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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8:01-13 시드는 화관과 거절된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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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 시대의 신탁들이 시작되는 자리에, 이미 무너진 북왕국 이야기가 먼저 놓입니다. 언덕 위에 화관처럼 얹혀 있던 사마리아는 술에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요 쇠잔해 가는 꽃이어서, 강하고 힘 있는 자의 손에 땅바닥으로 던져지고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순식간에 삼켜집니다(1-4절). 그러나 그 날에 여호와께서 친히 남은 자의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겠다는 약속이 뒤따릅니다(5-6절). 시선은 곧 유다로 돌아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마저 독주에 비틀거려 상마다 토한 것이 가득하고(7-8절),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젖먹이 옹알이라 조롱합니다(9-10절). 그리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말이 심판으로 임합니다. 일찍이 이것이 너희 안식이라 하셨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11-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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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부터 이사야서는 새로운 큰 단락에 들어섭니다. 김필회 교수는 28장에서 31장까지 수집된 예언들이 주로 주전 722년과 721년 사이 북왕국이 몰락한 뒤 유다 왕 히스기야가 통치할 때에 주어진 것들이라고 정리합니다. 앞선 시리아·에브라임 위기 때에 아하스 왕은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구원 예언을 거절하고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의존하여 왕국의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가 씌워 놓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는 애굽에 의존하는 반앗수르 노선을 선택합니다. 이사야는 동일한 신학적 입장에서 히스기야의 정책을 비판합니다. 다윗 왕조의 신학적 초석인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을 의지한다는 점에서, 예언자의 눈에 히스기야도 아하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런데 히스기야 시대의 신탁들 맨 앞에 왜 이미 지나간 사마리아 이야기가 놓였을까요. 김필회 교수는 이것이 의도적인 배치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선포할 무렵 사마리아에 대한 예언은 이미 성취되어 있었습니다. 곧 확인된 예언입니다. 확인된 예언을 앞머리에 두면, 뒤이어 나오는 예루살렘을 향한 고발과 심판 선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임을 청중이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동시에 이 배치는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강대국에 의존하면 유다의 운명도 에브라임의 운명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경고가, 무너진 이웃의 잔해 위에 세워집니다.

# 1절에서 6절과 7절에서 13절을 하나로 묶는 끈은 '술 취함'이라는 모티브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7절 첫머리의 '그리하여도 이들은'이 유다에 관한 말씀을 에브라임을 향한 책망과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이자들 또한'이라는 뜻입니다. 술에 취한 자들이 다스린다는 점에서 유다는 에브라임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취한 대상이 달랐을 뿐입니다. 사마리아의 정치가들은 권력과 부에 취했고,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선지자는 종교적 자만과 전문가의 자존심에 취했습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에서의 영광과 부귀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차려야 할 상 위에 토사물과 배설물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뼈아프게 지적합니다.

# 지리적 배경도 본문의 이미지를 살려 줍니다. 오므리 왕은 세멜에게서 에브라임 지역의 고립된 산지를 은 두 달란트에 사서 원소유주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부르고 왕조의 도성으로 삼았습니다(왕상 16:24). 그의 아들 아합은 그곳에 왕궁과 바알 사당을 지었습니다(왕상 16:32).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땅이 머리에 화관 하나를 얹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그 도성의 지형 자체를 비유로 삼습니다. 아름다우나 시들 수밖에 없는 꽃으로 엮은 관, 그것이 사마리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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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시드는 화관과 참된 면류관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머리에 얹은 화관을 땅에 던지시고, 남은 자에게는 친히 시들지 않는 면류관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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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화 있을진저"라는 탄식으로 열립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1절). 한 절 안에 사마리아를 가리키는 표현이 세 겹으로 쌓입니다. 교만한 면류관, 쇠잔해 가는 꽃,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의 성입니다.

이어 심판의 도구가 등장합니다.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2절). 그리고 그 결과가 두 번 반복됩니다. 면류관이 발에 밟히고(3절), 그 영화는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4절)라고 선언됩니다.

