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15-24 숨긴 계획과 토기장이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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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계획을 세우는 자들을 향한 화의 선포로 열립니다. 예루살렘의 자문관들은 남의 눈을 피해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며 누가 우리를 보랴 하고 말하는데, 예언자는 이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자리가 뒤바뀐 패역이라 고발합니다(15-16절). 그러나 신탁은 고발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이 되는 대변혁이 일어나,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듣고 맹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보며,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의 기쁨이 더해지는 반면 성문에서 재판을 굽게 하던 자들은 끊어집니다(17-21절). 마침내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선언하십니다. 이제부터 야곱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자손은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일을 보고 그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됩니다(2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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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이사야 28장에서 33장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화' 신탁 가운데 두 번째 신탁의 뒷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어제 본문은 봉한 책으로 끝났습니다. 모든 계시가 봉인되어 글 아는 자도 모르는 자도 읽지 못하고,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는 선언으로 닫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리라. 어제 닫힌 문이 오늘 열립니다. 같은 낱말이 그대로 되돌아오되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앞장의 절망을 다음 장의 소망으로 되받아 쓰는 책입니다.
# 김필회 교수는 오늘 본문을 두 단락으로 나눕니다. 15절에서 21절까지가 통치자들의 은밀한 정치적 거래와 그에 대한 창조주 여호와의 응답이고, 22절에서 24절까지가 야곱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앞 단락은 다시 15-16절과 17-21절로 나뉩니다. 예언자는 주변 나라들과 은밀하게 정치적 거래를 도모하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이들은 어리석게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여쭈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능력과 판단에 의지하여 결정하고 처리합니다. 시기는 주전 705년에서 701년 사이, 앗수르의 사르곤 2세가 죽고 산헤립이 즉위하면서 제국 곳곳에 반란의 기운이 돌던 때입니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 주변 소국들 사이를 은밀히 오갔습니다.
# 16절의 첫 낱말이 이 본문 전체의 열쇠입니다. 개역개정이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로 옮긴 히브리어 하프커켐을 김필회 교수는 '전도(顚倒)시키는 너희들!' 또는 '너희의 뒤집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예언자가 고발하는 것은 도덕적 타락 일반이 아니라 순서가 뒤집힌 상태입니다. 재료에 불과한 진흙이 그 재료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자문관들의 행태는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의 소유와 능력을 부정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자가 문제 삼는 것은 이들의 비밀스러운 태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르시게 일을 추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의 불신앙입니다.
# 히브리어 낱말 하나가 이 비유를 더 깊게 만듭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사야 26장 3절의 '심지'로 옮겨진 예차르가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을 때 쓰는 틀과 관계있는 단어라고 설명합니다. 그 틀로 만든 토기를 가리키기도 하고(사 29:16),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쓰신 틀이라는 뜻에서 체질을 가리키기도 하며(시 103:14),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틀이라는 뜻에서 품은 뜻이나 상상이나 계획이나 목적을 뜻하기도 합니다(창 6:5). 곧 히브리 사람들에게 '빚어진 그릇'과 '마음이 품은 계획'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낱말이었습니다. 자기 계획을 깊이 숨기려 하던 자들은, 그 계획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자기가 빚어진 존재임을 실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 오늘 본문이 신약으로 이어지는 길도 두 갈래로 뚜렷합니다. 하나는 로마서 9장 20절과 21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며 이 본문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옵니다.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 11장 5절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의 문장 그대로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사야서에서 눈멂과 귀먹음이 언제나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현실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회복의 시대는 보고 듣는 시대이자 필연적으로 정의와 공의의 회복이 일어나는 시대라고 정리합니다. 20절과 21절이 곧바로 법정의 부패를 다루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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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절 어둠 속에 감춘 계획
하나님은 사람이 가장 깊이 감추어 둔 계획의 자리에 이미 와 계시는 분이며, 지으신 이와 지음받은 자의 순서를 결코 뒤바꾸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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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은 화의 선포로 열립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15절). 감추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두 개의 물음이 이어집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이어 예언자의 반문이 터져 나옵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16절 상). 물음이 물음으로 되받아쳐집니다.
그리고 두 개의 그림이 나란히 놓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절 하). 앞의 그림은 존재를 부정하고 뒤의 그림은 지혜를 부정합니다. 당신은 나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 두 문장이 어둠 속 회의실에서 오간 말의 실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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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15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왕의 자문관들은 남이 알지 못하게 비밀리에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밀하게 주변의 나라들과 정치적 협약을 추진합니다. 앗수르의 감시를 피하여 어둠 속에서 일을 추진하는 것 자체는 외교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문제 삼는 것은 그 은밀함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지혜와 판단력에만 의존했습니다. 회의실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이 죄가 아니라, 그 방 안에 하나님의 자리를 두지 않은 것이 죄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라는 말은 무신론자의 말이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을 드나들고 절기를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는 인정하면서 정치의 영역에서는 계산에서 빼놓았을 뿐입니다. 앞 단락 13절이 이미 그 상태를 진단했습니다.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마음이 멀리 떠난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방을 하나 따로 마련해 둘 뿐입니다.
