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29-40 소고 소리가 멎은 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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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하나님께 조건을 내걸어 승리를 사는 거래가 아니라, 이미 값없이 주신 은혜를 믿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며, 약한 이의 눈물 곁에 머무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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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의 끝자락입니다. 명절이면 시골집 대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열립니다. 골목 어귀에 차 소리가 나면 누구보다 먼저 아이들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그 뒤로 앞치마를 두른 어른들이 손을 닦으며 따라 나옵니다. 문 앞에서 맞이하는 얼굴들은 그 자체로 한 해의 수고에 대한 가장 큰 상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대문도 조용해지는 이 가을날, 반가움과 헤어짐 사이에서 마음 한편이 허전한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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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도 한 사람이 문 앞에서 맞이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암몬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온 입다가 미스바의 집에 이를 때,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문밖으로 달려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장면이어야 할 그 순간, 아버지는 옷을 찢으며 주저앉습니다. 무엇이 이 문 앞의 기쁨을 참담함으로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 대답은 집 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입술의 문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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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이야기가 놓인 자리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입다는 옛길을 되짚으며 암몬 왕을 설득하려 했지만 암몬 왕은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십니다. 사사기에서 성령이 임하셨다고 기록된 사람은 옷니엘과 기드온과 입다와 삼손뿐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은 이 싸움을 하나님이 친히 맡으셨다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둘레의 민족들은 전쟁이 불리할 때 신에게 사람을 바치곤 했습니다. 이웃 모압 왕은 궁지에 몰리자 맏아들을 성벽 위에서 불살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가장 가증한 일로 금하셨고, 사람을 드리기로 한 서원조차 값을 치르고 대신하는 길을 율법에 열어 두셨습니다. 입다는 바로 이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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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임하시고 군대가 모인 그 순간, 입다는 칼을 들기 전에 다시 입을 엽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삿 11:30-31). 이미 약속을 받았는데도 그는 보증을 하나 더 원했습니다. 큰 것을 받으려면 큰 것을 걸어야 한다는 셈법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쫓겨났던 기생의 아들이 길르앗의 머리가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그 간절함이 신앙의 말을 빌려 흥정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심판하시는 여호와께 판결을 맡긴다던 입술이, 오늘은 하나님께 조건을 내겁니다. 집 문보다 먼저 입술의 문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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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짧게 끝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삿 11:32). 입다는 아로엘에서 아벨 그라밈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열여덟 해 동안 이스라엘을 짓누르던 암몬이 항복합니다. 이 승리의 주어는 입다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입다의 경솔한 말 때문이 아니라, 곤고한 백성을 향한 긍휼 때문에 원수를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값을 걸어 버린 사람에게 은혜는 더 이상 선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승리는 곧 치러야 할 청구서였습니다. 은혜를 거래로 오해한 사람은 이기고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입다의 이야기에는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에 붙던 그 땅이 평온하였다는 말이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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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이 열립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삿 11:34). 홍해를 건넌 미리암처럼, 딸은 가장 기쁜 노래로 아버지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하나뿐인 자식이었다고 거듭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실 때의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는 숫양이 있었고 미스바의 문 앞에는 없었습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고 외칩니다. 자기가 연 입의 책임을 딸에게 돌린 것입니다. 소고 소리는 그 자리에서 멎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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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사상가 키르케고르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입다를 아가멤논과 함께 공동체를 위해 자식을 바친 비극의 영웅으로 세우고, 아브라함과는 뚜렷이 구별했습니다. 비극의 영웅은 백성의 승리라는 이유 안에 머물러 사람들의 이해와 눈물을 얻지만,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믿음으로 섰다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오늘 본문을 비추는 등불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번제는 하나님이 명하신 시험이었기에 하나님이 친히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번제는 그의 입이 만든 올무였기에 대신할 제물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큰 것을 거는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자리에 서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내 입으로 만들어 내지 않는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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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두 달 동안 친구들과 산에 올라 애곡한 뒤 돌아오고, 아버지는 서원대로 행합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그리지 않습니다. 차마 그릴 수 없는 자리에서 말씀은 침묵합니다. 그리고 이 딸의 이름은 끝까지 기록되지 않습니다. 옛 에밀레종 전설에 종소리를 맑게 하려고 어린아이를 쇳물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듯, 세상의 큰 승리 뒤에는 늘 이름 없는 약한 이의 눈물이 스며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삿 11:40). 아버지의 입술이 그녀를 삼켰다면, 딸들의 입술은 그녀를 기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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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입술의 문은 안녕한지 묻게 됩니다. 이 일만 이루어 주시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기도가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래 작정과 서원을 열심의 표지로 여겨 왔고, 그 안에 참된 헌신도 많았지만 하나님과 거래하는 마음을 믿음으로 착각하게 한 그늘도 있었습니다. 더 아픈 것은 지도자의 욕심과 교회의 성공을 위해 세운 약속이 가장 순수하게 헌신하던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일입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에 뿌리내리지 않은 말은 소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잠잠히 머물지 않고 쏟아 낸 호언장담은,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삶을 흔드는 소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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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일터의 문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조급한 기대가 자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윗사람의 경솔한 약속이 아랫사람의 밤을 빼앗습니다. 혹시 명절을 지나며 내 말 한마디에 문 앞의 웃음이 멎은 가족이 있었다면, 체면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 내가 잘못 말했다고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율법이 대속의 길을 열어 두었듯, 복음은 더 넓은 회개의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끝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셨습니다. 대신할 숫양이 없던 그 자리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서셨기에, 우리는 잘못 연 입을 끝까지 붙들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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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대문이 다시 조용해지는 이 가을, 문 앞에서 우리를 맞아 주던 얼굴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 기쁜 얼굴들이 우리의 욕심과 경솔한 말 때문에 멎지 않도록, 오늘 내 입술의 문에 주님이 파수꾼을 세워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이름 없이 울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해마다 산에 올랐던 이스라엘의 딸들처럼 그 곁에 머물러 함께 울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소고 소리가 멎은 문 앞에도 다시 노래가 울리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 하루 여러분이 말과 삶으로 평화를 짓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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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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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LwIwgs_Hpi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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