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8:01-19:15 조용히 감찰하시는 처소와 마르는 나일강, 그리고 시온으로 모이는 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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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8장과 19장 1-15절은 앗수르의 서슬 퍼런 위협 앞에서 남유다가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붙들었던 남방의 두 강국, 곧 구스와 애굽을 향한 경고입니다. 구스는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사절을 급히 보내며 반앗수르 전선을 규합하느라 분주했습니다(1-2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소란한 외교의 한복판에서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사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바로 그때 낫을 들어 연한 가지를 베어 버리십니다(5절). 그 심판의 끝에서 놀랍게도 그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시온 산에 이르게 됩니다(7절). 이어지는 19장 1-15절은 유다가 정치적·군사적 요새로 신뢰하던 애굽의 총체적 붕괴를 네 겹으로 그려 냅니다.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임하시자 우상들이 떨고 마음이 녹으며(1절), 나라는 안에서부터 형제와 이웃을 치는 내란으로 무너집니다(2-4절). 생명줄이던 나일이 마르자 어부와 베 짜는 자와 품꾼의 생계가 무너지고 나라의 기둥이 부서집니다(5-10절). 마지막으로 소안과 놉의 방백들, 곧 제국의 두뇌들이 여호와께서 섞으신 어지러운 마음으로 인해 취한 자처럼 비틀거리며, 머리부터 갈대까지 아무 할 일이 없게 됩니다(11-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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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신탁이 울려 퍼진 무대는 주전 8세기 후반, 앗수르 제국의 무자비한 서진(西進)으로 고대 근동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시기입니다. 당시 남방의 신흥 패권국이었던 구스는 애굽을 정복하고 제25왕조를 세운 누비아 세력으로, 히스기야 왕실에 사절단을 보내 강력한 반앗수르 동맹을 종용했습니다. 유다의 정치인들에게 그것은 가장 합리적인 계산이었습니다. 홀로 버틸 수 없다면 힘 있는 이웃과 손을 잡는 것 말고 무슨 길이 있었겠습니까. 이사야가 문제 삼은 것은 계산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정교한 계산표에서 하나님의 이름 한 줄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김필회 교수님은 이 대목에서 구스가 "앗수르의 무서운 칼날을 피하고자 가장 신속한 갈대 배를 띄우며 외교적 동맹을 도모하기 위해 분주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향해 그 군사력과 동맹의 계략에 편승하지 말라고 강력히 제재하신다고 정리합니다. 문학적으로도 18장과 19장은 짝을 이룹니다. 18장에는 인간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날개 치는 소리, 나팔 소리, 사절들의 발걸음 소리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4절에서 단 한 번 입을 여시는데, 그 내용이 침묵입니다. 소란과 고요, 분주함과 감찰의 대조가 두 장을 관통하는 축입니다.
# 정경적으로 이 단락은 이사야 13-23장의 열방 신탁 모음 안에 놓여 있습니다. 열방 신탁의 목적은 이방을 저주하는 데 있지 않고, 언약 백성으로 하여금 "누가 참으로 역사의 주인인가"를 다시 배우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파노라마는 언제나 예배의 장면으로 열립니다. 18장 7절에서 구스가 예물을 들고 시온에 이르는 장면, 그리고 본문 이후 19장 19-25절에서 애굽과 앗수르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복이 되는 장면은, 심판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만민을 예배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노래한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는 감탄이 여기서 이미 예비되고 있는 셈입니다.
