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사야 19:16-20:06 떨던 애굽에 제단을 세우시고 벗은 발로 헛된 의지를 벗기시는 하나님

*

애굽에 대한 경고(19:1-15)에 이어지는 이 단락은 "그 날에"로 시작하는 다섯 개의 신탁(16-17절, 18절, 19-22절, 23절, 24-25절)과, 다시 현실로 돌아온 한 편의 상징 행위(20:1-6)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애굽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 앞에서 부녀와 같이 떨고, 유다 땅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합니다(16-17절). 그러나 그 두려움은 끝이 아닙니다.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생기고(18절), 애굽 땅 중앙에 제단이, 그 변경에 기둥이 서며, 애굽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고, 치시고는 고쳐 주십니다(19-22절). 마침내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열려 두 제국이 함께 경배하고(23절), 이스라엘이 그 둘과 더불어 셋이 되어 세계 중에 복이 됩니다(24-25절). 그런데 20장은 이 찬란한 환상에서 독자를 붙들어 다시 오늘의 현실로 내려놓습니다. 앗수르의 사르곤이 아스돗을 치던 해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신을 벗고 다니게 하십니다. 삼 년 동안의 그 벗은 몸과 벗은 발은, 애굽과 구스가 포로로 끌려갈 때 볼기까지 드러낸 채 수치를 당할 일에 대한 예표와 기적이었습니다(20:1-4). 그 날에 해변 주민은 "우리가 믿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고 탄식합니다(20:5-6).

*

# 주전 8세기 말, 유다는 앗수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살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살길로 지목된 나라가 애굽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구스(에디오피아)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고, 블레셋의 아스돗이 앞장서서 반앗수르 동맹을 꾸리며 유다에게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주전 711년, 앗수르 왕 사르곤 2세가 보낸 군대 장관 다르단이 아스돗을 함락시키면서 그 동맹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사야 20장은 바로 그 해의 사건을 시간 표제로 삼고 있습니다. 즉 이 본문은 책상 위에서 쓰인 이론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한복판에서 몸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 문학적으로 19-20장은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19:16-25는 '그 날에'로 시작하는 다섯 개의 산문 신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애굽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첫 번째 신탁(16-17절)은 앞 단락(1-15절)의 종결부로 읽을 수 있고, 나머지 네 신탁은 심판을 넘어 애굽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봅니다. 종말에는 애굽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던 앗수르까지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함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존 오스월트도 같은 흐름을 지적합니다. 19:1-15가 애굽의 멸망을, 19:16-25가 심판 이후 애굽의 예배를, 20:1-6이 다시 현재의 애굽으로 돌아와 그 멸망의 확실성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먼 미래의 희망과 가까운 미래의 심판을 교차시키는 것은 이사야 예언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 신학적으로 이 본문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보편 구원의 지평을 열어 보입니다. 출애굽의 압제자였던 애굽, 북이스라엘을 삼킨 앗수르가 "내 백성", "내 손으로 지은" 나라로 불립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정복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제국을 잇는 연결점이 되어 세계 한가운데서 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약속이 여기서 제국의 규모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20장은 이 꿈이 현실 도피가 아님을 못 박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꿈을 붙드는 사람은 오늘 자기가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부터 정직하게 벗어야 합니다.

*

# 19:16-17 흔드시는 손 앞에서 떠는 애굽

하나님은 제국의 지혜가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손을 들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사 19:16). 애굽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떱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은 앗수르의 병거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입니다. 이어 17절은 유다의 땅이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작은 나라 유다가 군사적으로 애굽을 위협할 리는 없습니다. 다만 그 땅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 그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애굽은 떱니다.

