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6-21 만물의 찌꺼기를 자처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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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영적 우월감에 취해 스스로 왕 노릇 하려던 얄팍한 교만을 거부하고, 세상의 거짓된 질서를 거스르는 거룩한 불화, 곧 저항으로서의 묵상을 통해, 만물의 찌꺼기처럼 낮아지신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기어이 생명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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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의 짙푸름 속에서 조국을 위해 이름 없이 스러져간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현충일이 지난 주일입니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잎의 이면에는 언제나 어둡고 차가운 땅속을 묵묵히 견뎌낸 뿌리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빛나는 성공과 힘의 논리에 부응하지 못해 남몰래 어깨를 움츠리고 계실 분들, 그리고 내 가치를 내 힘으로 끝없이 증명해 내야 한다는 팍팍한 강박 속에서 신앙의 이유를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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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하여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야만 환대받을 수 있다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4장 후반부의 풍경은, 이토록 지독한 세속의 성공 신화가 어떻게 교회 공동체의 영혼을 병들게 했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 오만한 교만의 성채를 향해 어떻게 십자가라는 역설적인 은총을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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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는 수사학과 철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상업적 번성을 누리던 화려한 욕망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달콤한 말솜씨와 지적 우월감을 생존과 지배의 무기로 삼았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세속적 관습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의 복음조차 자기를 과시하는 액세서리로 전락시켰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얄팍한 실상을 이렇게 아프게 찌릅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전 4:8).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 이미 모든 축복과 지혜를 다 얻은 양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파당을 짓고, 서로를 밟고 올라서서 헛된 왕 노릇을 즐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핍박받고 노동하며 고난당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어리석고 실패한 인생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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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오만함을 향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이 걸어가는 정반대의 길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로마 제국의 개선 행렬 맨 끝에는 맹수에게 찢기거나 처형될 포로들이 비참한 몰골로 끌려갔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바로 그 구경거리요,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자(고전 4:10)라고 고백합니다. 급기야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라고 절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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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번영만을 좇던 이들에게 만물의 찌꺼기가 된다는 것은 끔찍한 저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진정한 사랑을 이렇게 갈파한 바 있습니다. "똥통에 빠진 사람을 볼 때 세 부류가 있다. 더럽다고 외면하고 가는 사람, 손을 잡고 끌어내는 사람, 함께 똥통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듯 하는 것보다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하다." 바울이 기꺼이 만물의 찌꺼기를 자처한 것은, 죄와 절망이라는 똥통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 곁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입장의 동일함을 온몸으로 살아낸 거룩한 환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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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높아지려는 세상의 인력을 단호히 끊어내고 십자가의 낮아짐 속으로 나아가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은 저항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제국의 폭력적인 가치와 질서를 박차고 나오는 저항의 몸짓이었습니다. 참된 묵상이란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얄팍한 처세술이나 성공의 공식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은 이미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며 타인을 평가하고 군림하려는 세속의 문법을 깨뜨리고, 만물의 찌꺼기가 되신 십자가의 그 거대한 역설에 나를 던져 세상의 부조리한 질서와 거룩하게 불화하는 위대한 저항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세상이 가리키는 화려한 정상이 아니라, 이웃의 눈물이 흐르는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숭고한 용기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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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이토록 뼈아픈 진실을 꺼내 든 이유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거나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 4:14). 바울의 엄중한 책망 이면에는, 세속주의의 불길 속에서 잿더미로 스러질 위험에 처한 교회 공동체를 기어코 살려내려는 눈물겨운 긍휼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는 선언은, 화려한 말잔치로 자기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품어 살려내는 십자가의 능력이 참된 구원임을 확증하는 외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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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험한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번듯한 힘과 지식을 과시하며 스스로 왕이 되려 안달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은 세상이 요구하는 그럴듯한 스펙이 없어 만물의 찌꺼기처럼 버려진 것 같은 깊은 소외감과 우울에 젖어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내 힘으로 인생의 왕좌를 쟁취하겠다는 그 피곤하고 무거운 갑옷을 십자가 앞에 가만히 벗어 두십시오. 하나님은 말로만 잘난 척하며 스스로 왕 노릇 하던 그들의 오만하고 비루한 바닥을 아시면서도 끝끝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화려하고 무결점의 제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십자가의 죄수로 오시어 우리 인생의 참담한 똥통 한복판으로 기꺼이 뛰어드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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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깊은 숲을 살려내는 썩은 밑동의 거룩한 퇴락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논리는 가장 높이 솟아올라 화려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만이 성공이며, 쓰러져 썩어가는 나무는 만물의 찌꺼기 같은 철저한 실패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생태학자이신 하나님은 그 무너진 밑동을 결코 쓸모없다 버리지 않으십니다. 숲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이름 없이 썩어가는 그 밑동은 수많은 미생물과 이끼, 그리고 상처 입은 어린 묘목들에게 생명의 양분을 거저 내어주는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둥지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왕이 되려는 헛된 시도를 멈추고 십자가의 낮아짐 속에 내 자아를 고요히 썩어지게 내어 맡길 때, 비로소 우리의 그 비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통해 절망으로 메말라가던 이웃들이 숨을 쉬고, 온 숲이 눈부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살아나는 경이로운 은총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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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한층 푸르러지는 이 호국 보훈의 달 6월, 남을 밟고 올라서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십자가의 저항을 호흡하는 깊은 묵상의 자리에 엎드리며, 내세울 것 없는 연약한 이웃의 상처 속으로 다정하게 스며드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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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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