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1-20 심해의 암반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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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망각의 탁류를 거슬러 은혜를 호명하며, 깨지기 쉬운 실존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품에 온전히 비끄러매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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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텁지근한 장마의 습기가 밤새 열기를 가두어 둔 탓에, 아침에 눈을 뜨는 일조차 묵직한 가위눌림처럼 다가오는 이 아침입니다. 끈적거리는 바람과 대기 속에 가득 찬 먹구름이 우리의 호흡을 가쁘게 만들듯, 거칠고 무정한 세상 속에서 내 힘으로 삶의 영토를 지켜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남몰래 숨죽여 흐느끼고 계신 분들, 그리고 끝없는 삶의 결핍과 깊어지는 영적 회의 때문에 신앙의 문턱에서 멍하니 발끝만 바라보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한갓 가녀린 숨결에 불과한 우리의 작음조차 넉넉한 은총의 품으로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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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자가 되라고, 더 높이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지배자가 되라고 유혹합니다. 힘을 가져야만 안전할 수 있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만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세속의 문법은 우리 영혼을 끊임없이 달달 볶아 피로하게 만듭니다. 시편 9편 1절에서 20절에 이르는 이 풍경은, 힘의 논리로 무장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던 오만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여주며, 그 서슬 퍼런 역사의 한복판에서 연약한 자들이 부를 수 있는 눈물겨운 찬가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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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편은 탄식과 감사가 정교하게 짜인 아크로스틱 시, 곧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이어지는 답관체 시입니다. 시인은 먼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기이한 행적들을 찬송하며 문을 열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태평성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방에는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을 사냥감 삼아 으르렁거리는 교만한 열방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군사력이 영원할 것이라 믿으며 역사를 제 뜻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의로운 재판정 앞에서 그들의 허망한 결말을 봅니다. "주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꾸짖으시고 악인들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버리셨습니다.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황폐하였으니 주님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높이 쌓아 올린 웅장한 성채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숨결 한 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한낱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알베르 카뮈가 로마의 거대한 유적지를 바라보며 타자의 아픔을 밟고 지어 올린 문명이 결국 자기 파멸의 무덤이 될 뿐임을 통찰했던 것처럼, 오만으로 쌓아 올린 모든 바벨탑은 저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벼락같은 기도를 던집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한갓 인생뿐임을 알게 하소서." 여기서 인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노쉬(Enosh)는 깨어지기 쉽고 병들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뜻합니다. 인생의 참된 지혜는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든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먼지 같은 존재임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삼감과 겸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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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시편이 심판의 선고만을 들려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높은 보좌에 앉아 인간의 고통을 유희하듯 관조하시는 차가운 관념이 아닙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여기 등장하는 요새, 히브리어 미스가브(Misgab)는 적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하고 높은 바위 절벽을 뜻합니다. 세상의 매정한 효율성과 경쟁의 질서에서 밀려나 갈 곳 없이 헤매는 이들에게 주님은 기꺼이 몸을 숨겨주시는 다사로운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아니라,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의 가녀린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기계적 중립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한 구조 속에서 눈물 흘리는 소외된 자들을 향해 가슴을 열어두시는 공감적 정의이며, 편애에 가까운 환대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의 핏소리를 땅속에서 들으시고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분, 그들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역사의 저울 위에 올려놓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세상이 쓸모없다 버린 돌일지라도, 주님은 그 상처 입은 존재들을 당신의 거룩한 성전의 모퉁잇돌로 삼으시는 놀라운 반전을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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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척박한 현실 속에서 악인들의 횡포에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요새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내 욕망을 채워줄 얄팍한 위로의 문구를 수집하는 감상적 유희가 아닙니다. 묵상은 망각의 탁류에 저항하는 거룩한 기억의 성사입니다. 악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며, 그 결과 이웃을 수단으로 여기며 짓밟는 무감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분주함과 자아의 소란함에 눈이 멀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원망과 절망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참된 묵상이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라고 고백했던 시인처럼, 과거 우리 삶에 세심하게 간섭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자취를 가만히 호명해 내는 작업입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무명의 백태를 벗겨내고, 매일 새벽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깨지기 쉬운 인생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는 영혼의 정직함입니다. 이 기억의 묵상 속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주는 불안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당당하게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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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늘도 세상의 냉혹한 잣대 속에서 나를 증명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내 형편 때문에 하나님마저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깊은 회의를 경험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 인생의 모든 짐을 홀로 지고 버텨내려던 그 팽팽하게 날 선 긴장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자기가 한갓 숨결일 뿐임을 잊은 채 오만을 떨던 자들의 교만을 꺾으시지만, 스스로의 작음과 연약함을 안고 울부짖는 우리의 그 남루한 신음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척박한 땅 위에서 먼지처럼 흩어질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낮고 비천한 땅의 변두리로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온몸을 찢으시는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존엄함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강한 힘을 입증해 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틈만 나면 흔들리고 무너지는 우리의 깨지기 쉬운 실존조차 너는 내 피로 값 주고 산 귀한 내 자녀란다라고 호명해 주시며, 기어코 환난 날에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다사로운 은총에 우리의 삶은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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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드넓은 바다 밑바닥에 조용히 서 있는 심해의 침묵하는 암반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바다 표면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내며 모든 것을 삼킬 듯 요동치는 사나운 파도와 거품만이 위대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주인공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거센 태풍이 불고 파도가 아무리 높게 출렁거려도, 바다 표면의 소란함은 깊은 바다 밑바닥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반석을 단 한 뼘도 흔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내 잘남을 증명하려던 거품 같은 요란한 소음을 멈추고 말씀의 깊은 심연 속으로 내 영혼의 닻을 고요히 내릴 때, 비로소 한갓 인생일 뿐인 세상의 소란함은 소리 없이 잦아들고,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거대한 평화의 암반 위에 우뚝 서서 세상을 가장 아늑하고 찬연하게 떠받치는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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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한창 팽팽해지는 이 찬연한 여름날, 스스로 주인이 되어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세상의 요란한 수직적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내 소중한 아침의 시간을 바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해 내는 대화의 묵상 자리에 엎드리며, 나를 품어주신 그 십자가 피난처의 넉넉한 힘에 기대어 곁에 있는 지치고 슬픈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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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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