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9:22-30 문지방 위의 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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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문 안의 안전에 머무는 데서 자라지 않고, 문밖에 쓰러진 한 사람의 손을 끝까지 바라보며 그 손을 붙잡으러 나가는 데서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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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가옥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습니다. 대문의 문지방은 어른 발목에 닿고, 안방 문턱도 발을 들어야 넘어섭니다. 흙먼지와 물이 들이치지 않게 세운 턱입니다. 그런데 그 낮은 턱이 하는 더 큰 일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 집이 지켜야 할 사람이 되고, 턱 밖에 남은 사람은 그 집이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담이 안과 밖을 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사람을 가르는 것은 늘 발목 높이의 턱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집을 알려면 담의 높이가 아니라 그 턱을 누가 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여는 모든 분에게, 턱 밖에 선 이를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주님의 평화가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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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사기에서 가장 어두운 밤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레위인이 친정으로 돌아간 첩을 데리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해가 기울 무렵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 땅 기브아에 이릅니다. 이방 성읍을 마다하고 동족의 성을 골라 찾아온 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거리에서 그들을 맞아 준 사람은 없었고,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 노인만이 그들을 집에 들였습니다. 그 시절 나그네를 집에 들이는 일은 그의 목숨을 맡는 일이었습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 집의 문지방은 손님을 지키는 약속의 선이 되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그 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끝까지 지켜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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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성읍의 불량배들이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깁니다. 노인은 문밖으로 나가 그들을 말리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삿 19:24). 남자 손님을 지키려고 두 여인을 문밖으로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눈에 좋은 대로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사기 전체를 흐르는 탄식을 다시 듣습니다. 선의로 시작한 환대가 가장 약한 사람을 값으로 치르는 흥정이 되었습니다. 지키려는 마음에 지켜야 할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으면, 선의는 이렇게 쉽게 거래로 바뀌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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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삿 19:25). 붙잡았다는 말은 힘으로 움켜쥐었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순순히 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밤을 길게 적지 않고 대신 시간을 적습니다. 밤새도록, 새벽 미명에, 동틀 때에, 밝기까지. 그 긴 시간 문 안에서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틀 무렵 그녀는 마지막 힘으로 제 발로 돌아옵니다. 문을 두드릴 힘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삿 19:26). 이야기 내내 이름도 없고 한마디 말도 없던 사람이 바로 이 대목에서 처음 문장의 주인이 됩니다. 그녀가 이르렀고, 그녀가 엎드러졌고, 그녀가 밝기까지 거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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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녀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성경은 그 손이 놓인 자리를 적어 두었습니다. 한 걸음이면 넘을 턱이 그녀에게는 끝내 넘지 못한 담이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녀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문을 엽니다.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삿 19:28). 안부를 묻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녀를 데리러 먼 길을 갔던 남편이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문은 열렸지만 그는 턱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밤에 침묵하신 듯 보이지만, 아무도 보지 않은 그 손을 보시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친히 그 턱을 넘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레위인은 문을 열고도 나가지 않았지만, 주님은 버려진 자의 자리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문지방에서 멈춘 손은 성문 밖에서 뻗으신 주님의 손과 맞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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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도 그 문턱 앞에 서 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폭력과 불의를 겪은 이들이 떨리는 손을 문지방에 올려놓을 때, 우리는 너무 자주 일어나라 떠나가자고 말해 왔습니다. 교회의 이름에 누가 될까 입을 막고, 서둘러 용서를 말하고, 다음 일정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제는 그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무릎을 꿇어 그 손을 붙잡고, 믿어 주고,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늘 괜찮다고 말하는 식구의 손을, 일터에서는 말없이 지쳐 가는 동료의 손을 살펴보십시오. 하루를 말씀으로 여는 묵상의 힘은 바로 거기서 드러납니다. 문 안의 따뜻함이 문밖의 사정을 잊게 하지 않도록, 오늘 한 번은 내 집의 문지방 너머를 내다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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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을 받아 본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삿 19:30). 생각하고로 옮긴 히브리 말은 너희 자신을 그녀 위에 두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멀리서 구경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자리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입을 다무는 일은 중립이 아니어서, 침묵하는 쪽은 이미 힘센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20장이 보여 주듯, 생각과 상의가 하나님께 여쭙는 일로 이어지지 않으면 말은 또 다른 폭력이 됩니다. 분노에서 곧바로 터져 나온 말은 사람을 한 번 더 잃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말은 분노가 아니라 기도를 거쳐 나와야 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는 그 말을 벼리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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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을 나서며 현관의 낮은 턱을 넘으실 때, 발목 높이의 그 낮은 선을 한 번 내려다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그 턱 위에서 멈추었던 두 손을, 그 손을 향해 문밖으로 걸어 나가신 주님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그 손을 붙잡는 자리에서 문지방은 더 이상 안과 밖을 가르는 담이 아니라, 버려진 이를 집 안으로 들이는 환대의 선이 됩니다. 낮은 턱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담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살아난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되게 할지는 문 안에 선 사람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과 삶에 있는 모든 문턱이 그렇게 낮아지고 넓어지는 복이 넉넉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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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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