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4:01-17 여호와의 책에 적힌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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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가 온 땅을 법정으로 소환합니다. 열국과 민족들이 증인이 아니라 피고로 불려 나오고, 여호와의 진노 앞에서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며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립니다(1-4절). 이어 심판의 초점이 에돔 한 나라로 좁혀집니다. 여호와의 칼이 보스라에 내려 큰 살륙이 희생 제사처럼 드려지고, 그날은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선포됩니다(5-8절). 풍요롭던 땅은 역청과 유황으로 불타고,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가 드리워져 창조 이전의 무질서로 되돌아갑니다(9-15절). 마지막으로 예언자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고 명합니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도 없으니, 그 말씀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집니다(16-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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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34장은 홀로 서 있는 장이 아닙니다. 바로 뒤에 오는 35장과 한 쌍을 이룹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이 두 장이 "서로를 보충하며 완성한다"고 말하면서, 34장은 최종 심판의 주제를 다루고 35장은 최종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고 정리합니다. 변화된 땅의 대조적인 두 모습이 주도적인 영상으로 처리되는 것입니다. 34장에서는 윤택하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35장에서는 사막이 낙원으로 변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것은 그 무서운 앞장입니다. 그러나 이 장을 읽는 사람은 다음 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 문학적으로 34장은 27장부터 이어져 온 묵시적 단락들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래서 서술이 제한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며, 사실적이지 않고 상징적입니다. 33장까지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직접 약탈한 자들을 향한 심판을 주로 앗수르에게 적용해 왔는데, 34장에 이르러 그 심판이 모든 열방에게 확장됩니다. 개별 민족을 하나씩 호명하던 방식(13-23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온 땅과 온 하늘이 한꺼번에 법정에 섭니다. 1절의 "들을지어다"는 1장 2절에서 하늘과 땅을 소환하던 그 부름과 같은 형식입니다. 다만 그때는 증인으로 불렀고, 여기서는 피고로 부릅니다.
# 왜 하필 에돔인가 하는 물음이 남습니다. 에돔은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 혈통을 나눈 형제 민족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5장 23절부터 말라기 1장 2-3절에 이르기까지, 에돔은 줄곧 이스라엘의 적대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광야 시절 형제의 길을 막았고(민 20:14-21), 유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반역했으며(왕하 8:20), 특히 주전 5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그 곁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오바댜와 시편 137편이 그 상처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에돔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적대하는 세상 나라의 대표 이름이 되었습니다. 매일성경은 이를 두고 에돔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문명의 전형"이라고 표현합니다. 25장에서 모압이 그러했듯, 34장에서는 에돔이 그 자리에 섭니다.
# 한 가지 더 새겨둘 것이 있습니다. 이 장의 심판은 감정적인 앙갚음이 아닙니다. 8절의 '보수'(나캄)와 '신원'(쉴루밈)이라는 두 낱말이 그것을 분명히 합니다. '나캄'은 한쪽의 폭압으로 어그러지고 뒤틀린 상태를 바로잡아 균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를 가리키고, '쉴루밈'은 '샬람'(안전하다, 회복하다, 갚다)에서 나온 말로 보상과 회복의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보복은 파괴가 아니라 어긋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일입니다. 심판이 무서운 이유는 하나님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끝까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이 장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를 정직하게 짚어야 합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의 표현대로 이 장은 "다른 그 어떤 장보다도 피와 불과 야수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찬 심판의 끔찍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만나면 서둘러 넘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심판을 지운 복음은 값싼 위로가 되고, 정의를 잃은 사랑은 방관이 됩니다.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이 힘이 되려면, 하나님이 정말로 셈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34장은 바로 그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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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늘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는 날
하나님은 인간이 절대적이라 믿어 온 우주의 질서까지도 당신의 주권 아래 두시고, 온 땅을 향해 친히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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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이여 나아와 들으라,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이라, 땅과 땅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으라는 부름으로 이 장이 열립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 당하게 하셨습니다. 살륙 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고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며 그 피에 산들이 녹습니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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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소환은 법정 언어입니다. 이사야 1장 2절에서 하늘과 땅을 부르던 그 목소리가 다시 울립니다. 다만 청중이 다릅니다. 이번에 불려 나온 것은 "열국"과 "민족들"입니다. '고이'와 '레움밈'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스르는 이방 민족을 가리키는 동의어입니다. 오스월트는 "땅에 충만한 것"과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을 시적 동의어로 보아 온 땅에 편만한 인구 전체를 가리킨다고 읽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좌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성경의 표현대로,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곳은 없습니다.