그러나 신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5절이 '그 날에'로 새로 시작합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5절). 그리고 그 면류관은 장식이 아니라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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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으로 옮겨진 말은 문자적으로는 '높은'을 뜻한다고 김필회 교수는 설명합니다.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에서 나는 풍요로운 소출을 독점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술에 빠진 자'는 사마리아의 정치 지도자들로, 권력과 부가 가져다주는 오만과 사치에 빠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자랑하는 면류관은 시들어 버린 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아직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속으로는 이미 시들어 죽어 가는 꽃입니다. 사마리아의 멸망이 필연임을 이 한 장면이 다 말해 줍니다.

2절의 '강하고 힘 있는 자'의 정체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문맥과 표현으로 보아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를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분의 진노의 막대기입니다(10:5-6). 우박은 애굽에 내린 재앙으로 잘 알려져 있고(출 9-10장) 신현을 함축하기도 하며, 광풍은 신적 심판과 관련해 사용되고, 넘쳐흐르는 거대한 물은 거침없이 침략해 들어오는 앗수르 군대를 가리킵니다(8:6 이하; 17:12-13).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에브라임이 자랑하던 면류관을 땅바닥에 내던져 버립니다.

1절과 4절의 두 비유는 시간의 결이 다릅니다. 김필회 교수는 시들어 버린 꽃의 비유가 약간의 시간적 간격을 상정하는 데 비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의 비유는 즉각성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기름진 골짜기의 사마리아는 수확 전에 익은 첫 무화과처럼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도성이었습니다. 먼저 본 사람이 냉큼 따먹듯이, 누구나 욕심낼 만큼 탐스러웠다는 것입니다(호 9:10; 미 7:1). 그러나 처음 익은 무화과는 흔들기만 해도 쉬 떨어집니다(나 3:12).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던 성이 실은 그렇게 쉽게 떨어질 열매였습니다.

5절과 6절은 앞의 신탁을 미래의 관점에서 재해석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 '그 날'이 남은 자들의 회복과 사마리아의 멸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두 사건의 대조적 성격을 보여 주는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엮어 쓴 화관은 시들지만, 여호와께서 친히 화관이 되시면 그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습니다. 김근주 교수도 이 대목을 이사야 4:2의 '여호와의 싹'과 연결하여, 하나님이야말로 그 백성의 남은 자에게 진정한 영광의 면류관이 되신다고 읽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더 이상 물질적 풍요나 부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그분만 자랑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6절의 '판결하는 영'은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 백성에게 미치는 적극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 영을 주셔서 재판관이 공의대로 재판하고 용사가 용감하게 맞서 싸웁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자취를 감추었던 미슈파트, 곧 공정한 판결이 구원 공동체에서 그 기능을 회복합니다. 판결과 힘은 구원 시대에 여호와께서 주시는 선물에 속합니다(3:25; 11:2; 30:15). 신약은 이 약속의 성취를 그리스도에게서 봅니다. 시들지 않는 면류관은 결국 "생명의 면류관"(약 1:12),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벧전 5:4)으로 이어지고, 그 관을 우리 머리에 씌우시는 분은 몸소 가시관을 쓰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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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화관 하나씩을 머리에 얹고 삽니다. 직함일 수도 있고 자녀의 성취일 수도 있고 신앙의 경력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화관이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꽃이라는 데 있습니다. 꽃으로 엮은 관은 반드시 시듭니다. 오늘 아름다울수록 내일의 시듦은 더 눈에 띕니다. 사마리아의 비극은 화관을 쓴 것이 아니라, 시드는 것을 시들지 않는 것으로 착각한 데 있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이 관은 꽃인가, 아니면 나에게 씌워진 은혜인가.

