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5:01-16 엘리바스의 전지적 시점(全知的視點, omniscient perspective)이 간과(看過)한 것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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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전지적 시점으로 착각하며 말한 확증편향적인 훈계가 다시 시작됩니다. 욥이 그동안 했던 언행을 힐난하며 오히려 그런 주장들이 욥의 유죄를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연로한 이들의 말을 무시하지 말라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 항변한 욥을 나무라며 사람이 어찌 의로울 수 있겠느냐며 정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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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엘리바스는 고난의 원인이 모두 죄가 아니라는 것과, 복을 누리는 자들이 모두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看過)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헛된 지식, 동풍,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표현하며 힐난합니다. 그리고 욥의 말은 결국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만두게 하는 말이라고 공박합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부복하여 기도하지도 않는 사람, 죄의 부추김을 받아 간사한 말만 쏟아내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욥의 말 자체가 그의 죄를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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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은 삶을 힘겹게 하는 바람으로 헛된 것으로 자아가 부풀어 올랐다는 뜻입니다. 이와 더불어 엘리바스가 욥을 향하여 하는 말들은 모두 욥이 죄인이기에 이와 같은 심각한 환난이 온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나온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 경외를 멈췄다고도 하고, 함부로 욥을 정죄하면서 실없는 사람, 진실하지도 미덥지도 않는 사람으로 정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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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가진 지식이나 신앙행위에 대한 평가는 프레임을 선점하는 이가 우위적 권위를 지니게 됩니다. 가령 지혜로운 말에 대해 다 헛되다라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도 먼저 말해 버리면 아무리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라도 반박을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립니다. 또 신앙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와 정성이 부족하다느니, 열심이 부족하다느니 하면서 타인의 신앙행위에 대해서 먼저 이의를 제기하는 쪽이 프레임을 선점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얘기를 듣는 사람은 무얼 해도 자신의 부족함을 꺼림칙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난의 원인이 모두 죄가 아니라는 것과, 복을 누리는 자들이 모두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엘리바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욥을 비판하면서 프레임을 선점하고, 욥이 하는 모든 이야기들에 대해 사사건건 폄하하고 매도하면서 결정적으로 그가 하는 모든 변론과 신앙행위가 오히려 스스로를 정죄하고 하나님 경외를 멈춘다고 하니 욥으로서는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이면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부분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신념이 강한 이들은 이렇듯 타인을 향한 비판에 있어서 쉬이 폄하와 매도와 정죄하게 됩니다. 엘리바스처럼 자신이 정죄하고 폄하하면 할 수록 결국 자신의 판단하는 그 판단이 결국 자기 자신을 비판하게 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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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0절 엘리바스는 축척된 삶의 지혜인 전통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가진 지혜가 미약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가장 오래된 사람과 산을 들먹이며 그 앞에 욥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고,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지혜를 욥만 가진게 아니라 합니다. 욥의 지식과 지혜는 자신들도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욥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지혜를 가진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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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이 구구절절 맞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만들 때 자신은 없었고, 하나님의 오묘하심(‘소드’는 1-2장의 천상 회의를 뜻한다; 렘23:18)과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있어서도 당연히 부족함을 알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한 하소연과 탄식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잃기 이전 욥의 삶이 세밀한 부분에서까지 하나님을 신앙하며 호리라도 부정과 범죄에 연루되지 않길 바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도 자신이 알고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 자신이 잘 모르는 죄나 문제가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연로한 어르신들을 무시하지도 부모를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욥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이 알지 못하기에, 다른 누구도 지금의 욥의 처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죄의 결과인지 알지도 못하고, 지혜가 부족하니 깨닫지도 못했으며, 여러가지 조언들을 친구들의 해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나아지게 할 수도 없으며,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납득할 수 없었기에 마치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욥이 무시한다고 매도했을 경우 욥으로서는 이렇게 억울하게 매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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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의 말은 그른 것 없이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 자신도 욥보다 다 나은 지식과 지혜와 경험을 갖고 있더라도 자신도 전통적 지혜앞에 겸손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욥을 향하여서도 그가 아무리 어리고 부족하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낫다고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듯 욥을 매도하는 모습은 스스로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통의 탁월한 통찰력과 오묘한 지혜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그 어떤 사람 사상 사유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속에서 취할 자세는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 존중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맘이라면 괜찮겠지만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곳에서부터 공동체 전체를 와해하는 교만의 싹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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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절 엘리바스는 욥이 정결하지 않고 의롭지 않으며, 부정하다 하면서 자신도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看過)합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한 말씀을 욥이 불만과 교만으로 듣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심지여 하나님을 향해 분노의 말을 낸다고 나무랍니다. 사람은 정결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천사)을 믿지 않고 하늘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데, 악행을 일삼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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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바스는 욥의 상황을 위로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가지고 설명하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욥의 처지를 개선하거나 욥이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었는데 이를 향하여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신도 여인에게서 태어나 깨끗할 수 없고, 천사처럼 걸구할 수 없으며, 하늘보다 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화를 내면서 욥을 향해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결정적으로 엘리바스는 16절에서 유체이탈 화법으로 욥을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엘리바스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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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앎과 지혜는 많이 알아가면서 쌓여 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고, 그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을정도라는 것을 깨달으면 겸손해 지게 됩니다. 그러니 지혜가 쌓이고, 신앙의 연륜이 쌓여 갈 수록 인간의 한계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어떠한지 깨닫게 되어서 겸손히 주만 바라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3-7)
사랑은 무례히 행하거나 성내지 않습니다. 엘리바스가 정말로 욥의 친구이고 그의 처지를 공감하며, 욥에게 위로를 주고 격려하기를 원했다면, 그는 지금 그 무엇보다 욥을 방문한 처음의 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더불어 논쟁이 시작되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믿음은 겸손히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주장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공감과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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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지혜의 주되신 하나님 아버지
인과율로 세상을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우리의 아픔을 다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판단과 지식과 지혜가 하늘에 닿을 수 없으며,
앎과 모름 사이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우리의 앎이 주를 경외하는데 더 나아가며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오랜 지혜들을 존중하되
그 한계를 아는 능력도 허락해 주옵소서.
타인을 정죄하는 일에 분노하기보다
사랑하는 일에 더 열심이게 하옵소서.
사랑하되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위로하되 전지적 시점을 가진자처럼 설명하려 하지 말고
다면 공감과 동행만으로도
주의 위로를 전할 수 있음 알고
주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기억과 믿음으로 함께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