2절의 "진멸하시며"는 히브리어 '하람'입니다. 여리고성과 아말렉에 적용되었던 거룩한 전쟁의 용어입니다. '하람'의 근본 사상은 여호와만이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이시며 따라서 전리품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악용되지 않도록 완전히 파멸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오스월트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열국의 범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홀로 그들을 정복하실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삼키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의 만군"이라는 표현입니다. 민족들의 거만함과 잔혹함은 언제나 군사적 침공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 군대가 지금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3절의 묘사는 참혹합니다. 시체를 묻지도 못하고 내던진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극도의 경멸이거나, 시신이 너무 많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아마 두 가지 모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열국이 정반대의 결과에 이릅니다. 높이려던 것이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집니다.
4절은 이 단락의 절정입니다. "하늘의 만상"은 '콜 체바 하샤마임', 곧 하늘의 모든 군대라는 뜻입니다. 별들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 별로 상징되는 만신전을 의미합니다. 오스월트는 여기서 하나님이 이방 민족과 그들이 수호신으로 믿는 것들을 동시에 처단하신다고 봅니다. 고대 세계에서 하늘은 신들의 거처였습니다. 바벨론의 아누, 엔릴, 에아가 모두 하늘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간다는 것은 우상들이 놓여 있던 무대 자체가 접혀 치워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절대적이라 믿었던 질서, 흔들릴 리 없다고 여겼던 체계가 종잇장처럼 말립니다. '사라지고'로 옮겨진 '나마쿠'는 본디 질병으로 쇠약해진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게세니우스는 이를 별들이 양초처럼 녹아 없어지는 장면으로 읽었습니다. 하늘에 못 박힌 듯 붙어 있어 결코 떨어질 것 같지 않던 별들이, 마른 무화과 잎처럼 후드득 떨어집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과 요한계시록 6장 13절이 이 이미지를 세상 종말의 표상으로 이어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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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하늘에 붙박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시장,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권력의 구도, 영원할 것 같은 기술의 진보, 그리고 우리 각자가 은밀히 절대시하는 것들입니다. 부동산 시세표, 자녀의 성적표, 건강검진 수치, 조직 안에서의 내 자리. 우리는 이것들을 하늘의 별처럼 여기며 삽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별들이 마른 잎처럼 떨어지는 날을 봅니다. 이 환상은 우리를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절대가 아닌 것을 절대로 섬기는 동안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대목에서 특별히 정직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세대에 붙들었던 성장의 신화, 건물의 규모, 숫자로 증명되는 신앙 역시 하늘의 만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는 신앙 자체가 무너진 것처럼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오히려 자유를 주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무엇을 잃어도 흔들리지 않는 공동체가 되려면, 애초에 무엇을 별처럼 붙들고 있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견고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두루마리처럼 말릴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손을 조금 느슨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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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절 보스라의 제단, 시온의 송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짓밟은 자를 반드시 셈하시며, 억울한 자의 송사를 당신의 법정에서 친히 신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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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칼이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를 위한 희생이 보스라에 있고 큰 살륙이 에돔 땅에 있음입니다.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함께 도살장에 내려가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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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에서 시선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1-4절이 전 지구적 심판을 개괄했다면, 이제 예언자는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짚습니다. 일반적인 선언에 정곡을 찌르기 위해 구체적 사례를 드는 것은 이사야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이라는 표현에는 두 해석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는 읽기(E. J. Young)와, 그 칼이 이미 하늘에서 악한 영적 세력들을 충분히 처단했다는 읽기(오스월트)입니다. 어느 쪽이든 요점은 같습니다. 땅의 심판은 하늘에서 이미 결정된 일의 집행일 뿐입니다.
