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2-28 되짚어 들려준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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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이 걸어 주신 옛길을 흐리지 않고 되짚어 들려주되, 그 이야기의 마지막 판결만은 참 재판장이신 그분께 남겨 두는 데서 곧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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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과 벌초 때마다 조부의 산소로 오르던 산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에는 늘 지팡이를 짚고 한복을 입은 연로한 고모부가 앞장서셨고, 산길의 굽이마다 같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얼마나 힘이 센 분이었는지, 깊은 산속의 묘를 옮기던 날 바위틈에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느린 말투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되풀이하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던 저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해 듣는 사이 그것은 제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되풀이해 들려준 기억이 한 사람에게 뿌리를 내려 준 것입니다.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은 모든 분께도, 오래 들어 온 은혜의 이야기가 오늘 내 이야기로 들려오는 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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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르앗의 머리가 된 입다가 처음 한 일은 칼을 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왜 내 땅을 치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압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삿 11:13). 한 땅을 두고 두 사람이 모두 내 땅이라 부릅니다. 암몬 왕은 역사를 근거로 내세웠지만 그것은 제 편에 유리하게 고쳐 쓴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의 땅을 밟은 적이 없었습니다. 칼끝에 평화라는 말을 매달아 내미는 요구 앞에서, 입다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바르게 기억된 이야기였습니다. 잘못 기억된 역사는 언제나 남의 것을 제 것이라 부르는 데서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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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다시 사자를 보내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애굽에서 나와 가데스에 이른 일, 에돔 왕과 모압 왕에게 길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일, 그래서 두 나라의 땅을 돌아서 아르논 저쪽에 진을 친 일, 헤스본 왕 시혼에게 길을 청했으나 그가 오히려 군대를 모아 싸움을 걸어온 일까지 차례로 짚어 갑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정확한 기억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래 머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 돕 땅의 변방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이 옛길을 이토록 또렷이 품고 있었을까요. 누군가 그에게 되풀이해 들려주었을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온 조상들의 이야기가 장막에서 장막으로, 아비에게서 아들에게로 건너오며 한 번도 흐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쫓겨난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는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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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의 뼈대는 한 문장입니다. 이스라엘은 빼앗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점령이라는 말이 되풀이되지만, 원문에서 암몬 왕이 쓴 말은 힘으로 붙잡아 가져갔다는 라카흐이고, 입다가 이스라엘의 일을 말할 때 쓴 말은 기업으로 얻었다는 야라쉬입니다. 낱말 하나로 역사의 결이 바로잡힙니다. 그리고 그 긴 서술 한가운데서 주어가 바뀝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삿 11:21). 이긴 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넘겨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그 땅은 전리품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바르게 기억된 이야기는 이렇게 땅을 지키는 방패가 됩니다. 묵상이란 어쩌면 이 주어를 날마다 다시 바로잡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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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논박은 마지막에 한 고백으로 모입니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삿 11:27). 원문대로 옮기면 그 사사이신 여호와께서 사사로 다스리소서가 됩니다. 사사기에 수많은 사사가 등장하지만 이 칭호가 하나님께 붙는 곳은 여기 한 곳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옳게 기억하고 정확히 말해도, 이야기의 결론을 쓰시는 분은 따로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께서도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자신을 부탁하셨습니다. 기억은 우리가 지고 가야 할 몫이지만 판결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옛길을 되짚어 들려준 사람은 그 길의 끝에서 입을 다물고 참 재판장의 말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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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입다를 흠 없는 증인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는 네 신 그모스가 준 땅이라는 말로 여호와를 이웃 민족의 신들과 한 줄에 세웠습니다. 그모스는 모압의 신이었으니 사실마저 어긋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맡긴다던 그는 몇 절 뒤 서원으로 승리를 사려 합니다. 옳은 고백이 자기 자리를 굳히려는 계산과 한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의 그늘입니다. 게다가 그 정확한 역사도 한 사람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삿 11:28). 바른 기억이 언제나 논쟁에서 이기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억은 판결을 맡기는 겸손과 함께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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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도 되짚어야 할 옛길이 있습니다. 폐허 속에서 받은 은혜와 가난한 이웃과 함께 울던 시절이 있고, 부끄럽게 돌아보아야 할 길도 있습니다. 은혜만 남기고 잘못을 지우는 기억은 암몬 왕의 기억을 닮아 갑니다. 부끄러운 기억까지 품을 때 그 기억이 도리어 우리의 뿌리가 됩니다. 저 역시 강단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풀어 갈 때, 하나님이 하신 일보다 내 해석의 솜씨가 앞서지는 않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명절에 가족이 둘러앉는 식탁은 옛길을 들려주기에 좋은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집안에 행하신 일을 한 가지씩 꺼내 보십시오. 한 번 들은 자녀는 남의 이야기로 듣지만 해마다 들은 자녀는 자기 이야기로 듣습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머무는 묵상의 시간도 그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삼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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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산길을 떠올립니다. 고모부는 백 세를 바라보도록 사시다가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그 길에 앞장서는 분은 없지만, 굽이를 돌 때마다 그분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떠나도 되짚어 들려준 옛길은 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 옛길도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흐리지 않고 기억하되, 그 이야기의 결론은 참 사사이신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이 그 옛길 위의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식탁과 일터마다 되짚어 들려준 은혜의 이야기가 새 길을 여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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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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