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1-20 문간에 선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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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은 더 큰 문을 향해 기뻐 달려가는 발걸음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두신 문간을 삯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키는 자리에서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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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는 표정이 있습니다. 다섯이라는 수는 아직 조심스러운 수입니다. 길을 몰라 더듬는 사람의 수,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 신세를 지는 사람의 수입니다. 육백이라는 수는 다릅니다. 셈을 끝낸 수, 더 물어볼 것이 없다고 여기는 수, 문 앞에 늘어서면 안에 있는 사람이 먼저 말을 삼키게 되는 수입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문 앞의 숫자가 달라지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숫자 사이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줍니다. 다섯 앞에서는 축복을 빌어 주던 입이, 육백 앞에서는 손을 입에 대고 잠잠해집니다. 말씀 앞에 앉으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자기 자리를 숫자로 세지 않고 부르심으로 세는 분별이 주님의 평화와 함께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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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같은 문간이 두 번 나옵니다.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 문간입니다. 한 번은 다섯 정탐꾼이 하룻밤 묵으며 드나든 문간이고, 또 한 번은 무기를 든 육백 명이 늘어선 문간입니다. 그리고 그 문간에 한 젊은 레위인이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문을 지키라고 세워진 지파의 사람입니다. 문을 지키는 일은 본래 문 너머에 계신 분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에 고용되어, 신상이 가득한 사사로운 신당의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말씀을 펴고 묵상하는 자리가 아니라, 주인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미리 준비해 두는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가 그 문간에서 무엇을 골라 쥐는지 따라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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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 지파의 떠돎에서 열립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삿 18:1). 단 지파는 이미 기업을 받았으나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골짜기로 내려가지 못한 채 산지에 끼어 살았습니다. 기업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인데, 받은 땅을 두고 새 땅을 구하러 나선 걸음이 첫 문턱입니다. 정탐꾼들이 그 집에서 레위 청년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느냐. 그는 그 물음에는 답하지 못하고 고용된 사정만 말합니다. 길이 형통하겠느냐는 청에는 기도했다는 말도 없이 답합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삿 18:6). 앞에로 옮긴 말은 맞은편이라는 뜻도 지닙니다. 듣기 좋은 축복이 실은 경고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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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사람이 찾아낸 곳은 북쪽 끝 헤르몬산 자락의 라이스입니다. 화자는 그 성읍을 염려 없이 거주하며 평온하고 안전한 곳으로, 적이 와도 도와줄 동맹조차 없는 외딴 곳으로 그립니다. 정탐꾼들의 눈에 그 평화는 복이 아니라 약점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 형제들을 부추깁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삿 18:10). 그러나 본문의 화자는 한 번도 하나님이 그 땅을 넘겨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넘겨주신 땅은 그들이 버려두고 온 본래의 기업이었습니다. 욕심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입으면 이렇게 거룩한 말투를 갖습니다. 그리고 육백 명이 미가의 집 앞에 멈춰 섭니다. 며칠 전 샬롬을 빌어 준 청년에게, 이제는 칼을 문간에 세워 두고 샬롬을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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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대답이 돌아옵니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삿 18:19). 한 사람의 집보다 한 지파가 낫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삿 18:20) 신상을 받아 들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이 사람의 반대편에 한 분이 서 계십니다. 광야에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엎드리면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으셨던 분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만 경배하겠다며 그 손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양의 문이라 하시며,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참된 제사장은 문을 옮겨 다니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문이 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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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문간의 선택이 찾아옵니다.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 더 큰 교회, 더 눈에 띄는 자리가 한 사람의 집보다 한 지파가 낫지 않겠느냐고 속삭입니다. 자리를 옮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그 결정을 움직이는 것이 부르심인지 마음에 기뻐함인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자들이 가게 주인의 무리로 변해 버렸고 그들이 지키는 가게가 바로 교회라고 썼습니다. 교회가 가게가 되면 성도는 손님이 되고, 손님은 더 나은 가게가 보이면 떠납니다. 그는 그 해독제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세 가지, 곧 기도와 성경 읽기와 영적 지도를 꼽았습니다. 문간을 지키는 힘은 더 큰 무대가 아니라 날마다 말씀 앞에 앉는 묵상의 자리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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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정과 일터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자리일수록 우리는 더 쉽게 더 나은 조건을 기웃거립니다. 부모의 자리, 동료의 자리, 작은 봉사의 자리도 기도와 말씀이라는 모서리가 무너지면 금세 가게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지금 선 자리를 무조건 버티는 것만이 믿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 지파의 잘못은 옮긴 것이 아니라 묻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물어야 할 분께 묻지 않고, 원하는 답을 내줄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내가 선 문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곳이 작고 초라해 보여도,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느냐는 물음에 주님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문간이 바로 우리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무대가 아니라 바로 그 작은 문간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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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두 숫자를 떠올려 봅니다. 다섯은 아직 묻던 수였고, 육백은 이미 셈을 끝낸 수였습니다. 묻는 수에서 셈하는 수로 넘어가는 순간, 사람은 문을 지키는 자리에서 문을 부수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우리 믿음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날마다 다시 세어 보아야 합니다. 더 큰 수가 손짓할 때 한 번 멈추어 서서, 칼을 문간에 세우지 않고 빈손으로 이웃의 평안을 묻는 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양의 문이 되신 선한 목자의 사랑 안에서, 오늘 여러분이 서 계신 그 문간을 기쁨으로 지키는 하루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시작한 묵상의 걸음이 내일도 같은 문간에서 이어지기를, 주님의 평화가 그 자리 위에 오래 머물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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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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