6-7절의 이미지는 충격적입니다. 에돔의 멸망이 희생 제사에 비유됩니다. 예레미야 46장 10절, 에스겔 39장 17절, 스바냐 1장 7-9절이 같은 이미지를 씁니다. 몸집이 작은 어린 양과 염소와 숫양은 에돔의 평민을, 몸집이 큰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는 에돔의 영주들을 상징한다고 델리취는 봅니다. 곧 이 살육에서 제외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오스월트가 덧붙이는 통찰이 깊습니다. 구약은 죄가 생사와 관련된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라도 희생 제물의 죽음을 통해 속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결국 어떤 희생으로 매듭지어집니다. 범죄자 자신의 희생이거나, 그를 대신한 제물의 희생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53장에서 그 둘째 길을 보여 줍니다. 오스월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돔은 죗값으로 희생당했지만,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다면 굳이 그런 희생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에돔의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이것이 34장을 읽는 그리스도인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보스라의 제단이 아니라 골고다의 제단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이미 한 분이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보스라'는 사해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에돔의 성읍이며 오늘날의 부세이라로 추정됩니다. 왕의 대로를 끼고 구리 광산에 인접한 요새 도시였습니다. 무역과 광물로 부유했고 바위산 위에 세워져 난공불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부와 그 요새를 심판의 제단으로 그립니다. 사람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자리가 가장 위태로운 자리가 됩니다.
8절이 이 모든 것의 이유를 밝힙니다. 이 절은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사 34:8). 앞서 배경에서 살핀 대로 '나캄'과 '쉴루밈'은 감정적 응징이 아니라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는 공의로운 행위입니다. 특히 "시온의 송사"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시온은 지금 법정에 소송을 걸어 놓고 판결을 기다리는 원고입니다. 오랫동안 판결이 나지 않아 사람들은 재판장이 잠들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건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정한 때에 판결이 선고됩니다. 에돔이 심판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해 괴롭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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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을 당해 본 사람은 압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아무도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가해자는 잊고 잘 살고, 피해자만 그 장면을 매일 되감아 봅니다. 8절은 그런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의 송사를 접수해 두셨습니다. 사건 번호가 있고 판결의 해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내 손으로 심판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인용한 것도 바로 이 신앙입니다. 복수를 금지하는 이유는 정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의가 더 좋은 법정에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에게는 에돔일 수 있습니다. 형제의 위기 앞에서 팔짱을 끼었던 순간, 남의 무너짐을 은근히 반겼던 마음, 약자의 곤경을 이용해 이익을 취했던 계약. 에돔의 죄는 칼을 든 것이 아니라 형제가 무너질 때 곁에서 구경한 것이었습니다. 오바댜는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하지 말 것이며"(옵 1:12)라고 못 박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재난과 참사 앞에 침묵하거나 조롱했던 자리들을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방관은 중립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담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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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5절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를 고의로 거스르는 세력에게 그 질서를 거두어 가심으로 심판하시는, 창조의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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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며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됩니다.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습니다.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삽니다.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십니다.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불러도 아무도 없고 모든 방백도 없어집니다.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고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됩니다.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고 올빼미가 거기 살면서 쉬는 처소를 삼으며, 부엉이가 깃들여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고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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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절의 묘사는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시킵니다(창 19:24-28; 신 29:23; 렘 49:18). 역청과 유황은 모두 가연성 물질이어서 한번 붙으면 오래도록 꺼지지 않습니다. 에돔이 사해에 근접해 있고 그 일대에 역청과 유황이 실제로 산출되었다는 지리적 사실이 이 표현의 배경일 것입니다. 10절은 그 파멸의 영속성을 강조합니다. 칼뱅은 이토록 강렬한 어투가 반복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생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서 보통의 표현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끊임없이 떠오르는 연기는 훗날 요한계시록 19장 3절이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11절이 이 단락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사 34:11). '혼란'은 '토후'이고 '공허'는 '보후'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의 바로 그 두 낱말입니다. 매일성경은 이것을 '역창조'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창조의 질서를 고의로 거역하는 세력에게 하나님은 그 질서를 거두어 가심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도구입니다. '줄'과 '추'는 본래 건축할 때 쓰는 연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확히 파괴하기 위해 쓰입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부수지 않으십니다. 측량하고 수평을 재어 부수십니다. 열왕기하 21장 13절, 예레미야애가 2장 8절, 아모스 7장 7-9절에 같은 이미지가 나옵니다. 심판조차 정밀합니다.
