 예루살렘의 지배 계급에게 예언자는 풍자적인 이름을 붙여 줍니다. 너희가 맺은 것은 생명의 협정이 아니라 죽음의 협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무서운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사망과 언약을 맺었으니 사망에게로 가야 하고, 스올과 맹약을 맺었으니 스올로 내려가야 합니다. 계약은 반드시 이행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15절의 마지막 두 마디입니다. 거짓을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 숨었다는 말은 예언자의 평가이지 그들의 자백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이 평가를 그들의 입에 그대로 물려 놓습니다. 자기기만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거짓 위에 서 있는 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거짓의 가장 견고한 부분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대목을 오늘 우리에게 곧장 겨눕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사망과 스올과의 언약을 믿으면서 그것에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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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사망과 맺는 언약이 있습니다. 나라의 안전을 무기의 숫자로만 계산하는 사고, 노후의 안전을 오직 자산의 규모로만 환산하는 사고, 교회의 안전을 교인 수와 건물의 크기로 확인하려는 사고가 그것입니다. 이런 계산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통계와 수치가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합리성의 밑바닥을 봅니다. 그 계산이 하나님을 계산에서 빼놓고 시작되었다면,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사망과 맺은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된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무너지는 공동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피난처를 짓습니다. 문제는 그 피난처가 대개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 지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남의 아이의 자리를 없애고, 내 노후를 위해 청년의 미래를 저당 잡는 방식의 안전은 성경이 말하는 피난처가 아닙니다.

이번 주에 각자의 안전 계획표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내가 정말 무엇을 믿고 오늘을 살고 있는지, 통장인지 인맥인지 건강 검진 결과인지 아니면 하나님이신지 정직하게 이름을 불러 보는 것입니다.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순간 거짓의 피난처는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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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9절 시온에 두신 기춧돌

하나님은 사람이 세운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 이미 시험을 거친 돌 하나를 놓아두시고, 그 돌을 믿는 이를 서두르지 않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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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선언하시는 대신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춧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16절).

그리고 곧바로 측량 도구가 등장합니다.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17절). 이어 15절의 문장이 그대로 되풀이되며 뒤집힙니다.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18절). 마지막으로 심판의 반복성이 강조됩니다.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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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은 이사야서에서 가장 번역이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개역개정이 과거 시제로 옮겼지만 현재나 미래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과거로 읽으면 성전의 모퉁잇돌이나 다윗 왕조를, 미래로 읽으면 메시아적 말씀이나 남은 자들, 믿음의 공동체를 가리킬 수 있다고 정리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기초는 사람이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놓으신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애굽과 협정을 맺느라 분주할 때, 하나님은 이미 시온 아래에 돌 하나를 묻어 두고 계셨습니다.

'시험한 돌'이라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 재료가 아니라 이미 하중을 견뎌 본 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돌 위에서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김필회 교수는 '믿는 이는 물러나지 않는다'로 옮깁니다. 서두르지 않는 것과 물러나지 않는 것은 사실 같은 일입니다. 발밑이 단단한 사람은 허둥대지 않고, 허둥대지 않는 사람은 자리를 지킵니다.

17절의 측량줄과 저울추는 건축 도구입니다. 기초를 놓으신 그분이 이제 같은 손으로 사람이 지어 놓은 구조물을 검사하십니다. 김근주 교수는 16절의 기춧돌과 17절의 측량줄이 모두 건축 용어라는 점, 그리고 15절의 '피난처', '거짓', '숨김', '넘침'이 17절에 그대로 되풀이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유다를 재고 평가하시는 기준이 곧 정의와 공의라고 읽습니다. 종교심이나 종교적 행동이 그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김필회 교수 역시 16절과 17절 상반절을 함께 읽으면 믿음과 정의가 두 개의 다른 실체가 아니라 믿음이 공의와 정의를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정의를 낳고, 정의는 믿음에 뿌리를 둡니다.