토기장이 비유가 이 지점을 정확히 찌릅니다. 김필회 교수는 예언자가 자문관들의 자기만족적인 오만한 태도를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고발한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이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의 능력을 회의하며 그분께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진흙에게는 진흙의 지혜가 없습니다. 진흙이 아는 것은 오직 자기가 눌린다는 감각뿐이고, 그 눌림이 어떤 모양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물레 위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손 안에 있는 자가 손을 평가하려 들 때, 그것을 성경은 패역이라 부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예차르라는 낱말을 여기서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품은 계획을 뜻하는 그 말이 동시에 토기장이의 틀을 뜻한다는 사실은, 15절과 16절이 어째서 한 호흡으로 붙어 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자기 계획을 숨기려 한 자들은 자기가 이미 빚어진 그릇이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조차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두고 내 가장 깊은 내면보다 더 깊은 곳에 계셨다고 고백한 것과 같은 자리입니다. 숨을 곳을 찾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더 깊이 그분과 마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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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하는 방을 하나쯤 두고 삽니다. 예배당에서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사업의 손익계산서를 펼치는 자리에서는 그 고백을 잠시 접어 둡니다. 자녀의 진로를 정하는 밤의 대화에서, 부동산과 노후를 계산하는 표 앞에서, 교회의 인사와 예산을 논의하는 회의석에서 우리는 자주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 결정을 다음 주일에 하나님께 추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결정의 순서를 뒤집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람의 회의로 결론을 내고 나중에 기도로 포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안건을 펼쳐 놓고 그 앞에서 의논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회의 앞에 기도 순서를 하나 넣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결정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논의의 내용 자체를 바꾸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번 한 주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계획 하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계획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계획을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숨긴 계획이 아니라 아직 나누지 않은 계획일 뿐입니다. 말할 수 없다면, 바로 그 자리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온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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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1절 오래지 아니하여 일어날 대전환
하나님은 굳어 버린 세상의 판을 통째로 뒤엎으시는 분이며, 그 대전환의 첫 열매를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의 기쁨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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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다음에 곧바로 심판이 오지 않고 뜻밖에도 창조의 언어가 옵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17절). 시간의 표지가 먼저 놓입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그리고 그날의 풍경이 이어집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18절),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19절).
그 기쁨의 근거가 20절에서 밝혀집니다.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20절). 그리고 그들이 누구였는지가 21절에서 낱낱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21절). 회복의 그림 한복판에 법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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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17절을 두고 예언자가 가까운 시간 안에 완전한 변혁이 있을 것을 내다본다고 말합니다. 도래하는 구원 시대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뿐 아니라 자연계까지 변혁됩니다.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고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리라는 말은 서로 대립하는 두 내용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한 것입니다. 자연환경이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바뀌고, 여호와께서 자연을 축복하여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풍족하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어둠 속의 회의로 나라를 지키려던 자들에게 예언자는 대답합니다. 역사의 대전환은 오직 창조주 여호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8절이 특별히 아름다운 이유는 어제 본문과 정확히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봉한 책이었고 오늘은 그 책의 말을 못 듣던 사람이 듣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막혔던 귀가 뚫려 들을 수 있게 되고,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볼 수 없었던 들어붙은 눈이 열려 볼 수 있게 된다고 풀이합니다. 죽음과 저주의 영역으로부터 생명과 축복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어둠으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둠 한복판에서 보는 눈이 열린다는 이 말씀이, 15절에서 어둠을 은신처로 삼았던 자들의 어둠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같은 어둠인데 한쪽은 숨는 자리이고 다른 한쪽은 눈을 뜨는 자리입니다.
19절의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해 김필회 교수는 이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여호와 신앙에 신실한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에 의해 고난과 무시를 당하던 이들입니다. 열심으로 성전을 방문하며 하나님의 현존의 놀라움을 경험하고, 그분의 약속이 성취될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뒤집으실 때 가장 먼저 웃는 얼굴이 이 사람들의 얼굴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한나의 노래가 그러했고 마리아의 노래가 그러했습니다.