한국교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언덕 위의 성을 쌓는 데 능했습니다. 큰 건물, 많은 숫자,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화관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화관이 시들기 시작한 지금, 우리는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시드는 것이 시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상한 것은 시들지 않으리라 믿었던 우리의 도취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화관을 다시 화려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면류관이 되신다는 5절의 약속 앞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남은 자는 화관을 잃은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가정과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과와 평판이 무너질 때 우리는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히려 진짜 면류관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이번 주에 한 가지만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지금 내가 가장 잃기 두려워하는 것 하나를 적어 보고, 그 옆에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라고 나란히 써 보십시오. 두려움의 목록 옆에 약속을 놓아 보는 것만으로도, 무엇이 꽃이고 무엇이 반석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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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절 비틀거리는 입, 더럽혀진 상

성자 하나님은 거룩한 상에 토한 것이 가득한 자리에서도 그 상을 떠나지 않으시고, 친히 정결한 제사장이 되어 새로운 상을 차리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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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은 시선을 북에서 남으로 돌립니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7절). 한 절 안에서 '독주'가 세 번, '비틀거리며'가 두 번 반복됩니다. 문장 자체가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8절에 한 장면으로 압축됩니다.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8절). 예언자는 성전 뜰의 연회석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자들의 상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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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개역개정이 7절과 8절을 앞 단락에 붙여 놓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의 '워감 엘레', 곧 '이자들 또한'으로 시작하는 7절이 새로운 단락의 시작임이 분명하다고 지적합니다. 앞 단락이 에브라임의 정치 지도자들을 고발했다면, 여기서는 고발의 대상이 제사장과 선지자로 바뀝니다. 그리고 12절이 이들이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선지자임을 보여 줍니다. 왕궁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성전 소속의 종교 전문가들입니다.

레위기 10:8-9은 아론의 후예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고 율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원래 선지자는 신탁과 환상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임무를, 제사장은 제의를 주관할 뿐 아니라 율법을 가르치고 법률적 결정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술에 의존하여 환상을 보고, 술에 취한 채로 판결을 내립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의 무게를 이렇게 짚습니다. 선지자의 잘못된 선포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고, 제사장의 잘못된 결정은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도 있기에 이들에게는 냉정함과 지혜로움이 요청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취함'을 문자적인 알코올 문제로만 좁게 읽으면 본문의 칼날이 무뎌집니다. 김근주 교수는 에브라임이 취해 있다는 것이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들의 힘과 아름다움에만 도취되어 있음을 뜻한다고 볼 때, 유다의 제사장과 선지자가 취해 있다는 것도 이들이 사람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29:9).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이야기하고 이상을 풀이한다고 하지만, 이사야가 보기에 그것은 먹은 것을 토해 낸 것, 배설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면서도 이 땅에서의 영광과 부귀에 취하여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차려야 할 상 위에 토사물을 가득 채우는 일이 비단 그때만 있었던 일은 아닐 것입니다.

8절의 상은 신약에서 뒤집힙니다. 토한 것으로 뒤덮인 상 앞에서 예언자는 절망했지만, 하나님은 그 상을 엎어 버리지 않으시고 훗날 한 다락방에서 새로운 상을 차리셨습니다. 배신할 제자들과 함께 앉으신 그 상에서 주님은 떡을 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전 11:24)라고 하셨습니다. 깨끗한 곳이 없던 상 위에 스스로 깨끗한 제물이 되어 누우신 분, 그분이 우리의 참 제사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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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 앞에서 가장 먼저 떨어야 할 사람은 설교자입니다. 저를 포함해 말씀을 다루는 자리에 선 이들이 무엇에 취해 있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반응에 취하고, 인정에 취하고, 스스로의 언변에 취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한 줄 모릅니다. 그것이 취함의 가장 무서운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나를 깨워 줄 정직한 사람과, 나를 멈춰 세울 안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한국 사회는 도취의 기술이 대단히 정교해진 시대입니다. 손안의 화면은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비틀거리게 만들고, 알고리즘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상에 올려 줍니다. 그 상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분별력이 마비됩니다. 무엇이 옳은지가 아니라 무엇이 시원한지로 판단하게 되고, 사실 확인 없이 분노를 전달하게 됩니다. 교회 안의 대화가 세상의 진영 논리와 구별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8절의 상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 하루를 정해 저녁 식탁 위에서 휴대전화를 치워 보십시오. 그리고 그 상에서 오간 말이 어떠했는지 돌아보십시오. 상은 무엇을 먹느냐보다 무엇으로 채워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집의 상, 우리 교회의 식탁, 우리가 나누는 단톡방의 말들이 깨끗한 곳 하나 없는 상이 되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제사장 직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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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옹알이라 조롱당한 말씀

성령 하나님은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비웃는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여전히 진리를 가르치시며, 조롱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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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과 10절은 화자가 바뀝니다. 고발당한 자들이 예언자에게 되받아치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9절).