.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여기서 애굽을 여자에 비긴 것은 여자가 특별히 두려움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도 출산할 때의 극심한 두려움과 관련된 표현으로, 하나님이 애굽의 역사에 개입하실 때 사람들이 빠지게 될 극도의 공포를 나타냅니다. 과거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키셨던 그 손이 다시 애굽 위로 흔들립니다. 17절의 "정하신 계획"은 히브리어로 앞 단락의 "모략"(19:11), "정하신 뜻"(19:12)과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지혜로 이름을 떨치던 애굽의 모사꾼들이 세운 계획과, 만군의 여호와께서 세우신 계획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읽어 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모르는 지혜는 결국 지혜가 아닙니다. 유다 땅이 애굽의 두려움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유다에서 이미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았기에, 애굽은 자기들에게 작정된 그 계획을 짐작하고 떠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하고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세상의 지혜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자리에서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

오늘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의 목록을 적어 보면,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금리와 환율,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 교인 수와 헌금 통계 앞에서 우리는 떱니다. 그러나 정작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 앞에서는 좀처럼 떨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방향이 뒤바뀐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회복해야 할 첫 자리는 바로 이 두려움의 재조정입니다. 세상의 지표를 읽는 눈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읽는 눈이 먼저 열려야 합니다. 이번 주 가정예배와 소그룹 나눔에서 "요즘 나를 가장 무섭게 하는 것"을 솔직하게 적어 놓고, 그 옆에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를 나란히 적어 보십시오. 두려움의 목록이 기도의 목록으로 바뀌는 자리에서 신앙은 다시 시작됩니다.

*

# 19:18-22 애굽 땅 한가운데 세워질 제단

하님은 압제자였던 민족에게도 구원자를 보내시어, 치시고는 반드시 고치시는 분입니다.

.

심판의 언어가 갑자기 회복의 언어로 돌아섭니다.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생기고, 그중 하나는 "멸망의 성읍"이라 불립니다(18절). 애굽 땅 중앙에는 제단이, 그 변경에는 기둥이 섭니다(19절). 그것이 징조와 증거가 되어, 압박하는 자들 때문에 부르짖는 애굽에게 하나님이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 건지십니다(20절).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드리며 서원하고 그대로 행합니다(21절). 그리고 22절이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9:22).

.

'가나안 방언'은 히브리어를 가리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것을 애굽에 흩어져 살던 유대 공동체보다는 여호와께로 개종한 애굽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인 '멸망(헤레스)의 성읍'은 태양신 제의의 중심지였던 헬리오폴리스, 곧 '태양(헤레스)의 성읍'을 히브리어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해 뒤틀어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태양신을 섬기던 도시가 심판을 받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살게 된다는 통렬한 언어유희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19-22절의 어휘가 출애굽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한다는 사실입니다. 압박하는 자들, 부르짖음, 구원자를 보내심, 건지심. 한때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당하던 일을 이제 애굽이 당하고, 한때 이스라엘이 받았던 구원을 이제 애굽이 받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애굽이 제2의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의 '치시고는 고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하시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매는 파괴가 아니라 교육이며, 그분의 심판은 돌아오게 하려는 심판입니다. 이 약속의 종착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7), 그분은 원수 되었던 것을 없이 하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애굽 땅 중앙의 제단은 결국 골고다 언덕을 향해 세워진 이정표였습니다.

.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이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이름이 하나님의 예배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우리 편'의 경계선을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그어 왔습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신앙까지 의심하고, 교단이 다르면 이단의 냄새를 맡고, 세대가 다르면 언어를 닫아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 땅 한가운데에 제단을 세우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세우는 제단도 교회 안이 아니라 '애굽 땅 중앙'에, 곧 우리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자리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지역에서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외국인 노동자들의 기숙사, 요양병원의 복도, 산업단지의 야간 근무조, 학교 밖 청소년들의 골목입니다. 이번 달 중보기도 시간에 '내가 도무지 축복하고 싶지 않은 이름' 하나를 정해 놓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축복해 보십시오. 치시고는 고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지점이 거기입니다.

*

# 19:23-25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

하나님은 원수 되었던 민족들을 한 예배 자리로 부르시어 온 세계를 복의 자리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사 19:23). 그리고 24-25절이 이 신탁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되어 세계 중에 복이 되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축복하십니다.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

이 짧은 세 절은 구약에서 가장 대담한 상상입니다. 애굽에서 앗수르로 가는 길은 본래 군대가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는 병거 바퀴 자국과 포로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지적처럼, 약탈과 점령을 위해 다니던 길이 평화의 길로 바뀌고, 국가적 이해관계와 민족적 갈등이 여호와 신앙에 의해 완전히 극복되는 것입니다. 24절은 "그 날에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와 함께 세 번째가 되어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복이 되리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 '세 번째'는 서열이 아니라 대등함을 뜻합니다. 근동의 약소국 이스라엘이 두 절대 강국과 나란히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특권이 폐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나의 기업'으로 불리며, 지정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두 제국을 잇는 중심점이 됩니다. 여기서 김필회 교수는 목회적으로 중요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예언이었고, 그러므로 교회가 너무 현실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꿈을 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황당해 보이던 꿈은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를 통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서가 선포하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는 이사야의 이 꿈에 대한 신약의 응답입니다.

