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4:24-15:09 온 세계를 향해 정한 경영과 대적을 향해 우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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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을 향한 긴 심판의 노래가 끝나자, 예언은 곧바로 눈앞의 제국 앗수르로 옮겨 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맹세로써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고 선언하시며, 자기 땅에서 앗수르를 파하시고 그 멍에를 이스라엘의 어깨에서 벗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24-27절). 이어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임한 블레셋을 향한 경고는, 자기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는 이들에게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사 14:29)라는 서늘한 경고를 던지며, 참된 피난처는 오직 여호와께서 세우신 시온뿐임을 선포합니다(28-32절). 그리고 15장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진 모압의 애가로 이어집니다. 알과 기르가 하룻밤에 황폐하고, 온 성읍이 머리를 밀고 굵은 베를 두른 채 통곡하는 그 자리에서, 선지자는 뜻밖에도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사 15:5)라고 울먹입니다. 심판의 확실성과 긍휼의 눈물이 한 호흡 안에 들어 있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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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3-23장은 열방을 향한 신탁 모음집입니다. 언뜻 보면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만, 이 신탁들은 하나같이 한 가지를 겨냥합니다. 역사의 운전대를 누가 쥐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주전 8세기 후반, 앗수르 제국은 근동 전체를 삼키고 있었고, 블레셋과 모압을 비롯한 소국들은 반(反)앗수르 동맹을 짜고 흩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죽던 해(주전 715년경)는 그런 요동의 한복판이었습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의 정벌 앞에서 소국들은 유다에게 손을 내밀었고, 유다는 또다시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라는 오래된 유혹 앞에 섰습니다. 이사야는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어느 제국과 손을 잡느냐가 아니라,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하나님의 경영을 신뢰하느냐입니다.
# 김필회 교수는 24절의 선언이 지닌 문법적 무게에 주목합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인간의 결심과 하나님의 계획을 대비시키는 강력한 구문으로, 변덕스럽고 쉽게 좌절되는 인간의 결정과 달리 창조주의 경영(에차)은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필연적으로 성취된다는 뜻이라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경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차는 단순한 생각이나 계획이 아니라, 왕이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내리는 국가적 결정, 곧 반드시 집행되는 확정된 정책을 뜻하는 말입니다. 앗수르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유다를 교정하기 위해 잠시 들려졌다가 내려놓아지는 징계의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사 10:5 참조).
# 문학적으로 보면 이 단락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소리로 짜여 있습니다. 하나는 24-32절의 확신에 찬 선포의 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15장 전체를 채우는 곡소리입니다. 히브리 시인은 이 둘을 나란히 놓아, 하나님의 심판이 냉혹한 처형이 아니라 아파하는 심판임을 드러냅니다. 유대인의 정경 배열에서 열방 신탁이 시온의 노래(사 12장)와 종의 노래(사 40장 이후) 사이에 놓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열방을 심판하시는 그 손이, 마침내는 열방을 품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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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4-27 반드시 성취되는 여호와의 경영, 어깨에서 벗겨지는 멍에
하나님은 역사의 우연이나 제국의 힘에 휘둘리지 않으시고, 친히 생각하시고 경영하신 구원과 심판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시는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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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십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 14:24). 하나님은 앗수르를 자기 땅에서 파하시고 자기 산에서 짓밟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입니다(25절). 그리고 이것이 한 민족만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열방을 향하여 편 손"(26절)임을 밝히신 뒤,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단락을 닫으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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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절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압축적으로 진술한 대목으로 꼽힙니다. 김필회 교수의 관점을 따라 읽으면, 여기서 핵심은 '맹세'라는 형식입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신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걸고 보증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계획을 바꾸지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걸고 정하신 일을 끝까지 밀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확신은 상황의 유리함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서 옵니다.
주목할 단어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멍에'(올)이고 다른 하나는 '펴신 손'입니다. 멍에는 짐승의 목에 얹혀 그 짐승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도구입니다. 제국의 지배란 결국 한 민족의 목에 얹힌 멍에여서, 언제 일하고 무엇을 바치고 어디로 갈지를 대신 결정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 멍에를 '벗기신다'고 하지 않고 '꺾으신다'는 이미지로 말씀하십니다. 부분적인 완화가 아니라 지배 구조 자체의 종결입니다. 한편 '펴신 손'은 이사야가 즐겨 쓰는 심판의 상징인데(사 5:25, 9:12 등), 그 손이 여기서는 열방을 향해 펴집니다. 심판의 손과 구원의 손이 같은 손이라는 것, 이것이 예언서의 신비입니다.