그리고 10절은 아예 예언자의 말투를 흉내 냅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10절). 히브리어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기면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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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이 9절 첫머리에 "그들이 이르기를"을 넣은 것은 마소라 본문에 없는 첨가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첨가가 화자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며, 새번역은 아예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라고 옮겼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식을 가르치는 일은 제사장의 고유한 직무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선지자의 고유한 임무입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이 보기에, 감히 자신들을 가르치려 드는 이사야는 주제넘은 사람이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들이 종교 문제의 전문가로서 이사야의 선포와 태도에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고 봅니다.

10절의 조롱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이사야가 마치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하듯 유치하게 떠든다는 비웃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말을 '어버버' 하는 소리로 흉내 내어 아예 뜻 없는 소음으로 일축하는 것입니다. 김근주 교수는 '차브'가 명령을, '카브'가 측량줄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선포를 마치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여기에나 저기에나 이래라저래라 요구하고 명령하는 것,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시시콜콜 지적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풀이합니다. 김필회 교수도 이들이 보기에 이사야의 선포는 아이들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기에 적당한 반복적인 주문 같은 의미 없는 말일 뿐이었으며, 언제나 그렇고 그런 질책과 심판의 소리이거나 일관성 없이 심판을 떠들다 다시 구원을 떠드는 소리로 들렸다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문가의 함정을 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에 이런 경고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전문가이긴 하지만 전문가로서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단순한 말씀 앞에서 감동하는 능력은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자세가 들어섭니다. 데이비드 젝맨은 이사야의 논증이 단순하고 심지어 유치해 보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 단순함이 하나님의 방식임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훗날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라는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유치하다고 비웃음당한 그 단순한 말씀이 결국 십자가의 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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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뻔하게 들리기 시작할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설교의 다음 문장을 예측합니다. 그리고 예측되는 순간 마음의 문이 닫힙니다. 젖 떨어진 아이에게나 할 말이라는 조롱은 사실 지금도 우리 마음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나누라는 말이 유치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말씀이 낡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 말씀 앞에서 이미 취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자주 무거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한 복음이 시시하게 여겨지니 더 자극적인 것, 더 새로운 것, 더 성공적인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하나와 누룩 조금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이라는 조롱의 말이 얄궂게도 하나님의 교육 방식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조금씩, 반복해서, 참으시며 가르치십니다. 조롱하는 자들은 그것을 지루함이라 불렀지만 성경은 그것을 오래 참으심이라 부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적용은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향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일은 지루하고 반복적입니다. 같은 말을 백 번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유치하다 여기지 않는 것이 이 본문의 적용입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는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이번 주에는 가장 익숙한 말씀 한 구절을 골라 처음 듣는 사람처럼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익숙함이 조롱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일, 그것이 오늘의 영적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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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3절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거절된 쉼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안식과 상쾌함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며, 그 쉼을 곤비한 이웃에게 흘려보내라고 명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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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에 대한 응답이 11절에 옵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11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비웃던 자들이 정말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본문의 심장이 드러납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12절). 심판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듣지 않은 것입니다.

13절은 10절의 조롱을 그대로 되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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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심판 선포를 잡소리로 조롱하는 자들에게 이사야는 이방 민족들에 의한 멸망을 선언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이사야의 선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이 백성이 더듬거리는 입술과 낯선 혀, 곧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언어를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앗수르 사람들의 말은 의미 없는 음절에 불과했습니다. 조롱이 심판의 형식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다루면서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한 것도(고전 14:21) 같은 맥락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은사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표징이며, 교회의 언어는 언제나 알아듣게 하는 언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은 이 본문 전체에서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픈 구절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인 안식과 상쾌함을 주기 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안식처와 쉼터로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 긴 여정으로 지친 사람들은 마침내 그 땅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왕상 8:56). 그분 자신도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으셨습니다(왕상 8:13). 그분이 거기 거하시기에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쉴 곳이 됩니다(32:18). 그런데 그분께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특히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누구보다 그 명령에 충실했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상쾌함'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마르게아는 지친 몸이 숨을 돌리는 자리, 곧 쉼터를 뜻합니다. 안식이 시간이라면 상쾌함은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쉴 시간과 쉴 자리를 함께 주기 원하셨습니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명령의 방향입니다. 쉬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십니다. 받은 쉼은 반드시 흘러가야 하는 쉼입니다. 안식일 계명이 소와 나귀와 종과 나그네까지 숨을 돌리게 하라는 데서 완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신 5:14). 내가 쉬어야 내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도 숨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안식을 거절하는 것은 단지 게으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웃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 됩니다.