.

우리 시대의 '애굽과 앗수르'는 무엇입니까. 남과 북, 한국과 일본, 진보와 보수,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원주민과 이주민입니다. 이 사이에 놓인 것은 대로가 아니라 철조망과 댓글창의 욕설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감당할 몫은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목청을 높이는 일이 아니라, 양쪽이 함께 무릎 꿇을 수 있는 '세 번째 자리'가 되어 주는 일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지역에서 그런 자리를 이미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카페와 그림책 모임과 독서 모임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상에 앉는 경험이 곧 대로를 놓는 일입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꿈을 꾸되 값싼 낙관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몰라도 꿀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기도 제목에 '통일'과 '화해'와 '이웃 종교인의 구원'이 남아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꿈이 사라진 교회는 이미 늙은 교회입니다.

*

# 20:1-6 벗은 몸과 벗은 발, 삼 년의 표적

성령 하나님은 예언자의 몸을 통해 말씀을 살아 있는 표적으로 삼으시고, 우리가 붙든 헛된 지팡이를 벗기시는 분입니다.

.

장면이 급전환합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이르러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라"(사 20:1).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시고, 이사야는 그대로 순종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닙니다(2절). 하나님은 그것이 삼 년 동안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와 기적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3절).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수치를 보일 것입니다(4절). 그리고 5-6절, 애굽을 믿었던 이들의 탄식이 이 단락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

'벗은 몸'이 완전한 나체를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오스월트는 히브리어가 완전한 노출뿐 아니라 겉옷을 벗고 속옷만 걸친 부분적인 노출도 의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당시 사회에서는 겉옷을 벗은 것만으로도 나체와 다름없이 취급되었으니, 이사야가 겪은 수치는 조금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삼 년'도 문자적인 36개월이라기보다, 아스돗 공략이 시작된 주전 713년 무렵부터 함락된 711년까지 걸친 기간을 셈한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간의 길이가 아니라, 예언자가 자기 몸을 말씀의 자리로 내어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나의 종"이라 부르십니다. 이 칭호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갈렙과 욥에게 붙었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 불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빌 2:7) 십자가 위에서 옷 벗김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의 벗은 몸은 장차 벌거벗겨진 채 달리실 참 종의 그림자였습니다. 오스월트가 지적하듯 이 단락의 마지막 두 절에서 '바라던'과 '믿던'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13-23장 전체의 중심 문제가 여호와 대신 열방을 신뢰하는 그릇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앞 단락에서 애굽은 하나님께 돌아올 미래의 예배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애굽은 나를 구원할 수 없는 벌거벗은 나라입니다. 미래의 애굽을 축복하는 것과 오늘의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

신앙의 위기는 대개 무엇을 믿느냐보다 무엇을 함께 믿느냐에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보험과 부동산과 인맥과 학벌을 믿습니다. 문제는 그 '동시에'입니다.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고 다닌 것은 유다에게 "네가 붙든 것을 미리 벗어 보라"는 몸의 설교였습니다. 언젠가 벗겨질 것이라면 지금 스스로 내려놓는 편이 낫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신뢰를 잃은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무엇에 의지하는지를 봅니다. 건물과 숫자와 정치적 영향력에 기대는 모습이 드러날 때, 우리의 설교는 이미 벌거벗겨진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각자의 '애굽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것이 무너져도 내 신앙이 무너지지 않을 것인지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 정도는 실제로 손에서 놓아 보십시오. 벗은 발로 걷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내신 대로를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

# 거둠의 기도

역사를 손에 쥐고 흔드시는 주님,

우리는 세상의 지표 앞에서는 떨면서

주님의 흔드시는 손 앞에서는 무디었습니다.