11-15절에 등장하는 짐승들의 목록은 13장 21-22절의 바벨론 심판과 짝을 이룹니다. 인간의 교만을 대표하는 먼 나라 바벨론과 가까운 나라 에돔이 같은 운명에 놓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영예롭던 땅이 부정한 광야 짐승들의 차지가 됩니다. 오스월트는 이 그림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자신을 최고로 여기며 제멋대로 행하는 인생들은 자신과 주변 환경을 처참하게 파괴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짐승들의 이름은 정확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카아트'(당아새 혹은 펠리칸), '키포드'(고슴도치), '야느쇼프'(부엉이) 같은 이름들은 대개 그 울음소리에서 따온 의성어로 보입니다. 특히 14절의 '릴리트'(올빼미)는 앗수르와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밤의 귀신 릴리투를 연상시키는 낱말입니다. 이사야는 에돔의 황폐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낱말을 골랐습니다.
12절은 국가의 종말을 말합니다. 에돔은 세습 귀족들이 모여 새 왕을 세우는 군주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을 세우려고 귀인들을 불렀는데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NIV는 "그 귀인들이 거기서 국가라 불릴 만한 것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라 옮기고, RSV는 아예 "그들은 그것을 가리켜 '거기에는 국가라는 것이 없음'이라 부를 것"이라 옮깁니다. 30장 7절에서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부른 것과 같은 조롱입니다. 13절에서 가장 분주하고 가장 정성껏 관리하던 궁궐에 가시나무가 납니다. 사람의 손길이 끊긴 자리에 자연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가 들어찹니다.
그런데 이 참혹한 그림 안에 뜻밖의 낱말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부엉이가 거기 깃들여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고,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입니다. 폐허의 한복판에서 짐승들이 짝을 이루고 새끼를 칩니다. 알렉산더는 이것을 에돔의 파멸이 영구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사람 대신 짐승이 대를 이어 산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다른 결의 울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간 땅에서조차 생명은 짝을 찾고 알을 낳습니다. 창조주는 심판하시는 중에도 여전히 창조주이십니다. 이 낱말이 다음 단락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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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후'와 '보후'가 다시 드리워지는 자리를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있습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이 대목을 두고, 핵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묘사가 생생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적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방사능으로 오염된 사막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이미 인생들 속에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후 위기와 생태계 붕괴를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지식을 추구한 결과가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자연계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무모함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폭염과 폭우가 해마다 기록을 갈아 치우고, 남해의 바다 온도가 올라 어장이 바뀌고, 광양의 여름이 해마다 길어지는 것을 우리는 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창조 질서를 거스른 대가를 창조 질서가 되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도 '역창조'는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경계를 오래 무시하면, 우리 안에 질서가 아니라 혼돈이 들어찹니다. 쉼 없이 일하다 몸이 무너지고, 관계의 경계를 허물다 신뢰가 무너지고, 말의 절제를 잃다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매일성경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생명력은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법과 창조 질서의 경계 안에서 창조주를 온전히 신뢰할 때만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경계는 우리를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15절의 부엉이를 잊지 마십시오. 폐허가 된 자리에도 생명은 깃듭니다. 우리 인생에 이미 무너진 자리가 있다면,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폐허에도 짝을 보내시는 분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누군가의 무너진 자리 곁에 짝으로 앉아 있는 일일 것입니다. 설명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함께 깃들이는 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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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절 여호와의 책에 적힌 대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 가운데 단 한 줄도 허공에 흩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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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고 예언자가 명합니다.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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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율법 자체라는 견해(칼뱅), 예언서 자체라는 견해(유니우스),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운명의 책이라는 견해(오스월트, 모티어) 등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읽기는 이사야가 앞서 선포했던 자신의 예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알렉산더, 델리취, 로이폴드). 이사야 30장 8절은 예언의 말씀을 서판에 기록해 두라고 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지금 미래의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오래전에 적어 둔 것을 꺼내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 하나씩 대조해 보라고 말입니다.