# 인문학적으로 본문은 '속도'와 '지성'이라는 인간 문명의 두 자랑을 겨냥합니다. 구스의 갈대 배는 당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고, 애굽의 소안과 놉은 고대 세계의 지혜가 축적된 도시였습니다. 가장 빠른 자와 가장 똑똑한 자가 나란히 무너지는 이 장면은, 속도와 정보를 신으로 삼은 우리 시대를 향해 오래된 거울 하나를 들이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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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7절 날개 치는 소리와 조용히 감찰하시는 처소
하나님은 인간의 성급한 자구책이 요란하게 물살을 가르는 동안에도 당신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하시다가, 가장 무르익은 때에 친히 낫을 드시고 마침내 열방을 예배자로 시온에 불러 모으시는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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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사 18:1)라는 탄식으로 말문을 엽니다. 그 땅은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에게로 가라고 재촉합니다(2절). 세상의 모든 거민을 향해 산 위의 기치를 보고 나팔 소리를 들으라는 명령이 이어집니다(3절). 그 소란 위에 여호와의 음성이 얹힙니다.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사 18:4). 그리고 추수하기 전,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낫으로 연한 가지를 베고 퍼진 가지를 찍어 버리십니다(5절). 잘린 가지는 산의 독수리와 들짐승의 여름과 겨울 양식이 됩니다(6절). 그런데 그 때에 바로 그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릅니다(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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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님의 주석적 관점에 따르면, 구스는 앗수르의 칼날을 피하려고 가장 빠른 갈대 배를 띄우며 동맹을 도모하는 일에 분주했고,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해 그 군사력과 계략에 편승하지 말라고 강하게 제지하십니다. 여기서 4절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쉬코타 웨압비타 비므코니'는 하나님의 주권적 성품을 보여 주는 대단히 아름답고도 엄위한 시적 표현입니다. '샤카트'는 소요가 그친 상태, 물결이 잦아든 고요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대적의 말발굽 소리 앞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주목할 것은 그 고요를 설명하는 두 개의 비유입니다. 쬐이는 일광과 가을 더위의 운무. 둘 다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둘 다 열매를 익힙니다. 햇볕과 이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포도알을 채워 갑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성숙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일하지 않으신다고 오해하지만,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침묵이야말로 가장 밀도 높은 일하심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낫이 등장하는 시점이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입니다. 다 익어 수확만 남은 그 순간에 잘리는 것입니다. 제국이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확신하는 정점에서 단 한 번의 낫질로 정리되는 이 장면은, 앞서 10장 33-34절에서 앗수르의 삼림이 도끼에 찍히던 이미지와 정확히 짝을 이룹니다. 인간의 계획표에는 늘 '조금만 더'가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표에는 정확한 한 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단락의 마지막 말은 심판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7절에서 두려움의 대상이던 그 백성이 예물을 들고 시온에 이릅니다. 심판의 목적이 소멸이 아니라 회복이며, 이방을 정복이 아니라 예배로 이끄는 데 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편입되는 종말론적 성취의 예표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두루마리를 읽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세례를 받는 장면은, 이 7절이 실제로 이루어진 첫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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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합니까. 대부분 배를 띄웁니다. 전화를 걸고, 사람을 만나고, 대안을 찾아 나섭니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분주함이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는 시간을 완전히 밀어내 버릴 때입니다. 벼가 빨리 자라라고 논의 벼 포기를 하나씩 뽑아 올렸다가 결국 뿌리를 상하게 한 송나라 사람의 발묘조장(拔苗助長)은, 오늘 우리의 조급한 신앙과 조급한 목회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이 여름, 한 가지를 연습했으면 합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하루의 여백을 두는 것입니다. 다급한 카카오톡 앞에서, 계약서 앞에서, 자녀의 진로 앞에서 즉답 대신 하루의 침묵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입니다. 우리가 침묵하는 그 하루는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볕과 이슬이 열매를 익히는 시간입니다.
또한 교회의 목표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위기를 넘길 안전망뿐이라면, 그것은 구스의 갈대 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이 향하는 종착지는 안전이 아니라 시온의 예배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업과 계획이 결국 '누가 예배자로 세워지는가'로 수렴하고 있는지, 예산과 일정표를 펴 놓고 정직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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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절 빠른 구름을 타고 임하시는 주님 앞에 무너지는 요새
성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의지하던 세속적 요새의 가짜 영광을 흔드시고, 밖에서 오는 적보다 안에서 무너지는 균열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시는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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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사 19:1). 이어 하나님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게 하십니다. 각기 형제를 치고 각기 이웃을 치며, 성읍이 성읍을, 나라가 나라를 칩니다(2절).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해지고 그들의 계획은 깨어지며,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묻습니다(3절). 마침내 그들은 잔인한 주인의 손에 붙여지고 포학한 왕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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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은 유다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던 정치적·군사적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빠른 구름'을 타고 그 한복판에 강림하시자, 국가 안보의 상징이던 무수한 우상들이 창조주의 현현 앞에서 떨 뿐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 이미지는 시편 104편 3절의 신현현(神顯現) 언어이며, 훗날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와 마태복음 24장 30절의 재림 예언으로 이어지는 성경 전체의 굵은 줄기입니다.
