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1-13 베임을 당한 자리에서
온전한 신앙이란 거룩하신 분 앞에 무너져 내린 바로 그 자리에서, 남기신 거룩한 씨의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생명 사건입니다.
한낮의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매미 소리가 정오의 두꺼운 공기를 뚫고 쟁쟁하게 쏟아져 내리는 칠월 하순입니다. 장마가 물러간 자리에 습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흐르고 마음마저 눅진하게 늘어지는 계절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쓸모를 증명하려 이 악물고 버티다가, 문득 거울 앞에서 낯선 자기 얼굴과 마주친 듯 삶이 온통 허물어진 것 같아 남몰래 한숨짓는 분들이 있습니다. 애써 쌓아 올린 것들이 웃시야의 왕좌처럼 하루아침에 비어버릴까 두려워 잠 못 이루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베임을 당한 그루터기의 잘린 살 틈에서 기어이 새 움을 밀어 올리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한여름 산길을 걷다 보면, 누군가 톱으로 밑동을 잘라내 이제는 죽었으려니 여겼던 나무 그루터기에서,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여리고 청신한 새순이 조용히 돋아나 있는 광경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그 베어짐을 죽음의 마침표로 읽었지만, 땅속 깊이 숨은 뿌리는 여전히 살아 상처 입은 밑동으로부터 다시 생명의 물길을 길어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숨죽여 바라보는 이사야 6장의 마지막 풍경이 바로 그러합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을 뵌 것은 하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마흔 해 넘게 유다를 다스리며 번영과 안정을 안겨주었던 왕이 세상을 떠나고, 저 멀리 물러났던 앗수르 제국이 다시 이빨을 드러내며 서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하던, 온 세계가 숲처럼 바람에 흔들리던 그 불안한 문턱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는 봅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인간의 왕좌 하나가 비는 순간, 결코 비지 않는 하늘의 보좌가 드러납니다. 국제정세가 요동쳐도 지상의 어떤 흔들림에도 영향받지 않는, 크고 견고한 그 보좌. 유다의 진짜 왕은 처음부터 웃시야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였습니다.
그 보좌 곁에서 스랍들이 서로 화답하여 외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지근거리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이 천상의 존재조차, 그분의 거룩하심에 생명을 잃지 않으려 여섯 날개 중 넷으로 제 얼굴과 발을 가리고 오직 둘로만 날고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가로놓인 건널 수 없는 심연 앞에서, 이사야의 입에서는 찬양이 아니라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라는 말을 굳이 덧붙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백성 전체의 부정과 떼어놓지 않습니다. 부정은 전이되는 것이어서, 부정한 공동체에 속한 그 역시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기 인식은 늘 이렇습니다. 거룩하신 분 앞에 정직하게 선 사람은 결코 "나만은 저들과 다르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시대의 어둠 한복판에 자신을 포함시키며 "나도 그들 중 하나"라고 고백합니다. 김기석 목사는 참된 회개란 "남을 향해 겨누던 손가락을 거두어 제 가슴을 두드리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기를 예외로 두지 않는 이 정직함이야말로, 은혜가 스며들 수 있는 유일한 틈입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의 자리에, 은혜가 불꽃처럼 날아옵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집은 핀 숯을 부젓가락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선포합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이사야는 스스로를 씻지 못했습니다. 그의 정결은 그의 결단이나 수행이 아니라, 오직 제단으로부터 온 불—장차 골고다 언덕에서 온몸으로 타오르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득히 예표하는 그 불—에서 왔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자가 그 불의 만짐 한 번으로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습니다. 놀랍게도 이사야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이 일은, 죄로 심판받게 될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정결함을 입고서야 비로소 이사야는 주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열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뜻밖에도 서늘합니다. 아무리 전해도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묻는 예언자에게, 주님은 성읍이 황폐하고 사람이 멀리 옮겨져 땅이 텅 비기까지라고 답하십니다. 부조리하리만치 무거운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밑바닥에, 하나님은 한 문장을 남겨두셨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우리의 상처 많은 신앙 여정은, 한겨울 눈보라에 가지가 다 꺾이고 밑동까지 톱질당한 채 산비탈에 홀로 남겨진 그루터기와 같습니다. 세상의 영리한 셈법은 그 잘린 나무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이제 끝났다. 쓸모를 잃었으니 뽑혀 불쏘시개로 던져질 일만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베임을 당한 자리를 부끄러워하며, 실패와 상실의 흔적을 어떻게든 감추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위대한 정원사이신 하나님은 그 잘린 밑동을 결코 쓰레기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사람의 눈에 죽은 듯 보이는 바로 그 그루터기 속에, 아무도 모르게 거룩한 씨 하나를 심어두십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침묵의 계절이 흐르고, 마침내 잘린 살 틈을 비집고 여린 연둣빛 새순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베임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가장 낮고 거룩한 자리였다는 것을.
지열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그루터기마다 은밀히 새 생명이 여무는 이 칠월, 무너진 자리를 부끄러워하며 서둘러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거룩하신 분 앞에 정직하게 엎드려 "나는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자"라 고백하고, 제단의 불이 우리 입술에 닿기를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삶이 베임을 당한 그루터기처럼 초라하게 남은 그 순간에도, 주께서 그 밑동 깊이 심어두신 거룩한 씨를 기억하며, 조용히 그러나 신실하게 새 움을 밀어 올리는 소망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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