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5:1-13 거짓 자유의 누룩을 도려내는 아픔, 유월절 어린 양이 지어주신 순결한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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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육체의 방종을 묵인하며 타락한 세속의 가치를 영적 자유로 포장하는 얄팍한 교만을 거절하고, '나의 자아를 정당화하려는 변명을 멈추고 성경을 나에게 불리하게 읽어내는' 고통스러운 직면을 통해, 죄로 오염된 우리를 기어코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내어 '새 반죽'으로 빚어 주시는 유월절 어린 양의 맹렬한 은혜에 온전히 안기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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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뙤약볕이 대지 위로 쏟아지며, 사물들이 숨기고 있던 짙은 그림자와 윤곽마저 숨김없이 선명하게 폭로해 내는 2026년 6월의 어느 눈부신 날입니다. 찬란한 빛의 계절 한복판에서, 행여나 내 영혼 깊은 곳에 남몰래 숨겨둔 부끄러운 얼룩이 들통날까 두려워 가슴 졸이고 계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내 안의 끊이지 않는 모순과 연약함 때문에 짙은 회의를 느끼며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허물조차 그리스도의 붉은 피로 덮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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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종종 '자유'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우리의 탐욕과 일탈을 그럴듯하게 정당화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5장의 풍경은, 이토록 지독한 세속의 방종이 '복음적 자유'라는 가짜 이름표를 달고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내부로부터 병들게 했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라 여기는 헬라의 이원론이 깊이 뿌리내려 있었습니다. 이 위험한 사상은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육체의 욕구를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금욕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육체가 무슨 짓을 하든 영혼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는 극단적 방탕주의였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 방탕주의적 사고방식이 복음의 자유와 교묘하게 뒤섞여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급기야 한 교인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 곧 계모를 취하는 이방인들조차 꺼리는 끔찍한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더 절망적인 사실은, 고린도 교회가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도 애통해하기는커녕 도리어 교만해져서 그를 공동체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여 어떤 얽매임에서도 자유롭다고 자부하며, 타인의 심각한 죄악마저 쿨하게 포용하는 것이 사랑이라 착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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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바울은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5:6). 죄의 전염성에 대한 섬뜩한 경고입니다. 바울은 그 음행한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그를 영원히 파멸시키려는 저주가 아닙니다. 육신의 범죄를 엄중히 치리하여 그가 돌이켜 회개하게 함으로써,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는 눈물겨운 징계요 사랑의 매였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사랑은 내 사랑으로 규제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상대방을 놓아주어야만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사랑은 또한 숨이 막힐 정도로 엄격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형제를 방관하는 값싼 관용이 아니라,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 썩은 살을 도려내는 엄격한 긍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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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거짓 자유로 내 죄를 포장하려는 자기기만을 깨뜨리고, 내 영혼의 누룩을 정직하게 도려내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거룩한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참된 묵상은 내 입맛에 맞는 구절만 골라내어 내 얄팍한 신념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묵상은 도리어 성경을 나에게 불리하게 읽어야 하는 일입니다. 은혜의 달콤한 위로만 구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말씀이 방망이처럼 우리의 타락한 양심과 영혼을 두드리시며, 불처럼 사용해 추악한 옛사람이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는 성화의 여정으로 이끄시고 기어코 치유하시는 아픈 교정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인 이성복이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거예요"라고 말했듯, 참된 묵상 역시 내 안의 완고한 변명과 오만함을 철저히 전복시키고, 십자가 앞에 나를 벌거벗기는 내면의 거룩한 혁명입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이 정도는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인데 뭐 어때"라며 내 안의 부끄러운 누룩을 방치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은 그 적은 누룩이 내 삶의 전부를 오염시켜 버렸다는 짙은 죄책감과 회의감 속에서 "나는 영영 버림받은 자야"라며 절망의 구석에 움츠려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만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율법의 무거운 강박에 짓눌려 지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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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힘으로 그 더러운 누룩을 말끔히 씻어내어 무결점의 도덕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그 피곤한 짐을 십자가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바울의 위대한 복음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린도전서 5:7).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누룩을 제거해서 흠 없는 새 반죽이 되어라"고 명령하시기 이전에, "너희는 이미 누룩 없는 자다"라고 먼저 선언하십니다. 왜입니까? 죄의 얼룩으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를 대신하여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은 우리가 이루어낸 도덕적 성취에 있지 않습니다. 누룩투성이인 우리의 남루한 존재를 십자가의 붉은 피로 남김없이 덮어 안으시어, 기어코 거룩하고 순결한 새 반죽으로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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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깊은 산속의 오염된 우물을 새롭게 정화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와 이원론은 우물물에 독성 있는 이끼가 퍼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면에 달콤한 시럽이나 향기로운 꽃잎을 띄워 놓은 채 마셔도 괜찮다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 썩어가는 물을 대충 덮어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가장 깊고 차가운 두레박, 곧 우리의 양심을 방망이질하는 고통스러운 묵상을 내려 그 오염된 물을 바닥까지 깡그리 퍼내십니다. 그 퍼냄의 시간이 때론 고통스럽고 내 바닥이 드러나는 수치를 겪게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길에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길 때 비로소 우물 가장 깊은 밑바닥의 암반을 뚫고 결코 마르지 않는 영원하고 맑은 생명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혈이 콸콸 솟아올라, 우리 영혼을 온 세상의 목마름까지 넉넉히 해갈하는 가장 순결하고 은혜로운 샘물로 넘쳐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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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찬란히 타오르는 이 여름의 초입, 세속의 방종을 묵인하며 타협하려는 세상의 거짓된 자유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나에게 불리하게 말씀을 읽어내어 내 영혼을 교정 받는 깊은 묵상의 자리에 머물며, 나를 새 반죽으로 빚어주신 그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에 기대어 이웃과 함께 거룩하고도 명랑한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자유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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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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