김필회 교수님의 주석적 맥락을 따르면, 애굽에 내려진 첫 번째 심판의 양상은 밖에서 온 침략이 아니라 안에서 곪아 터진 내란과 분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완악함을 그대로 유기하시자 애굽 백성은 서로를 향해 불신과 폭력을 일삼았고, 성읍과 성읍이 반목하여 공동체 자체가 자멸적으로 해체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새로운 재앙을 더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품고 있던 것을 그대로 자라게 두시는 방식으로 임합니다. 로마서 1장이 세 번 반복하는 "내버려 두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3절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에서 '정신'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곧 영이며 숨입니다. 나라의 숨이 빠지는 것입니다. 숨이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생명 없는 것은 어떤 돌파구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상의 정체입니다. 우상은 평온할 때는 그럴듯한 장식이지만,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침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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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가 겪는 아픔의 상당 부분도 밖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박해보다 우리 안의 분열이 더 깊이 우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성읍이 성읍을 치듯 교단이 교단을, 교회가 교회를, 성도가 성도를 치는 동안 세상은 우리를 신뢰할 이유를 하나씩 잃어 갔습니다. 회복의 출발점은 외부 환경의 개선이 아니라, 형제를 치던 손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에서 오는 어려움이 가정을 무너뜨리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은 대개 식탁에서 오간 말 한마디, 오래 쌓인 무시와 냉담입니다. 이번 주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심판의 정반대편에 서는 가장 구체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위기가 왔을 때 우리가 어디로 달려가는지를 정직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통계와 인맥과 요행에 먼저 손을 뻗는다면, 우리는 이름만 다른 마술사와 요술객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권속들은 문제 앞에서 가장 먼저 기도의 자리로 가는 순서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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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0절 나일이 마를 때 드러나는 기둥과 품꾼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모든 자원과 경제적 기반을 주권적으로 주관하시며, 하나님 없는 풍요의 강을 말리심으로 인간 문명의 무기력함을 드러내시는 준엄한 섭리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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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사 19:5).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어 갈대와 부들이 시듭니다(6절). 나일 언덕의 초장과 강가의 곡식 밭이 다 말라 날려가 없어집니다(7절). 어부들은 탄식하고 낚시를 던지는 자마다 슬퍼하며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합니다(8절). 세마포를 만드는 자와 베 짜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9절), 마침내 "그의 기둥이 부서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에 근심하리라"(사 19:10)로 단락이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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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문명의 가장 큰 자랑이자 경제적 생명줄은 해마다 물과 기름진 토사를 실어 나르던 나일강이었습니다. 애굽인에게 나일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라 신이었고 보험이었으며 미래였습니다. 그 강이 마른다는 선언은 곧 그들이 믿던 신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 단락의 놀라운 점은 심판의 묘사가 지극히 구체적인 직업의 목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부, 낚시꾼, 그물 치는 자, 세마포 만드는 자, 베 짜는 자. 예언자는 국가의 몰락을 추상적 구호로 말하지 않고, 오늘 일감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로 말합니다. 특히 10절의 '기둥'과 '품꾼'의 병치는 대단히 예리한 사회학적 진단입니다. 기둥은 나라를 떠받치던 견고한 계층과 제도를 뜻하고, 품꾼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가장 취약한 노동자입니다. 강이 마르자 위층의 기둥이 부서지는 동시에 아래층 품꾼의 생존이 무너집니다. 김필회 교수님의 정리대로, 하나님이 한 번 불어 버리시면 인간이 지켜 내려던 모든 자본과 생존 자원은 순식간에 빈손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 마름을 저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마름은 언제나 참된 수원(水源)을 다시 묻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생수의 근원"이라 부르시고 인간의 우상을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일이 마를 때 비로소 우리는 마르지 않는 강이 어디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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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은 철강과 석유화학이라는 거대한 산업 기반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 굴뚝과 급여 명세서와 통장 잔고를 우리 인생의 영구적인 나일강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그 물줄기를 잠시 줄이실 때, 우리가 자랑하던 기둥이 얼마나 얇은 것이었는지 곧 드러납니다.
