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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26 폭력의 시대를 건너는 ‘약함’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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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기를 거부한 폭력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보복의 고리를 끊으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거친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평화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 기울이시는 벗님들, 평안하신지요.

에덴의 동쪽, 낙원을 상실한 인간이 마주한 첫 번째 현실은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형제가 형제를 쳐 죽이는 핏빛 비극이었습니다. 송민원 교수님의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창세기 4장을 통해 우리에게 매우 서늘하고도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인간은 서로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오늘 우리는 이 무거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해 곡식과 피의 차이, 혹은 정성의 유무를 따지며 논쟁해왔습니다. 그러나 송민원 교수님은 본문의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 아주 중요한 지점을 포착합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창 4:5), 즉 사람과 제물을 하나로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거절당하자 가인의 ‘안색(얼굴)’이 변했습니다. 여기서 ‘얼굴’은 존재의 거울입니다. 타인을 향한 환대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사라진 일그러진 얼굴, 그것이 이미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창 4:7).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듯 죄가 웅크리고 있지만,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실패합니다. 그는 아우 아벨을 ‘들’로 데려갑니다. 성경에서 ‘들(sadeh)’은 문명의 보호와 시선이 차단된 곳, 적나라한 폭력이 행사되는 공간을 상징합니다. 그곳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이 벌어집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물음에 가인은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 4:9).

이것이야말로 죄의 본질입니다. ‘너’와 ‘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 서로에 대한 책임(Response-ability)을 부정하는 것,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민낯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지키는 자’로 부름받았으나, 가인은 그 소명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살인자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처분은 즉각적인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시어 만나는 누구에게서든지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창 4:15). 우리는 흔히 이것을 ‘주홍글씨’ 같은 낙인으로 오해하지만, 송민원 교수님은 이를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합니다.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갚는 것이 인간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조차도 보호하심으로써, 이 땅이 피 흘리는 복수의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것은 정의의 포기가 아니라, 폭력을 멈추게 하려는 하나님의 고뇌 찬 개입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자신의 상처를 핑계 삼아 소년을 죽이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창 4:24)라고 노래합니다. 폭력의 확대 재생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오만한 찬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전쟁과 혐오의 논리가 바로 이 ‘라멕의 노래’와 맞닿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절망으로 끝을 맺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아들 ‘셋’이 태어나고, 그가 아들을 낳아 ‘에노스’라 불렀습니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을 때, 비로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라멕처럼 힘과 보복을 자랑하며 성을 쌓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에노스’들을 통해 이어집니다. 우리가 서로의 ‘지키는 자’가 되어줄 때, 나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안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비로소 폭력의 사슬은 끊어지고 평화의 씨앗이 싹틀 것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를 이기려 하기보다, 누군가의 ‘지키는 자’가 되어주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선한 수고 위에, 에노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창세기 4:1-26 질투의 잿더미 위에 새겨진 은총의 인장

신앙의 본질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고립된 질문을 넘어, 우리 삶의 혼돈 속에 먼저 찾아와 보호의 표를 주시는 하나님의 가없는 은총(Original Blessing) 안에서 타자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껴안는 '관계의 회복'에 있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시간의 파고를 넘으며 저마다의 보폭으로 오늘이라는 기적의 영토에 당도한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은 때때로 길을 잃고 헤매는 ‘놋(Nod, 방황)’의 땅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창세기 4장은 인류 최초의 형제인 가인과 아벨의 갈등을 통해,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어둠과 그 어둠을 뚫고 비치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보여 줍니다.

송민원 교수는 이 본문을 '수직적 명령'의 위반이 아닌 '수평적 관계'의 파괴라는 시선으로 읽어 낼 것을 제안합니다.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것은 제물의 질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타자를 향하지 못하고 자기 속으로만 구부러진 결과였습니다. 가인이 던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질문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질문에 정답을 주시기보다, 동생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표(Mark)’를 주심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단한 의로움을 가져서가 아니라, 연약한 우리를 당신의 가족이자 왕실의 일원으로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원복(Original Blessing)’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기주 작가는 사랑을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라는 실패한 인생을 위해 당신의 영원한 시간을 건네주셨고, 비참한 최후가 아닌 생명의 보존을 선택하셨습니다. 한동일 선생이 말했듯,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은 것들을 원만하게 해결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거운 종교적 강박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관계의 오아시스’로 기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부력(浮力)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온몸으로 씹어 소화하는 치열한 과정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마음이라는 기준음에 우리 영혼을 조율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자를 지옥이 아닌 나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안개처럼 밀려와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깨진 그릇 같은 우리 삶의 틈새로 당신의 빛을 스며들게 하시는 분입니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한 형상임을 잊지 않을 때, 우리 삶은 세상을 정화하는 생명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신 손길이 여러분의 앞날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작은 조각배를 비추는 ‘먼 빛의 등대’와 같습니다. 비록 파도는 여전히 거세고 앞은 보이지 않지만, 그 빛을 바라보며 영혼의 기준음을 조율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감옥을 넘어 생명의 항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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