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3:1-25 가장 낮은 곳, 은혜가 머무는 자리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의 나락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은혜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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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는 빛과 더불어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이 그림자를 직면하지 않고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애써 그 그림자를 외면하거나, 그럴듯한 가면 뒤에 숨기곤 합니다. 역사의 풍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목격했듯, 악은 종종 너무나 평범한 얼굴로 우리 곁에 머뭅니다. 유다 왕 므낫세의 이야기는 한 개인을 넘어, 우리 문명과 우리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역대하 33장은 참담한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이룩했던 모든 선한 유산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그는 무너졌던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머물리라 약속하신 성전 안에 이방 신의 제단을 쌓고, 자기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끔찍한 인신 제사까지 바쳤습니다. 그는 주술과 마법에 빠져 신접한 자들을 가까이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진노를 사게 하였다"(대하 33:6)고 차갑게 기록합니다.
그의 삶은 거룩함을 향한 열망이 완전히 소진된 자리, 텅 빈 욕망의 폐허를 보여줍니다. 이는 단지 고대의 우상숭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알, 즉 더 많은 소유와 더 높은 지위, 쾌락이라는 우상에게 우리의 자녀, 우리의 시간을 제물로 바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 되어야 할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돈과 권력의 제단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그의 삶에 파국이 닥칩니다. 아시리아의 군대가 그를 사로잡아, 그의 코에 갈고리를 꿰고 쇠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갑니다. 왕의 존엄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는 한낱 짐승처럼, 가장 굴욕적인 모습으로 적국의 땅에 던져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 완전한 절망의 한복판입니다.
바로 그곳, 바빌론의 구덩이에서 역설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대하 33:12)라고 증언합니다. '크게 겸비하여'라는 말은 스스로를 먼지처럼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그 잿더미 위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을 보았고,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므낫세의 기도가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배신과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 쇠사슬에 묶인 자의 신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대하 33:13).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자격 없는 자에게,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린 자에게 가장 눈부시게 임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길목에서 신앙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이웃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 때문에 스스로를 므낫세와 같다고 여기며 절망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혹은 '신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고통을 방치하시는가?'라고 묻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므낫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선하게 살라"고 다그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추악한 실패보다 크고, 우리의 가장 깊은 절망보다 깊습니다. 므낫세가 코에 갈고리가 꿰인 채 바빌론의 먼지 속에서 드린 기도, 그 처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사랑이, 오늘 우리의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역대하 33:1-25 가장 깊은 타락의 심연에서 피어난 회심, 끝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애끓는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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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무덤을 넘어선 은총: 가장 악한 왕의 귀환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고통스러운 모순 앞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懷疑)의 물음을 붙들고 있는 모든 순례의 도반(道伴)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역대하 33장 1-25절의 이야기는 유다 역사상 가장 어둡고 참담한 시대를 상징하는 므낫세 왕의 기록입니다. 므낫세는 신실했던 히스기야 왕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철저히 부정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33:2) 유다 백성을 이방 사람보다 더 악한 지경에 빠지게 했습니다(33:9). 그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위해 산당을 재건하고, 성전 뜰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쌓았으며, 심지어 자기 아들들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33:6) 끔찍한 죄악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 인간 실존의 비극, 욕망의 페르소나
므낫세의 행적은 인간이 탐욕과 자기 과신(휴브리스)에 사로잡힐 때 얼마나 깊은 타락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치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이 영혼이 납작해지고 경외심을 잃어버리듯, 므낫세는 다산과 풍요를 즉물적으로 약속하는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이는 결국 자기 존재를 넘어서려는 교만함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백성들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우상)과 바꾸고, 자기 이익을 위해 약자(여기서는 자녀들까지 포함하여)를 희생시키는 폭력적인 질서를 만듭니다.
우리의 삶 역시 이 ‘흥미로운 시대’ 속에서 돈과 성공이라는 세속적 우상 앞에서 우리의 참된 소명을 망각하고, 때로는 우리의 욕망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자화상은 때로 “화장한 문둥이 얼굴을 들고 미소 짓는 자본주의의 밤” 앞에서 무기력해진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 창자가 들끓는 하나님의 애틋한 은총(플랑크조마이_σπλαγχνίζομαι '불쌍히 여기다,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파하다, 애끓는 마음'과 같은 깊은 연민과 동정심)
하나님께서는 므낫세의 악행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고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를 보내 므낫세를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33:11). 므낫세는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극한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절대적인 절망의 순간,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므낫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며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크게 겸손하여’ 기도했을 때(33:12),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받으시고(33:13) 그를 다시 예루살렘 왕위에 앉히셨습니다(33:13).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적인 은총이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므낫세는 인간의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고 “길들지 않은 짐승 같았습니다”라고 참회하며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창자가 들끓는 사랑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악의 길로 멀어졌을 때도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고 외치며 종일 팔을 벌리고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아버지의 극심한 죄는 답습하면서도 아버지의 결정적인 '겸손'과 '돌이킴'(33:23)은 배우지 못하고 비참하게 몰락한 모습(33:24-25)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거나 종교적 행위를 많이 했더라도, 자기 힘에 대한 과신이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태도를 잃을 때 그 삶이 얼마나 허망해지는지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겪을지라도, 그 모든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라(metanoia)는 하늘의 초대장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행위를 강조하기보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여 기어코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이 애끓는 사랑과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시는 창조적인 능력에 힘입어, 오늘도 절망의 그루터기에서 희망의 움을 틔우는 순례의 길을 걷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평화의길벗_라종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