'짝'이라는 낱말도 마찬가지로 두 갈래로 읽힙니다. 11-15절에 나온 짐승들이 실제로 암수 짝을 이루어 그 땅을 채운다는 읽기와, 예언과 그 성취가 서로 짝을 이룬다는 읽기입니다. 저는 이 둘이 하나로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목록에 적으신 짐승은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그 땅에 나타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언은 한 문장도 빠지지 않고 성취되었습니다. 목록과 현실이 정확히 짝을 이룹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장을 읽으며 확인해야 할 것은 심판의 잔혹함이 아니라 말씀의 정확함입니다.
17절의 이미지가 그것을 확증합니다. 여호와께서 제비를 뽑으시고 줄을 띠어 그 땅을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은 여호수아 18장에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배하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때 그 세심한 손길로 당신의 백성에게 기업을 나누어 주셨던 분이, 이제 같은 손길로 폐허가 된 에돔 땅을 짐승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 어떤 민족이나 개인도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소유주로서 당신의 뜻에 따라 각 민족과 개인에게 구획을 나눠 주십니다(시 16:6; 미 2:5). 이사야는 다시 묻습니다. 왜 열국을 의지하는가. 그들은 자기 운명조차 주관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34장을 뒤집어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의 경고에서 이토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다면, 같은 입으로 하신 사랑의 약속은 어떠하겠습니까. 매일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심판의 경고가 이토록 철저히 성취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약속 또한 분명히 우리 삶의 실제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34장의 무서움은 결국 35장의 근거가 됩니다. 심판을 정확히 이루시는 분만이 구원도 정확히 이루십니다. 신실하심은 나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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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습니다. 위로의 약속에는 아멘 하고, 경고의 말씀에는 눈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고 말합니다. 대조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실제로 일어난 일을 나란히 놓아 보라는 것입니다. 이 대조를 해 본 사람만이 다음에 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기록의 축적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오늘 각자의 '여호와의 책'을 한번 펼쳐 보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세월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지키신 약속들의 목록 말입니다. 그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일들이 지금 와 보니 제 짝을 찾아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다고 여겼던 일들이, 다른 모양으로 이미 채워져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이 말씀은, 심판의 정확함인 동시에 섭리의 촘촘함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이렇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서로에게 '여호와의 책'을 읽어 주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떤 성도가 지금 자기 인생의 목록에서 빠진 것만 세고 있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이 그가 잊고 있던 성취의 항목들을 대신 읽어 주는 것입니다. 나눔이란 결국 그 일이 아니겠습니까. 혼자서는 자기 삶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 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폐허에도 짝을 두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의 교회에 짝을 두지 않으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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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온 땅을 법정으로 부르시는 주님,
우리가 절대라고 믿어 온 것들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가는 날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늘에 못 박힌 듯 흔들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 앞에서
겁먹지도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도 말게 하시고,
오직 그 하늘을 말아 쥐시는 손 하나만을
경외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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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송사를 잊지 않으시는 주님,
억울함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그 사건을 접수해 두셨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 손으로 심판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동시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에돔이 아니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소서.
형제의 재앙의 날에 방관했던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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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질서를 지키시는 주님,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가 드리워지는 세상 한복판에서
생명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쉼과 절제와 정직의 자리를 지키게 하시고,
무너진 자리 곁에 짝으로 앉아 주는
광양사랑의교회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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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진 것이 하나도 없게 이루시는 주님,
당신의 책에 적힌 한 문장도 허공에 흩어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심판을 정확히 이루신 그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약속도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오늘 하루 그 촘촘한 섭리 안에서
평화의 순례자로 걷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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