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1-23 권리의 제단을 허무는 십자가, 스스로 종이 되어 누리는 적극적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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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마땅한 권리와 자유를 끝까지 행사하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세속의 이기심을 거절하고, 목적지를 향해 내달리는 속도를 늦추고 하나님과 이웃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동행하는 영적 순례를 통해, 마땅히 누리실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기꺼이 우리를 위해 종의 멍에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은혜에 내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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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장마를 앞두고 대지에 짙게 깔린 습기가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지만, 그 끈끈하고 무더운 공기를 뚫고 기어코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한여름 담쟁이넝쿨의 맹렬한 생명력을 마주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넝쿨은 한 뼘의 햇살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듯합니다. 이토록 치열한 생존의 틈바구니에서 내 몫과 권리를 지켜내느라 남몰래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신앙의 길을 애타게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아등바등하는 연약함조차 다사롭게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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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내게 아는 것이 많고 누릴 권리가 충분하다면, 그것을 남김없이 행사하고 쟁취하는 것만이 무능하지 않게 살아남는 지혜라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9장의 풍경은, 그토록 내 권리에 집착하는 세속의 태도가 어떻게 거룩해야 할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무너뜨리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어떻게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을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8장에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와 관련하여, 지식이 있는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내 정당한 권리를 도대체 왜 포기해야 하느냐며 반발할 수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9장에서 바울은 돌연 자신을 궁극적인 권리 포기의 예시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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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당당히 묻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1, 4).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가정을 꾸릴 마땅하고도 정당한 권리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라고 선언합니다. 이 대목은 사도의 권한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가장 정당한 권리마저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위대한 사랑의 논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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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바울은 이 권리 포기를 역설적인 자유의 절정으로 승화시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를 소극적 자유라 칭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통제하며 진정한 목적을 실현하는 상태를 적극적 자유라 불렀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적극적 자유의 눈부신 발현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율법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소극적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를 무기 삼아 남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넉넉한 자유를 가지고 이웃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종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지만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행사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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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려는 세속의 피곤한 엔진을 끄고, 스스로 종이 되는 십자가의 역설 속으로 우리를 던져 넣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거룩한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을 가리켜 걷기라고 명명한 통찰이 있습니다. 빠른 자동차를 타고 질주할 때 우리의 시선은 오직 나의 목적지, 즉 내 권리와 성취에만 고정되어 길가의 풍경을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대자연, 그리고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는 이웃의 얼굴을 대면하게 됩니다. 참된 묵상은 내 권리만을 향해 내달리는 맹렬한 속도전을 멈추고, 말씀이 이끄는 길 위에서 주님과 보폭을 맞추며 걷는 고단하지만 아름다운 산책입니다. 그 걷기의 묵상 속에서 우리는 내 자유를 뽐내느라 타인을 아프게 했던 교만을 내려놓고, 상처 입은 이들과 함께 걷기 위해 기꺼이 나의 보폭을 줄이는 따뜻한 사랑의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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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남들보다 덜 누리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봐, 나의 정당한 권리와 쓸모를 핏대 세워 증명해 내느라 깊은 피로감에 지쳐 계십니까? 반대로 거친 세상에서 나를 보호할 힘과 권리가 한 줌도 없는 것 같아 하나님은 왜 나만 이렇게 억울하게 두시는가라며 짙은 소외감에 젖어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치열하게 내 권리를 쟁취해야만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무겁고 서늘한 생존의 계산기를 십자가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기적으로 으르렁대던 우리의 비루한 밑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정죄하여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의 그 무한하고 영광스러운 권리를 기꺼이 다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우리의 가장 남루하고 냄새나는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스스로 종이 되시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그 압도적이고 맹렬한 은혜의 십자가가,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우리의 낡은 영혼을 덮어 생명으로 살려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참된 평안은 우리가 얼마나 내 몫을 똑똑하게 챙겨 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하늘 권리를 찢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눈부시고 다사로운 긍휼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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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단하고 상처 많은 신앙 여정은 위대한 교향곡을 완성하는 악보 속의 쉼표를 연주하는 일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논리는 너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니 한순간도 쉬지 말고 너의 권리인 소리를 가장 크고 강하게 내라고 윽박지릅니다. 만약 모든 악기가 자신의 소리를 낼 권리만을 주장하며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댄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소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위대한 지휘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소리 내기를 멈추고 침묵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내 소리와 권리를 충분히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다른 악기의 소리가 온전히 울려 퍼지도록 나의 연주를 기꺼이 멈출 때, 우리의 그 자발적인 쉼표와 침묵은 온 세상을 감동하게 하는 가장 웅장하고도 눈부신 은혜의 교향곡으로 찬연하게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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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치열하게 약동하는 이 유월, 내 권리만을 주장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세상의 팍팍한 논리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말씀과 함께 천천히 걷는 묵상의 자리에 고요히 엎드리며, 나를 위해 권리를 포기하신 주님의 그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약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 자유를 내어주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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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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