본문이 기둥과 품꾼을 나란히 언급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특별한 숙제를 남깁니다. 경제가 어려워질 때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다치는 사람은 언제나 품꾼입니다. 교회가 불황을 말할 때 예산 축소만 이야기하고 일자리를 잃은 청년과 계약이 끊긴 노동자의 얼굴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문을 절반만 읽은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어려운 계절일수록 사례와 행사를 먼저 줄이고 이웃을 돕는 항목은 마지막에 줄이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는 수원을 이중으로 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막에서 자라는 풀은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칠흑 같은 땅속을 끝까지 더듬어 내려간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나일이 넉넉할 때 오히려 말씀과 기도라는 깊은 수맥으로 실뿌리를 내려 두는 것, 그것이 마름의 계절을 견디는 유일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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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15절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심과 비틀거리는 지혜
하나님은 스스로 총명하다 자부하는 인간의 지성을 무력하게 하시고,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참된 분별을 주시는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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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사 19:11). 그들은 스스로를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요 옛 왕들의 후예라 자칭했습니다. 예언자는 묻습니다.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12절).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어졌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으며,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던 그들이 도리어 애굽을 그릇 가게 했습니다(13절). 그 까닭이 14절에 밝혀집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사 19:14). 결국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며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가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사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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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마지막 자랑은 축적된 지성이었습니다. 소안과 놉은 고대 세계의 정치와 학문이 집약된 도시였고, 그 방백들은 스스로 옛 왕들의 후예라 칭하며 책략의 완전무결함을 뽐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십니다. 히브리어 '루아흐 이브임'은 왜곡과 뒤틀림의 영이라는 뜻으로, 판단의 회로 자체가 어긋나 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분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섞으셨으므로'라는 동사는 포도주에 향료를 섞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술 취한 자의 이미지가 따라옵니다. 취한 자는 자기가 취한 줄 모릅니다. 자기 토한 것을 밟고 비틀거리면서도 스스로는 똑바로 걷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언자는 제국의 최고 지성을 이 처참한 그림으로 풍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잠언 1장 7절의 명제가 뒤집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보다 더 신랄하게 그린 문장은 드뭅니다.
15절의 "머리나 꼬리며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는 사회의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를 아우르는 관용어입니다(사 9:14 참조). 지도층의 판단이 흐려지면 그 대가는 언제나 사회 전체가 함께 치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며 십자가의 도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 이사야의 논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세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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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분별의 부족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손안의 기계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려 주지만, 무엇이 옳은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더 빠른 답을 내놓을수록 우리는 더 자주 방향을 잃습니다. 지식은 늘고 지혜는 줄어드는 시대, 본문은 그 원인을 정확히 짚습니다. 하나님을 계산에서 빼면 총명은 곧 비틀거림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강단과 제직회의 언어가 언제부터인가 경영과 성과의 언어로 채워지지는 않았는지, 성경적 판단보다 여론과 전례가 먼저 앞서지는 않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모든 회의는 안건 이전에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는 순서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형식이 아니라, 어지러운 마음이 섞이지 않도록 지키는 실제적인 방어선입니다.
개인에게는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중요한 판단 앞에서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 잠시 멈추어 신뢰할 만한 신앙의 선배 한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홀로 총명한 사람은 반드시 비틀거립니다. 함께 묻는 사람만이 곧게 걷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 한 줄을 일과의 첫머리에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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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정직한 재판장이시며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경영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앗수르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서두르지 않으시고
당신의 처소에서 일광처럼 운무처럼 조용히 감찰하시다가
때가 차매 단 한 번의 낫질로 교만을 꺾으시는
그 엄위한 섭리를 두렵고 떨림으로 고백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침묵을 부재로 오해하지 않게 하시고,
그 고요 속에서 열매가 익어 가고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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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가장 빠른 갈대 배를 물에 띄우며 세상의 동맹을 요새로 삼으려 했던
저희의 조급함과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결정을 서두르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잠잠히 서게 하시고,
분주함으로 마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저희를 건져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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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구름을 타고 임하시는 주님,
밖에서 오는 대적보다 저희 안의 분열이 더 깊이 저희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형제를 치고 이웃을 치던 손을 내려놓게 하시고,
교회와 가정과 일터에서 먼저 손 내미는 화해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위기가 올 때 통계와 인맥과 요행보다
기도의 자리로 먼저 달려가는 순서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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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삶의 나일강이 마를 때에도 낙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눈에 보이는 강이 넉넉할 때 오히려 말씀과 기도의 깊은 수맥으로
실뿌리를 내리는 지혜를 주시고,
어려운 계절에 가장 먼저 다치는 품꾼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게 하시며,
광양사랑의교회가 이웃을 돕는 항목만은 마지막까지 지키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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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총명하다 자부하다가 취한 자처럼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고,
머리부터 갈대까지 모두가 주의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옵소서.
지식은 넘치나 분별은 잃어버린 이 시대 한복판에서
주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임을 삶으로 증언하게 하시고,
마침내 열방이 예물을 들고 시온에 이르는 그 큰 예배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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