13절의 심판은 조롱한 그대로 임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13절 전반부가 10절에, 후반부가 11절에 연결된다고 정리합니다. 이사야의 선포를 젖 뗀 아이에게나 적합한 가르침이라 조롱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로 그들이 생각했던 그 모양으로 임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잡소리로 간주했던 자들은 이제 진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정복자의 언어를 듣게 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넘어지고 걸려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 무거운 결말 앞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한 음성을 함께 들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스라엘이 듣지 않았던 그 초대를, 하나님은 아들의 입을 통해 다시 하셨습니다. 12절에서 거절된 쉼터가 십자가 앞에서 다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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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죄는 아마도 쉬지 않는 것일지 모릅니다. 쉬지 않는 것이 성실로 포장되고, 소진되는 것이 헌신으로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안식을 거절하는 것을 불순종이라 부릅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는 짧은 문장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쉼터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일 수 있습니다. 내가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의 밑바닥에는, 결국 내가 이 세계를 붙들고 있다는 착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12절은 우리를 개인의 휴식 너머로 데려갑니다.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는 명령은 사회적 명령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곤비한 자는 누구입니까.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는 배달 노동자, 쉬는 날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돌봄 노동자, 폭염 속 야외 현장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아프다 말하지 못한 채 버티는 우리 곁의 이름들입니다. 교회가 이들에게 숨 돌릴 자리 하나를 내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12절의 제사장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당 문을 열어 두는 일, 어려운 이의 하루치 짐을 대신 져 주는 일, 성도의 쉼을 존중하는 교회 일정, 이런 것들이 다 이 명령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에 세 가지를 권합니다. 첫째, 이번 주에 하루 저녁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확보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여기십시오. 둘째, 내 곁에서 가장 지쳐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짐 하나를 실제로 덜어 주십시오. 문자 한 통, 식사 한 끼, 대신 서 준 자리 하나면 충분합니다. 셋째, 우리 교회의 봉사 일정이 누군가의 안식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점검합시다. 안식은 개인의 사치가 아니라 공동체가 지켜 주어야 할 언약의 질서입니다. 그 질서를 회복할 때, 우리는 시드는 화관을 붙드는 대신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쓰신 분의 그늘에서 함께 숨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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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시들지 않는 면류관 되신 주님,

우리가 스스로 엮어 머리에 얹은 화관을

오래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높은 곳에 세운 성이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었고

기름진 골짜기의 소출이 영원하리라 여겼습니다.

이제 그 꽃이 시드는 것을 보며

주님만이 남은 자의 영광이심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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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상을 지키시는 주님,

말씀을 다루는 자리에 선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인정에 취하고 반응에 취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취한 줄 모르는

저희를 깨워 주소서.

저희의 식탁과 저희의 말이

토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차려 주신 상 앞에 겸손히 앉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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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주님,

익숙함이 조롱이 되지 않게 하소서.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참고 반복하시는 그 오래 참으심을

지루함이라 부르지 않게 하시고

아이처럼 다시 듣는 귀를 주소서.

저희가 전문가의 자리에서 내려와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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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이 되시고 쉼터가 되시는 주님,

이것이 너희 안식이라 하신 그 음성을

듣지 않고 지나온 날들을 용서하소서.

멈추지 못하는 것이 저희의 성실이 아니라

저희의 두려움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서 숨을 돌리게 하시고

그 숨을 곤비한 이웃에게 나누게 하소서.

저희 교회가 지친 이들의 쉼터가 되게 하시고

저희 삶이 누군가의 숨 돌릴 자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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