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1-6 얼음장 밑의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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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침묵의 벼랑 끝에서 기억을 회복하여 '그러나'로 다시 서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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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무거운 습기와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뙤약볕이 교차하며, 숨을 쉬는 일조차 묵직한 노동처럼 다가오는 계절의 한복판입니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려 사위가 어두워질 때면, 마치 온 세상이 침묵 속으로 빠져든 것 같아 알 수 없는 영혼의 비애감이 우리를 사로잡곤 합니다. 남모르는 삶의 벼랑 끝에 서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며 하나님의 일식(日蝕) 체험 속을 외롭게 바장이고 계실 분들의 마음에, 마침내 아침의 여명을 어김없이 열어내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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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늘 분명한 답을 내놓으라고 우리를 다그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향해 신뢰를 보내는 삶을 가리켜 어리석은 짓이라 냉소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온 영혼의 숨을 죽이며 마주하는 시편 13편 1절부터 6절의 풍경은, 사방이 꽉 막힌 캄캄한 고립의 한복판에서 시인이 어떻게 탄식의 언어를 주님 앞에 고스란히 쏟아놓는지를, 그리고 그 벼랑 끝에서 어떻게 '그러나'라는 위대한 은총의 반전을 노래하는지를 장엄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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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편은 시작하자마자 가슴을 옥죄는 단말마적인 탄식으로 문을 엽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시인은 짧은 두 구절 안에서 "언제까지니이까"라는 하소연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부르짖습니다. 이 반복은 기계적인 투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잊으심과 외면, 그리고 마음의 아픔이 한계상황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어 온 영혼의 아뜩한 비명입니다. 이 캄캄한 밤의 경험 속에서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섭섭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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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며 예기치 않은 질병이나 배신, 혹은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실의 고통을 겪을 때, 우리 역시 시인과 같은 탄식에 직면합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불의의 사고로 외아들을 갑작스레 잃은 후, 그 참담한 슬픔 앞에서 하나님의 처사를 납득할 수 없어 고통스럽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 내 아들입니까? 제발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설명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비극 앞에 설 때, 인간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도는 이토록 아픈 거절과 침묵에 대한 한탄뿐입니다. 기도는 세련되고 점잖은 종교적 위선이 아닙니다. 내면의 섭섭함과 억울함, 그리고 어지러운 신음을 하나님 앞에 날것 그대로 정직하게 쏟아내는 용기야말로 참된 탄식 기도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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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인의 기도는 이 끝없는 탄식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편 13편의 가장 경이로운 전환점은 5절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접속사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이 구절이 우리의 목을 메게 만듭니다. 시인을 둘러싼 척박한 현실은 단 한 가지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여전히 의기양양해하며 시인의 파멸을 기다리고 있고, 육신의 고통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이 암담함 한복판에서 시인은 돌연 마음의 흐름을 바꾸어 하나님의 다사로운 품을 의지하기로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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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도약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사나운 현실의 폭풍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억의 회복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쥐엄나무 열매를 먹는 비참한 벼랑 끝에서 비로소 살아난 순간은 아버지 집의 넉넉함을 다시 기억해 냈을 때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앞에 잠잠히 머물며 내 사사로운 독백을 멈출 때, 내 안의 분주함과 염려가 가라앉으며 영혼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나를 세심하게 돌보셨던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옛 흔적들이 은은하게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이 거룩한 기억의 회복을 경험할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오며, 탄식하던 입술은 기어이 부활의 눈부신 아침을 향한 구원의 찬송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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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 선생의 제자인 김흥호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인 믿음을 가리켜 순우리말인 "밑힘"이라 명명했습니다. 굳이 한자어로 표현하자면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저력(底力)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내가 이 땅에서 얼마나 건강을 유지하고 흠결 없이 신앙의 업적을 바쳐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툭하면 의심하고 넘어지며,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것 같다며 투정 부리는 우리의 가녀린 실존조차, 십자가의 붉은 피라는 가장 단단한 사랑의 띠로 묶어 기어코 당신의 품으로 안전하게 받아내시는 하나님의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잇대어 사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에 내 영혼의 닻을 깊이 내린 사람은, 비록 세상의 터가 무너지고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갈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오, 내가 받을 몫의 전부"라고 당당하게 고백하는 삶의 밑힘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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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얼어붙음 속에서도 기어코 대지 밑바닥에서 소리 없이 흐르기 시작하는 얼음장 밑의 눈석임물의 은밀한 운동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논리는 우리의 영혼이 고통과 의심의 두꺼운 얼음판 아래 갇혀 꽁꽁 얼어붙어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제 너의 생명력은 끝났으니 모든 소망을 포기하라고 절망을 속삭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차가운 겨울 감옥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의식과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 무겁고 단단한 얼음장 맨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는 이미 겨울의 잔재를 녹여내며 흐르기 시작하는 다사롭고 따뜻한 눈석임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생명의 길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얼음을 깨뜨리려던 헛된 소란을 멈추고 대지 아래 흐르는 주님의 숨결에 온 존재를 잠잠히 내어 맡길 때, 비로소 그 아프고 얼어붙었던 일상은 세상을 덮은 모든 겨울의 절망을 기어이 녹여내며 가장 푸르고 찬연한 생명의 노래를 울려 퍼뜨리는 은혜의 온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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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인생의 모든 무게를 나 혼자 짊어지려던 그 팽팽하게 날 선 긴장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스스로 강해지려다 텅 비어버린 우리의 그 비루하고 남루한 밑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약하여 아무 공로도 주장할 수 없는 바로 그 벼랑 끝에서, 찬란한 '그러나'의 부력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사 기어코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다정한 구원자이십니다. 나를 향해 흐르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흔적들을 조용히 응시하고 기억해내는 묵상의 자리에 엎드리며, 나를 조건 없이 안아주신 그 은혜의 힘에 기대어 곁에 있는 약한 이들의 시린 마음을 다정하게 괴어주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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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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