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9 닻을 내리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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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지식과 은사를 자랑하며 스스로를 증명하려던 얄팍한 영적 허영을 직시하고, 두려움을 넘어 진리의 바다에 자신을 던지는 거룩한 의탁을 통해, 허물 많은 우리를 기어코 책망할 것 없는 자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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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봄의 끝자락이자 여름의 문턱인 2026년 6월 1일입니다. 맹렬하게 뻗어 오르던 산야의 녹음이 제법 짙고 무성한 자태를 뽐내는 6월의 첫 날,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화사하지만 그 잎사귀 이면에서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수액을 길어 올리는 자연의 고단한 숨결이 느껴집니다. 화려한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겉모습을 치장하느라 정작 내면은 텅 비어버린 헛헛함을 안고 묵상의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내가 지닌 알량한 능력으로 내 삶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 속에서 회의하고 서성이는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나약함조차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 끌어안으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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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한달동안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면서 교회를 향한 바울을 통해 우리르 향한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 볼 수 있길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고린도는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상업의 활기와 헬라 철학의 광채가 뒤섞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지식과 언변을 숭상했고, 달콤하고 화려한 말솜씨를 지혜라 여기며 뽐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풍조는 고스란히 교회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바울의 첫인사를 들여다보면 그 이면이 보입니다.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5, 7). 겉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풍성해 보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늘 감사했던 것, 곧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한 고백이 이 감사 기도에는 쏙 빠져 있습니다. 알맹이가 빠진 감사입니다. 그들은 은사와 지식은 넘치게 받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누가 더 잘났느냐며 파당을 짓고 경쟁하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받은 은사를, 그들은 자신을 치장하는 세속적 장식품으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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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영성 생활은 존재의 핵심과 관계가 있다"고 통찰하며, 우리가 종교 활동조차 내면의 삶의 양식과 분리한 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전락시키는 세속성에 물들어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속사람은 여전히 탐욕과 경쟁을 따르는 세상의 원리에 갇혀 있으면서도, 화려한 종교적 은사만으로 자신들이 대단한 신앙인인 양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들과 얼마나 다를지, 조용히 헤아려 볼 일입니다. 내세울 만한 직분이나 봉사의 이력, 오래된 신앙의 연조로 스스로의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려 애쓰다가 속이 텅 비어버린 경험, 그 낯선 허전함을 우리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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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바울은 이토록 모순투성이인 공동체를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그들의 얄팍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 위대한 은총을 선언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8-9). 바울의 희망은 고린도 교인들의 뛰어난 지식이나 훌륭한 도덕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자녀들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어코 거룩한 흠 없는 자로 빚어내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미쁘심, 곧 그 신실하심에 모든 운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획득한 화려한 은사나 빈틈없는 삶의 실적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끝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흠집 많은 여정조차 당신의 넓은 품으로 보듬으시어, 기어코 거룩한 생명의 열매로 직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그 압도적이고도 미쁘신 자비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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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알량한 은사로 스스로를 증명하려던 피곤한 수고를 멈추고 미쁘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거룩한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조용한 골방에서 내 마음의 위안을 얻어내는 기술이 아닙니다. 묵상은 진리의 바다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두려워 해변에서 발목만 적시며 내 안전을 계산하는 것을 멈추고, 진리의 물결 속에 내 존재를 던져 힘을 뺄 때 비로소 우리는 부력이 선물하는 뜻밖의 안전, 곧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묵상은 안식입니다. 내가 내 삶을 쉼 없이 통제하고 입증해야 한다는 생존의 질주를 멈추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날개 그늘 아래 머물며 참된 자유를 누리는 위대한 멈춤입니다. 한동일 선생은 "내가 어두우면 상대의 밝음이 보일 수 있습니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참된 묵상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텅 빈 어둠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내 어둠을 처절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자격 없는 나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십자가 사랑의 그 눈부신 밝음을 온전히 감각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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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첫날 아침, 새 달력을 펼치는 손끝에서 무언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렁입니다. 그러나 달력 한 장이 넘어간다고 해서 우리 안의 고린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누군가보다 더 나은 신앙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하고, 내가 쌓아 올린 종교적 업적으로 하나님의 시선을 붙들려 합니다. 그 피곤한 수고 앞에서 바울의 선언은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그분은 이미 우리를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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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한 신앙 여정은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가 바다 깊은 곳에 무거운 닻을 내리는 일과 같습니다. 바람을 잘 타는 화려한 돛과 튼튼한 돛대, 곧 우리가 자랑하는 세상적 지식과 화려한 은사는 평온할 때는 배를 멋지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생을 뒤흔드는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도리어 배를 뒤집는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만과 분열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거센 파도 앞에서도 결코 파선하지 않고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다 밑바닥의 가장 단단한 반석, 곧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무겁고도 깊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알량한 돛을 자랑하며 스스로 거센 물결과 싸우려는 헛된 수고를 멈출 때, 비로소 우리를 든든하게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그 은혜의 닻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가장 고요하고도 넉넉한 생명의 항구로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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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름이 한층 짙어지는 이 계절, 내 능력을 과시하여 타인 위에 서려는 세상의 피곤한 수직적 질서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진리의 바다에 나를 띄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누리는 안식의 묵상에 고요히 머물며, 나를 끝까지 품어주신 그 너른 자비의 마음으로 내 곁의 연약한 이웃을 다정하게 껴안는 참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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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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