20절과 21절은 그 뒤집힘의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김필회 교수는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가 죄지을 기회만 엿보는 자들이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더 이상 죄로 여기지 않는 이들에게는 탐욕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 파렴치함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재판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법을 조작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게 하고, 소송에서 임의로 죄를 씌우며, 약자를 위해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무를 놓아 침묵하게 만듭니다. 김근주 교수의 지적처럼 이사야서에서 눈과 귀가 열리는 회복은 언제나 정의와 공의의 회복과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18절의 열린 눈은 개인의 영적 각성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문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바로 보는 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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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어둠 속에서 결정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서류는 완벽하고 절차는 적법한데 결과는 언제나 힘 있는 쪽으로 기웁니다. 소송을 견딜 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정의의 거리는 아득합니다.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한다는 21절의 표현은 삼천 년 전의 문장인데도 오늘 아침 신문의 한 문장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냉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이 한마디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굳어 버린 판을 뒤엎으시는 분이고, 그 시간표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소망 위에 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체념하는 자리도 아니고, 우리 힘으로 바꾸겠다고 나서는 자리도 아니라, 뒤엎으실 분이 계시기에 오늘 자기 자리에서 정직하게 사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새겨야 합니다. 그날의 기쁨은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우리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과 목소리가 작은 사람 가운데, 우리는 누구의 말을 먼저 듣고 있습니까. 이번 주에 우리 교회 안에서 가장 말이 적은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분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웃게 하실 얼굴을 우리가 먼저 알아보는 연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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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4절 부끄러워하지 아니할 야곱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건지셨던 그 손으로 오늘도 자기 백성의 얼굴을 다시 들게 하시는 분이며, 혼미해진 마음까지 총명하게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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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은 '그러므로'로 열립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22절). 하나님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이 특별합니다.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
이어 자손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23절). 보는 것이 먼저이고 거룩하다 하는 것이 나중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손입니다.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
마지막 절이 본문 전체를 닫습니다.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24절). 고쳐지는 것은 형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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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22절에서 아브라함과 야곱이 함께 언급되는 것이 특이하다고 지적합니다. 야곱 족속은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하나님 백성의 각 구성원이 한 조상에게서 나왔다는 동질감과 소속성을 강조합니다. 곧 이스라엘이 한 가족임을 보여 줍니다. 구약성서는 다른 곳에서 아브라함의 구속을 언급하지 않는데, 아마도 창세기 12장에서 애굽의 바로에게서 건지신 일과 20장에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서 건지신 일과 관련하여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 이방 민족으로부터 구속받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질 구속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고 반복 사용된 '이제는'이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부끄러움과 창백해진 얼굴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본문은 이방 민족으로부터의 해방을 직접 말하는 대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간접적인 표현을 씁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얼굴은 존재의 상태가 드러나는 자리였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진다는 것은 살아 있으나 피가 돌지 않는 상태, 곧 수치로 인해 사람 앞에 설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형편을 바꾸시기 전에 얼굴을 바꾸십니다. 고개를 들게 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23절의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이라는 표현은 16절의 토기장이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15절에서 자기 계획을 숨기던 자들이 부정한 것이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그는 총명이 없다. 그런데 이제 그 자손들이 그 손이 행한 일을 봅니다. 부정되었던 손이 알아보아지는 손이 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호와의 구속 행위와 관련하여 언급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이 제의적 행위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순종을 내용으로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민수기 20장 12절과 27장 14절이 그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다 하는 일은 예배당 안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삶의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24절의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에 대해 김필회 교수는 출애굽 전승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시편 95편 10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불순종에 빠진 출애굽 세대를 두고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마음이 혼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들이 이제는 총명해져서 그분의 교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제 본문에서 없어진다고 했던 그 총명이 오늘 본문에서 돌아옵니다. 다만 그것은 지혜자의 총명이 아니라 혼미하던 자의 총명입니다. 하나님은 총명한 사람을 더 총명하게 하시는 대신, 총명을 잃은 사람에게 총명을 다시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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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가장, 자녀 문제로 교회에 발길을 끊은 부모, 병으로 오래 자리를 비운 성도, 관계가 깨어진 뒤 예배당 뒷자리에만 앉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개 충고가 아니라 얼굴을 다시 들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얼굴을 다시 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약속이 먼저 실현되는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얼굴을 알아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래 보이지 않던 얼굴을 기억하고, 창백해진 얼굴 앞에서 이유를 캐묻는 대신 곁에 앉는 교회입니다. 23절의 순서를 기억합시다. 보는 것이 먼저이고 고백은 나중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이 하신 일을 알아볼 때, 거룩하다는 고백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리고 24절의 약속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지금 마음이 혼미하다고 느끼신다면, 기도가 막히고 말씀이 읽히지 않는 계절을 지나고 계신다면,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총명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애써 얻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원망하던 입술에도 교훈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물레 위에서 손을 뿌리치지 않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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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어둠 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누가 우리를 보랴 하던 입술이
바로 저희의 입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는 주인이라 부르면서
결정의 자리에서는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저희를 빚으신 손을 알아보게 하시고
저희 계획을 그 손 위에 올려놓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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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래지 아니하여 뒤엎으실 분이 계시기에
저희는 오늘의 어둠 앞에서 냉소하지 않겠습니다.
못 듣던 귀를 여시고 감긴 눈을 뜨게 하시되
성문에서 억울한 자의 일을 보는 눈으로 열어 주옵소서.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가 먼저 웃는 그날을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미리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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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아브라함을 건지신 그 손으로
부끄러움에 고개 숙인 저희 형제자매의 얼굴을 들어 주옵소서.
혼미한 마음에 총명을 다시 주시고
원망하던 입술에 교훈을 새겨 주옵소서.
저희 가정과 광양사랑의교회 위에
주님의 손이 행하신 일이 드러나
그 이름을 거룩하다 하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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