신약은 이 멍에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부르시며 자신의 멍에를 대신 제안하십니다. 제국의 멍에를 꺾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멍에도 지우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멍에로 바꾸어 메우시는 분입니다. 골로새서는 십자가가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골 2:14)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했다고 선언합니다. 앗수르의 멍에가 꺾인 그 자리에서, 마침내 사탄의 권세가 꺾이는 골고다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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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어깨에도 멍에가 얹혀 있습니다. 고물가와 고금리, 줄어드는 일감, 자녀 교육비, 노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목덜미를 누릅니다. 그런데 이 멍에의 무서운 점은 무게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멍에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걸을지를 대신 정해 버립니다. 주일을 지키느냐 마느냐, 헌금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삶의 방향 전체가 '버텨야 한다'는 한 마디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역사의 운전대는 거대 자본이나 강대국, 정치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어깨에서 멍에를 벗기시는 일을 '온 세계를 향한 경영' 안에 넣어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이 상황을 바꿔 주십시오"에서 "주님의 경영이 제 삶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로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이번 주 한 가지만 실천해 보십시오. 내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 하나를 이름 붙여 적고, 그 옆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이라고 써 보는 것입니다. 짐의 크기는 그대로여도, 그 짐을 바라보는 자리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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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8-32 부러진 막대기의 착시, 여호와께서 세우신 시온
성자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 교체와 정세 변화 속에서도 친히 자기 피로 세우신 시온, 곧 교회를 곤고한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로 붙드시는 신실한 보호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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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받은 경고라"(28절)로 시작하는 이 신탁은 블레셋을 향합니다. 선지자는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사 14:29). 블레셋의 뿌리는 기근으로 죽고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할 것이며, 북방에서 오는 연기 곧 앗수르 군대의 진군 앞에 성문이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30-31절). 그러나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선지자는 열방의 사신들에게 건넬 대답 한 마디를 준비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사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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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의 죽음은 블레셋에게 해방의 신호탄처럼 보였습니다. 자기들을 짓누르던 유다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환호가 착시임을 폭로합니다.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고 그 독사의 열매가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듯, 세상의 권력 교체는 더 사나운 압제의 서막일 뿐입니다. 한 폭군이 물러가면 더 유능한 폭군이 오고, 한 시스템이 무너지면 더 정교한 시스템이 들어섭니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여러 번 속여 왔습니다.
여기서 32절의 '세우셨으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사드는 건물의 기초를 놓는다는 뜻입니다. 시온은 사람이 쌓아 올린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수 기초를 놓으신 터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훗날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사 28:16)고 말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 그대로 적용했습니다(벧전 2:6, 롬 9:33). 시온의 기초는 결국 한 인격,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시온에 피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특별합니다. '곤고한 자들'입니다. 강한 자, 준비된 자, 성공한 자가 아니라 세상의 풍파에 밀려 더는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김필회 교수가 강조하듯, 남은 자 신앙의 본질은 숫자의 적음이 아니라 의지할 곳의 없음에 있습니다. 시온은 강자의 요새가 아니라 약자의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첫 자리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를 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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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쉽게 환호하고 지나치게 쉽게 절망합니다. 어떤 선거 결과를 두고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하고, 어떤 결과를 두고는 하나님의 은혜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모든 판단을 '부러진 막대기 앞의 환호'로 부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부러진 뱀의 뿌리와 같아, 언제 독사로 돌변할지 모릅니다.
