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역대하 36:01-23 역사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은총의 파편

연약한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멈추지 않으시며 결국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는 변치 않는 사랑의 주인이시다.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숨 가쁘게 내달리는 ‘점-시간’으로 가득합니다. 지속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삶은 자꾸만 허청거리고, 성찰의 시간을 갖기란 언감생심입니다. 하지만 문득 역대하 36장, 남유다 왕국의 비극적인 종말을 담은 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들면, 우리는 시간의 무심함 너머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깊은 한숨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네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왕위를 이어받는 모습을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이들은 강대국(애굽이나 바벨론)의 힘을 의지하려 했고, 눈앞의 이익과 권력에 대한 동경(同傾)이 그들의 정신을 지배했습니다. 역사란 본디 권력과 욕망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가다가 결국 공허의 수레바퀴에 갇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서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마음이 아려오는 대목은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백성들이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악행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들을 이끌어 보내셨으되"(대하 36:15). 이는 곧 우리가 연약함과 죄의 거미줄에 갇혀 부자유한 상태에 있을 때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을 거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어 돌이키기를 청하셨다는 증언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여호야김 왕이 기록된 말씀을 서기관의 칼로 베어 화롯불에 던져버렸던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간곡한 초대를 조롱하며 멸시했습니다(대하 36:16).

결국 역사의 격변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대하 36:17-21). 이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던 이들에게 닥친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화려한 성전 건물이나 잘 짜인 제도가 아니라, 예수 정신(이웃 사랑)이 부재할 때 교회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유다의 멸망은 경건의 형식을 붙잡고 본질을 놓쳤을 때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멸망의 심연 속에서 이 역대하 기자는 놀라운 희망의 파편을 건져 올립니다. 이야기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대하 36:2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라는 역설에 직면합니다. 유다의 백성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올 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방의 왕 고레스(Cyrus)라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여셨습니다(대하 36:23). 이는 구원이 연약한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고 베푸신 은혜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음을 웅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시기에, 비록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할지라도, 그분의 약속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기어코 성취됩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흔들리고, 때로 이 세상의 불의와 모순 속에서 회의에 빠질지라도, 이 역대하의 마지막 장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잘 했는지'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때때로 비극적 색채를 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측은지심으로 끊임없이 구원의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 '현실의 나'를 사랑하고, 눈을 들어 세상에 가득 찬 신비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길은 스스로를 비우고 그분의 은총에 몸을 맡기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 길은 좁고 모험적일지라도, 주님은 지금도 가장 낮고 아픈 곳(전쟁의 상처, 소외된 이웃)에서 우리의 손과 발이 되어주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폐허에서 부르는 소리

역사의 장엄한 막이 내린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도, 하나님은 가장 낯선 이의 입을 통해 '다시 시작하라'는 구원의 새 아침을 여신다.

*

역사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갑니다. 역대하 36장의 기록은 숨이 찹니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것은 영광의 계보가 아니라 몰락의 연대기일 뿐입니다. 거대한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마침내 전부 꺼져버리듯, 유다의 마지막은 그렇게 속절없이 어둠 속으로 잠겨듭니다. 성전은 불타고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쇠사슬에 묶여 이방의 땅으로 끌려갑니다. 신(神)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조롱거리가 되었고, 약속의 땅은 안식이라는 이름의 황폐함을 강요당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습니까? 하나님의 무심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운명의 장난이었을까요? 역대기 사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비극의 핵심은 ‘심판’이 아니라 ‘긍휼의 거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그의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15절) 부지런히 그의 사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먼저, 그리고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16절)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차단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비극은, 신앙의 이름으로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쌓아 올린 견고한 신념, 익숙한 종교적 관습, ‘우리는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이 오히려 하나님의 숨결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보다 하찮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시인 릴케(Rilke)는 "오 주여, 저마다 자기 자신의 죽음을 주소서"라고 노래했지만, 유다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강요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신(神)의 자리에 올려놓은 인간이 맞이하는 필연적 귀결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성경이 21절에서 끝났더라면, 그것은 절망의 기록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가장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카메라는 예루살렘의 잿더미가 아니라, 이방 제국 페르시아의 궁정을 비춥니다. 바사 왕 고레스. 그는 유다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낯선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며"(22절)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나에게 명령하사...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23절)

우리의 삶이 때로 시드기야의 마지막 날처럼 처절한 실패와 연약함으로 가득 차 보일지라도, 소망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아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당신의 긍휼로 일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텅 빈 성전처럼 무력하게 느껴질 때, 바로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가장 이질적이고 낯선 고레스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올라갈지어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폐허 속에서도 새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포'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역사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은총의 파편 new 평화의길벗 2025.10.31 0
60 역대하 35:20-27 므깃도의 바람 소리 평화의길벗 2025.10.30 0
59 역대하 35:01-19 질서 속에 깃든 환희 평화의길벗 2025.10.28 1
58 역대하 34:14-33 잊혀진 책, 깨어나는 영혼 평화의길벗 2025.10.27 0
57 역대하 34:1-13 폐허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평화의길벗 2025.10.27 3
56 역대하 33:1-25 가장 낮은 곳, 은혜가 머무는 자리 평화의길벗 2025.10.26 1
55 역대하 32:1-23 포위된 성, 열린 하늘 평화의길벗 2025.10.24 2
54 역대하 31:1-21 은혜가 쌓인 자리 평화의길벗 2025.10.22 3
53 역대하 30:13-27 부족함 위에 임하는 기쁨 평화의길벗 2025.10.22 2
52 역대하 30:1-12 온 백성의 찬양과 기쁨 평화의길벗 2025.10.21 2
51 역대하 29:20-36 온 백성의 찬양과 기쁨 평화의길벗 2025.10.19 2
50 역대하 29:01-19 성결의 길 평화의길벗 2025.10.18 2
49 역대하 26:16-27 길 잃은 시대의 자화상 평화의길벗 2025.10.17 2
48 역대하 25:1-13 말씀을 따르는 용기 평화의길벗 2025.10.14 2
47 역대하 23:16-24:16 기억되는 삶의 향기 평화의길벗 2025.10.11 3
46 역대하 23:01-15 틈을 만드는 사람들 평화의길벗 2025.10.11 4
45 20161224 - 미움받을 용기 웃는사람 2017.01.07 905
44 20151213 - 뒷모습엔 살아온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file 웃는사람 2016.12.16 924
43 20160625 - 전원 오프(OFF) 웃는사람 2016.06.26 916
42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 - 181호 웃는사람 2015.11.22 99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 4 Next
/ 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