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가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사기 14:1-20 뒤따라오시는 발걸음

*

온전한 신앙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열심의 높이로 재어지지 않고, 내가 내려가 버린 자리까지 뒤따라오신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는 귀에서 자랍니다.

.

백 년쯤 전 영국의 한 시인은 자기 생애를 쫓기는 사람의 이야기로 적었습니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그분에게서 달아났고 세월의 아치 아래로 달아났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은 서두르는 법 없이 조용하고 끈질기게 따라왔다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톰프슨의 시 천국의 사냥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편에 매인 몸으로 런던 거리에서 신문을 팔며 지내던 사람의 고백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소리가 한결 가깝게 들립니다. 쫓기는 자의 다급한 걸음보다 뒤따르는 걸음이 오히려 더 느긋하다는 것을 그는 어느 날 알아차렸습니다. 달아나는 힘으로는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펴 드신 모든 분의 등 뒤에도 그 느긋하고 끈질긴 발걸음이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이 꼭 그런 걸음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우리는 사십 년 어둠 속에 태어난 아이를 보았습니다. 태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고,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그가 청년이 되어 첫 걸음을 뗍니다. 그런데 방향이 우리 기대와 어긋납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삿 14:1). 구원을 시작하라고 세우신 사람의 첫 행선지가 블레셋 땅이었습니다. 소라의 언덕에서 소렉 골짜기를 따라 반나절이면 닿는 곳, 산지에서 평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이 내려간다는 동사를 한 장 안에서 다섯 번이나 되풀이해 씁니다. 딤나로, 부모와 함께, 그 여자에게, 마지막에는 아스글론으로 내려갑니다.

.

반대로 올라가는 걸음은 두 번뿐인데, 하나는 부모에게 허락을 구하러 올라온 걸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어그러진 뒤 분에 못 이겨 올라간 걸음입니다. 그 마음을 민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부모가 어찌하여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고 만류하자 아들은 한 문장으로 논쟁을 끝냅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삿 14:3). 히브리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 여자가 내 눈에 좋습니다에 가깝습니다. 조금 뒤에 같은 표현이 또 나옵니다.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삿 14:7). 사사기가 끝에 가서 되풀이하는 탄식, 곧 사람이 각기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이 이 청년의 입술에서 먼저 울립니다.

.

백성 전체가 앓던 병을 그 백성을 건지라고 세운 사람이 똑같이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얹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4). 히브리어 문장은 여호와께로부터라는 말을 맨 앞에 두어 힘을 실었습니다. 삼손도 몰랐고 부모도 몰랐으나, 그 어긋난 걸음 위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얹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삼손의 선택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변호하지도 설명하지도 않고 다만 알려 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좋다 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잘못이 놓인 자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달아나는 걸음 뒤에 느긋한 발걸음이 있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이 신비를 다른 말로 옮긴 것입니다.

.

그러니 이 대목에서 우리 묵상은 안도가 아니라 조심으로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길에서도 일하신다는 말은 어떤 길이든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이것이 내 눈에 좋아서 내린 결론인지 말씀 앞에서 옳아서 내린 결론인지 한 번만 더 물어보십시오. 그 한 번의 물음이 내려가는 걸음과 서 있는 걸음을 가릅니다. 우리 교회들도 오래 보기에 좋은 것을 좇았습니다. 규모와 성과는 눈에 잘 띄고 세기도 쉽지만, 신실함과 오래 참음은 사진에 담기지 않습니다. 잘 보이는 것을 기준 삼아 온 세월이 오늘의 낯 뜨거움으로 돌아왔습니다. 눈은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감각이지만, 판단의 마지막 자리에 앉는 순간 우리를 아래로 끕니다.