교회가 붙들 것은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실제로 피난처답습니까? 광양사랑의교회가 곤고한 자들이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인지 물어야 합니다. 실직한 가장이 부끄럼 없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아이를 잃은 부모가 울어도 되는 자리, 외국인 노동자와 홀로 사는 어르신이 밥 한 끼를 편히 드실 수 있는 자리인지 말입니다. 피난처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 자기 약함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공간입니다. 이번 주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가장 곤고한 그 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 그것이 시온을 세우는 일에 동참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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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9 하룻밤에 무너진 성읍, 원수를 위해 우는 선지자의 심장
성령 하나님은 불의를 공의로 심판하시면서도 멸망하는 대적의 고통 앞에서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 안에 원수를 향해 울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부어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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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사 15:1). 모압의 두 거점이 단 하룻밤에 무너집니다. 사람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 울고,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합니다. 머리카락을 밀고 수염을 깎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인 채 지붕에서, 광장에서 애통합니다(2-3절). 헤스본과 엘르알레의 부르짖음이 야하스까지 들리고, 무장한 군인들조차 소리를 높이며 혼이 속에서 떱니다(4절). 그때 예언자의 입에서 뜻밖의 문장이 터져 나옵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사 15:5). 피난민의 행렬이 소알까지 이르고, 루힛 비탈길을 울며 올라가며, 니므림 물은 마르고 풀은 시들었습니다(5-6절).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리고,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합니다(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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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은 승전가가 아니라 애가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오랜 원수였습니다. 발람을 고용해 저주하려 했고(민 22장), 광야 길을 막았으며, 이스라엘이 약해질 때마다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그런 모압이 하룻밤에 무너졌습니다. '하룻밤'이라는 부사가 이 장 전체의 열쇠입니다. 수백 년 쌓아 올린 성읍과 신전과 재산이 해가 한 번 지고 뜨는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세상의 견고함이란 언제나 그 정도의 견고함입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모압의 몰락이 아니라 선지자의 반응입니다. 마땅히 통쾌해야 할 자리에서 그는 웁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브는 감정과 의지와 판단이 함께 자리한 인격의 중심입니다. 즉 이것은 순간의 측은지심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함께 무너지는 공감입니다. 유대 신학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를 하나님의 파토스, 곧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에 공명하는 사람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언자가 우는 것은 그가 마음이 여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눈물의 신학은 신약에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고(눅 19:41),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심판이 진짜인 것처럼 눈물도 진짜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에스겔은 못 박아 말합니다(겔 33:11). 심판의 확실함과 긍휼의 뜨거움이 모순 없이 한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문 앞에 놓인 가장 깊은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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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오늘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에 아프도록 정확한 진단입니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몰락을 기다리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 나와 다른 진영의 교회가 무너질 때 우리는 은근히 통쾌해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이름 붙입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그 통쾌함이 조롱의 언어로 즉시 번역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선지자는 원수의 폐허 앞에서 울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는 것은 죄를 눈감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모압의 교만을 조금도 축소하지 않았습니다(사 16:6). 죄에 대해 단호하면서 사람에 대해 따뜻한 것, 그것이 예언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 반대로 삽니다. 내 편의 죄에는 관대하고 남의 사람에게는 냉혹합니다.
이번 한 주, 아주 구체적인 훈련을 권합니다. 뉴스를 보다가 누군가의 몰락 소식에 마음이 시원해지는 순간이 오거든,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넣어 한 문장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저 사람의 고통 앞에서 제가 웃지 않게 하소서." 광양사랑의교회 믿음의 권속들이 세상을 향해 정죄의 칼날만 벼릴 것이 아니라,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이웃을 보며 함께 통곡하는 거룩한 연민을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이 숨을 곳이 됩니다. 참된 제자도는 이웃의 비극을 진심으로 아파하며 그들을 십자가의 긍휼로 끌어안는 눈물의 헌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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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만물을 뜻대로 경영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생각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경영하신 것을 결코 돌이키지 않으시는
그 신실하심 앞에 오늘도 저희가 무릎을 꿇습니다.
거대한 세상의 힘 앞에서 작아지는 저희 어깨에서
스스로 지고 있던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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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막대기를 보고 성급히 환호하며
세상의 정세와 권력의 이동에 마음을 걸었던
저희의 얄팍하고 조급한 믿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친히 기초를 놓으신 시온,
곧 주님의 몸 된 교회만이 저희의 참된 피난처임을 믿습니다.
저희 광양사랑의교회가 곤고한 자들이 숨을 고르는 자리,
약한 사람이 자기 약함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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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모압의 폐허 앞에서
조롱 대신 눈물을 택하셨던 선지자의 마음을
저희 심령에도 부어 주옵소서.
남의 몰락에 마음이 시원해지는 그 순간마다
저희를 멈추어 세우시고,
죽어가는 영혼과 이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함께 우는 제자로 살게 하옵소서.
심판의 확실하심과 긍휼의 뜨거우심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음을 오늘도 배우게 하시고,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다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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