신약은 이 돌 앞에서 오래 머뭅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9:33)라고 인용하고, 베드로는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벧전 2:6)라고 씁니다. 사람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고백(시 118:22; 막 12:10)이 그 위에 겹쳐집니다. 예루살렘의 정치가들이 계산에서 빼놓았던 그 돌이, 결국 새로운 성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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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새 전략, 새 프로그램, 새 지도자를 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이미 놓인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거친 돌은 언제나 유행보다 앞서 놓여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새 방법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이유는, 그 모든 방법이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기초 대신에 시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특별한 위로입니다. 우리 시대의 신앙은 자주 조급합니다. 응답이 빨라야 하고 결실이 눈에 보여야 하고 성장 곡선이 우상향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밑이 단단한 사람만이 천천히 갈 수 있습니다. 조급함은 대개 믿음의 뜨거움이 아니라 기초의 불안에서 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 기준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결정들이 정의와 공의라는 측량줄과 저울추를 통과하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재정의 집행, 사람을 세우는 일, 갈등을 다루는 방식이 그 줄과 추 앞에 정직하게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이 정의롭지 않은 결정을 덮는 이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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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절 짧은 침상과 기이한 일

하나님은 당신을 계산에서 빼놓은 백성에게 낯선 손님처럼 다가오시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겸비할 길 하나를 열어 두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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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일상의 한 장면으로 그들의 대비책을 요약합니다.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20절).

이어 역사가 소환됩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의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21절).

그리고 마지막에 권면이 놓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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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은 지혜문학의 어법을 빌린 속담 같은 문장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것이 재앙이 닥칠 때 안전하게 피할 길이 전혀 없음을 일상 경험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봅니다. 침상이 짧으면 다리를 오그려야 하고 이불이 좁으면 어깨가 드러납니다. 눕기는 눕되 쉴 수는 없는 자리, 덮기는 덮되 추운 자리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맺어 놓은 조약이 꼭 그러합니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밤새 몸을 뒤척이게 만드는 대책일 뿐입니다.

21절은 더 아픕니다. 브라심 산은 다윗이 블레셋을 무찌른 곳이고(삼하 5:17-25), 기브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한 곳입니다(수 10:6-15). 이스라엘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구원의 기억들입니다. 예언자는 그 기억을 그대로 가져와 방향만 돌려놓습니다. 그때 우리를 위해 일어나셨던 그 하나님이 이번에는 우리를 향해 일어나신다는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시지만 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만 일하시는 분은 아니시며, 당신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방인이 되신다고 설명합니다. '비상하다'와 '기이하다'로 옮겨진 두 히브리어는 각각 '낯선', '이방의'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낯설어지는 것, 이것이 심판의 가장 깊은 얼굴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예언자의 어조가 다시 바뀝니다. 심판을 선언한 그 입으로 회개를 요청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이미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 재앙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겸손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죽음의 결박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그치는 것, 그것이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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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침상 위에서 자 본 사람은 압니다. 문제는 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몸을 다 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그런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대출로 마련한 집,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일자리, 언제 끊길지 모르는 관계 위에서 우리는 다리를 오그린 채 밤을 지납니다. 예언자는 그 불편함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읽으라고 권합니다. 이 자리가 원래 쉴 자리가 아니라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낯설어지는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내 편이라 여겼던 하나님이 어느 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실 때, 우리는 대개 하나님이 떠나셨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르게 말합니다. 그 낯섦이야말로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는 자리가, 신앙이 자라는 자리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22절의 권면은 이렇게 옮겨집니다. 확신에 찬 말을 조금 줄이고 듣는 시간을 조금 늘리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와 다른 자리에 있는 이들의 말, 우리 결정으로 손해를 본 이들의 말을 듣는 일입니다. 결박이 단단해지기 전에 손목의 힘을 빼는 것이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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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9절 농부의 손과 기묘한 경영

성부 하나님은 곡식마다 다른 도구로 다르게 떠시는 농부처럼, 우리를 부수지 않으실 만큼만 두드리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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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조가 바뀝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23절). 그리고 두 개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24절). 밭갈이는 목적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씨 뿌리는 장면이 세밀합니다.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25절). 그리고 그 지혜의 출처가 밝혀집니다.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26절).