두려움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고

주님의 계획을 읽는 눈을 열어 주소서.

.

치시고는 고치시는 주님,

우리가 미워하던 이름 위에

주님이 제단을 세우시는 것을 보게 하소서.

우리 마음의 경계선을 지우시고

가장 가기 싫은 자리로 우리를 보내소서.

.

원수를 형제로 바꾸시는 주님,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를 꿈꾸게 하소서.

갈라진 이 땅과 이 세대 한가운데서

양쪽이 함께 무릎 꿇을 세 번째 자리가 되게 하시고

값싼 낙관이 아닌 주님의 꿈을 품게 하소서.

.

벗기시는 주님,

우리가 붙들고 있는 헛된 지팡이를 보게 하시고

빼앗기기 전에 스스로 내려놓게 하소서.

벗은 발로도 부끄럽지 않은 믿음을 주시고

주님이 내신 그 길을 끝까지 걷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29 이사야 21:01-17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평화의길벗 2026.08.07 24
» 이사야 19:16-20:06 떨던 애굽에 제단을 세우시고 벗은 발로 헛된 의지를 벗기시는 하나님 평화의길벗 2026.08.06 23
1227 이사야 18:01-19:15 조용히 감찰하시는 처소와 마르는 나일강, 그리고 시온으로 모이는 열방 평화의길벗 2026.08.05 28
1226 이사야 17:01-14 구원의 반석을 잊은 자들의 헛된 요새와 슬픔의 수확 열방의 소동을 한 번의 꾸짖음으로 흩으시고 남은 자를 지으신 이께로 돌이키시는 여호와 평화의길벗 2026.08.04 27
1225 이사야 16:01-14 쫓겨난 자를 숨기는 대낮의 그늘로 부르시는 하나님과 헛된 자랑 끝에 무너지는 모압의 통곡 평화의길벗 2026.08.03 25
1224 이사야 14:24-15:09 온 세계를 향해 정한 경영과 대적을 향해 우는 눈물 평화의길벗 2026.08.02 5
1223 이사야 14:01-23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긍휼로 다시 택하시는 하나님과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지는 교만의 종착점 평화의길벗 2026.08.01 46
1222 이사야 13:01-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검열하시는 군대와 제국의 화려한 궁전 위에 임하는 여호와의 날 평화의길벗 2026.07.31 14
1221 이사야 12:01-06 진노를 거두시고 구원의 우물이 되신 하나님과 만국 중에 울려 퍼지는 감사 찬송 평화의길벗 2026.07.30 10
1220 이사야 11:01-16 베어진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한 싹과 만민을 모으시는 여호와의 대로 평화의길벗 2026.07.29 25
1219 이사야 10:20-34 제국의 오만한 망치를 부수시는 여호와의 친히 펴신 손 평화의길벗 2026.07.28 18
1218 이사야 10:05-19 진노의 막대기를 꺾으시는 역사의 절대 주권자 평화의길벗 2026.07.27 17
1217 이사야 09:08-10:04 지속되는 배역에 임할 전능자의 펴신 손과 자멸하는 탐욕의 불길 : 위선적 종교와 불의한 법령을 꺾으시는 야웨의 공의" 평화의길벗 2026.07.25 31
1216 이사야 09:01-07 흑암에 비친 큰 빛, 평강의 왕으로 오신 한 아기 평화의길벗 2026.07.25 38
1215 이사야 08:01-22 실로아 물을 버린 세대에 성소가 되시는 여호와 평화의길벗 2026.07.24 49
1214 이사야 07:01-25 숲처럼 흔들리는 마음에 주신 임마누엘의 징조 평화의길벗 2026.07.23 27
1213 이사야 06:01-13 그루터기에 남기신 거룩한 씨 평화의길벗 2026.07.22 55
1212 이사야 05:18-30 죄의 수레 줄을 당기는 오만한 지성에 임할 전능자의 휘파람 소리 평화의길벗 2026.07.21 22
1211 이사야 05:01-17 기대했던 극상품 열매 대신 들포도를 맺은 이들을 향한 전능자의 탄식과 공의의 심판 평화의길벗 2026.07.20 48
1210 이사야 03:13-04:06 메시아의 초막 평화의길벗 2026.07.19 5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62 Next
/ 6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