.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은혜라는 말로 서둘러 덮을 수는 없습니다. 눈에 좋아 시작된 혼인의 값을 정작 삼손은 치르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남지 않은 그의 아내는 집을 불사르겠다는 협박에 쫓겨 이레를 울었고(삿 14:17), 뒤에 그 여인과 아버지는 실제로 불에 타 죽습니다. 죄의 값은 지은 사람에게만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약한 자리에 선 이들이 대신 치릅니다. 한 가정의 결정은 아이들이 치르고, 한 공동체의 결정은 목소리가 가장 작은 사람이 치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아픈 대목이고, 우리 묵상이 결코 빠르게 넘어가서는 안 될 자리입니다. 본문은 삼손을 영웅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 위에 자꾸 다른 사람의 눈물이 겹쳐 놓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복음이 절실해집니다.

.

값을 치르지 않고 올라가 버린 사람들의 세상에, 치를 빚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내려오심은 눈에 좋은 것을 따라간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걸음이었습니다. 사사기의 모든 내려감이 어긋난 걸음이었다면 갈보리로 향한 그 내려감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내려간 자리보다 더 낮은 데까지 내려오셔서, 등 뒤가 아니라 우리 앞에 서 주셨습니다. 날마다의 묵상이 하는 일이 바로 그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게 하는 것입니다. 귀는 저절로 밝아지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 앉는 조용한 시간이 우리 귀를 길들입니다.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은 달아나기를 그치고, 그친 사람은 비로소 돌아설 수 있습니다.

.

오늘 하루도 우리는 여러 번 내려갈 것입니다. 눈에 좋은 것을 따라 몇 걸음 옮기고, 아차 하며 멈추고, 부끄러워하며 뒤를 돌아볼 것입니다. 그때마다 등 뒤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도 않으며 끝까지 따라오시는 발걸음입니다. 그 소리는 우리를 붙잡아 벌하려는 추격이 아니라, 돌아설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동행입니다. 등 뒤의 걸음이 조급하지 않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내려와 버린 그 자리에도 오늘 그 소리가 닿기를, 그 소리를 알아듣는 귀가 이 아침 열리기를, 그리하여 저녁에는 조금 더 높은 자리에서 하루를 돌아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MZUcxfqBqTw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95 사사기 20:8-28 대답에 없던 약속 new 평화의길벗 2026.10.10 2
394 사사기 20:1-7 묻기 전에 뺀 칼 평화의길벗 2026.10.09 2
393 사사기 19:22-30 문지방 위의 두 손 평화의길벗 2026.10.08 4
392 사사기 19:11-21 광장에 앉은 얼굴 평화의길벗 2026.10.07 7
391 사사기 19:1-10 해가 기울도록 평화의길벗 2026.10.06 5
390 사사기 18:21-31 비어 버린 신당 평화의길벗 2026.10.05 7
389 사사기 18:1-20 문간에 선 제사장 평화의길벗 2026.10.04 10
388 사사기 17:1-13 집 한가운데 모신 것 평화의길벗 2026.10.03 6
387 사사기 16:15-31 밀린 자리에 돋는 것 평화의길벗 2026.10.02 12
386 사사기 16:1-14 한 올씩 풀리는 실 평화의길벗 2026.10.02 7
385 사사기 15:1-20 부르짖은 자의 샘 평화의길벗 2026.09.30 17
» 사사기 14:1-20 뒤따라오시는 발걸음 평화의길벗 2026.09.29 14
383 사사기 13:15-25 쥘 수 없는 이름 평화의길벗 2026.09.28 10
382 사사기 13:1-14 사십 년째 조용한 땅 평화의길벗 2026.09.27 14
381 사사기 12:1-15 강의 이름을 묻던 나루턱 평화의길벗 2026.09.26 10
380 사사기 11:29-40 소고 소리가 멎은 문 앞에서 평화의길벗 2026.09.25 10
379 사사기 11:12-28 되짚어 들려준 옛길 평화의길벗 2026.09.24 10
378 사사기 11:1-11 좋은 땅이라 불린 변방 평화의길벗 2026.09.23 11
377 사사기 10:1-18 짧아진 마음 평화의길벗 2026.09.22 11
376 사사기 9:46-57 손에 익은 돌 평화의길벗 2026.09.21 1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0 Next
/ 2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