추수 장면도 같은 결입니다.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27절),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28절). 그리고 단락 전체가 한 문장으로 닫힙니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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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24절의 '쉬지 않고'와 28절의 '늘'이 모두 '무작정' 또는 '무턱대고 계속'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농사의 핵심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때를 아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씨를 뿌리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입니다. 씨를 뿌릴 때도 곡식에 따라 방법이 다릅니다. 향신료가 되는 검정풀과 회향은 흩뿌리고, 밀과 보리는 정해진 자리에 줄지어 심고, 알곡이 잘 떨어지지 않는 귀리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밭 가장자리에 심습니다. 같은 손이 곡식마다 다르게 움직입니다.

26절이 이 비유의 심장입니다. 그 모든 방법을 하나님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적당한 방법'으로 번역된 말은 미슈파트, 곧 앞 단락에서 '정의'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올바른 질서, 관습, 규정을 뜻합니다. 밭에도 질서가 있고 역사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농부가 그 질서를 배워 농사를 짓듯이, 하나님도 당신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역사를 다루십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지점에서 농부가 말씀의 씨를 뿌리는 예언자 이사야를 상징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타작의 비유는 더 절묘합니다. 도리깨와 수레바퀴는 밀과 보리에는 알맞지만 여린 회향에는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단한 곡식조차 너무 오래 밟으면 알갱이가 바스러져 못 쓰게 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서 결정적인 결론을 끌어냅니다. 농부가 타작할 때 곡식에 따라 적합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도 무작정 심판하지 않으시고 형편에 상응하는 방법과 정도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밀알을 털지만 바서지지 않게 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만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십니다. 타작은 파괴가 아니라 껍질을 벗기는 일입니다. 알곡을 거두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29절의 '기묘하며 광대하니라'는 찬양이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기묘하다'의 명사형이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리키며, '경영'이 영원 전부터 확정된 고정된 계획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그분의 의지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계획표를 기계적으로 집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밭의 형편을 살피며 손을 조절하시는 농부이십니다. 김근주 교수도 심판의 끝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때가 있으며 심판과 구원이 모두 하나님의 경륜 안에 들어 있다고 읽습니다. 예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알곡의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것도(마 13장),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 것도(요 12:24) 이 오래된 농부의 지혜 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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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난을 지나고 계신 분들에게 이 단락은 가장 정확한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수려고 두드리시지 않습니다. 껍질을 벗기려고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그 힘을 조절하십니다. 견딜 수 없는 무게가 아니라 벗겨질 만큼의 무게입니다. 지금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질 때, 우리는 그 무게를 재고 계신 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새겨야 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마다 다르게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회향에게는 작대기로, 밀에게는 수레바퀴로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 여정을 내 자를 들이대어 재서는 안 됩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가느냐, 왜 나만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는 물음은 농부의 손을 모르는 물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재촉하는 말이 줄어들 때 공동체는 훨씬 건강해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이 늦여름에 농부의 시간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조급하게 결실을 요구하지 않고, 밭을 고르는 시간과 씨를 뿌리는 시간과 기다리는 시간을 각각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도, 상처 입은 한 사람이 회복되는 일도, 지역 사회에서 교회가 신뢰를 얻는 일도 모두 갈고 뿌리고 기다리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 모든 시간표를 세우신 분의 경영이 기묘하고 지혜가 광대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 몫의 한 뼘을 조용히 갈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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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 하나님,

우리가 스스로 지어 놓은 피난처의 이름을 오늘 정직하게 불러 봅니다.

안전이라 이름 붙였으나 실은 사망과 맺은 언약이었고

지혜라 이름 붙였으나 실은 거짓 아래 몸을 숨긴 일이었습니다.

말만 앞세워 큰소리치던 입술을 다물게 하시고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오늘을 살아왔는지 보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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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에 시험한 돌을 두신 주님,

우리가 계산에서 빼놓았던 그 돌이

실은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정의를 측량줄로 삼으시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시는 주님 앞에

우리 공동체의 결정과 우리 가정의 살림과 우리 손의 일들을 내어 드리오니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한다는 그 말씀 위에

우리의 두 발을 굳게 세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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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침상과 좁은 이불 위에서 밤을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리를 다 펴 보지 못한 채 아침을 맞는 이웃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낯선 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는

그 낯섦조차 주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신 흔적임을 알게 하시고

결박이 단단해지기 전에 우리를 겸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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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고르시고 씨를 뿌리시고 때를 따라 떠시는 농부이신 주님,

우리를 부수지 않으실 만큼만 두드리시는 손을 신뢰합니다.

회향에게는 작대기로 밀에게는 수레바퀴로 오시는 그 지혜 앞에서

서로를 재촉하지 않고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게 하여 주옵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조급함을 내려놓고

갈고 뿌리고 기다리는 농부의 시간표를 배우게 하시며

주님의 경영이 기묘하고 지혜가 광대하심을 삶으로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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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 이사야 28:01-13 시드는 화관과 거절된 쉼터 평화의길벗 2026.08.15 18
1236 이사야 27:02-13 밤낮으로 간수하시는 포도원지기 평화의길벗 2026.08.14 31
1235 이사야 26:01-27:01 구원을 성벽 삼은 성읍과 티끌에 누운 자의 노래 평화의길벗 2026.08.13 32
1234 이사야 25:01-12 가난한 자의 요새와 만민의 식탁 평화의길벗 2026.08.12 33
1233 이사야 24:14-23 땅 끝에서 들려온 노래와 시온에 세워진 왕좌 평화의길벗 2026.08.11 28
1232 이사야 24:01-13 온 땅을 흔드시는 심판과 가지 끝에 남기신 은혜 평화의길벗 2026.08.10 31
1231 이사야 23:01-18 돌아온 배가 잃어버린 항구, 칠십 년 뒤에 거룩해진 이익 평화의길벗 2026.08.09 47
1230 이사야 22:01-25 지붕 위의 환호와 홀로 통곡하는 예언자,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않는 자구책과 삭아 부러지는 못 평화의길벗 2026.08.08 33
1229 이사야 21:01-17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평화의길벗 2026.08.07 42
1228 이사야 19:16-20:06 떨던 애굽에 제단을 세우시고 벗은 발로 헛된 의지를 벗기시는 하나님 평화의길벗 2026.08.06 33
1227 이사야 18:01-19:15 조용히 감찰하시는 처소와 마르는 나일강, 그리고 시온으로 모이는 열방 평화의길벗 2026.08.05 36
1226 이사야 17:01-14 구원의 반석을 잊은 자들의 헛된 요새와 슬픔의 수확 열방의 소동을 한 번의 꾸짖음으로 흩으시고 남은 자를 지으신 이께로 돌이키시는 여호와 평화의길벗 2026.08.04 40
1225 이사야 16:01-14 쫓겨난 자를 숨기는 대낮의 그늘로 부르시는 하나님과 헛된 자랑 끝에 무너지는 모압의 통곡 평화의길벗 2026.08.03 44
1224 이사야 14:24-15:09 온 세계를 향해 정한 경영과 대적을 향해 우는 눈물 평화의길벗 2026.08.02 29
1223 이사야 14:01-23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긍휼로 다시 택하시는 하나님과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지는 교만의 종착점 평화의길벗 2026.08.01 61
1222 이사야 13:01-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검열하시는 군대와 제국의 화려한 궁전 위에 임하는 여호와의 날 평화의길벗 2026.07.31 29
1221 이사야 12:01-06 진노를 거두시고 구원의 우물이 되신 하나님과 만국 중에 울려 퍼지는 감사 찬송 평화의길벗 2026.07.30 16
1220 이사야 11:01-16 베어진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한 싹과 만민을 모으시는 여호와의 대로 평화의길벗 2026.07.29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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