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1-16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는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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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화려한 언변과 성공의 처세술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세상의 얄팍한 지혜를 거부하고, 세상 풍조에 순응하지 않고 생명의 가치로 대드는 거룩한 영적 몸부림을 통해, 무력해 보이는 우리의 약함 속에서도 기어코 부활의 능력을 꽃피우시는 성령의 은총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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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정보와 달콤한 지식의 파편들이 손끝에서 번쩍이며 눈과 귀를 현혹하는 시대입니다. 화려한 말의 성찬은 넘쳐나지만 정작 영혼을 지탱할 근원적인 지혜는 부재하여 짙은 공허함만 남습니다. 내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 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의 피곤한 강박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서성입니다. 그 서성임의 한복판에서 고린도전서 2장은 우리를 조용히 불러 세웁니다. 십자가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참된 지혜의 역설을 선포하는지를, 이 본문은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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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는 헬라 이원론과 더불어 철학과 수사학이 고도로 발달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최고의 지혜라 여기며 뽐내기를 좋아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세속의 가치관은 복음의 문턱을 넘어 교회 안으로까지 고스란히 흘러들어왔습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의 진리 그 자체보다 누가 더 철학적으로 심오하고 수사학적으로 세련되게 설교하느냐를 두고 경쟁하며 파당을 지었습니다. 복음마저도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지식을 가졌음을 과시하는 종교적 액세서리로 전락시킨 참담한 영적 허영이었습니다.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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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화려한 수사학의 성채를 쌓아 올리며 교만해진 이들을 향해 바울은 단호한 선언을 던집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선언은 지적 빈곤의 고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얄팍한 지혜 체계 전체를 향한 정면 거부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이 지혜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갈파합니다(고전 2:8).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처세술이 가장 지혜로운 수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도 완벽한 승리라 여겼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를 살려내시는 부활의 승리로 판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수를 넘어서 계십니다.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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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 거룩한 신비를 깨닫는 길을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보며 깨닫지 못하지만, 오직 성령을 받은 신령한 자만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온전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고전 2:10, 14-15). 분별은 지식의 양에서 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비로소 열리는 눈이 있습니다. 그 눈으로 보아야만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약함이 수치가 아니라 은총의 통로임을 알게 됩니다. 이 영적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은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듦, 곧 거부라고.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 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참 생명이며,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나대로 하자고 선언하는 힘이 바로 생명이라고. 참된 묵상이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의 위안이나 얻어내는 나약한 명상이 아닙니다. 묵상은 이 세상 풍조에 순응하여 욕망대로 살라고 윽박지르는 속삭임에 성령의 능력으로 단호히 대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미련함을 조롱하는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가치만이 참된 진리임을 온몸으로 증명해 내는 대담하고도 눈부신 자기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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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백을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위대한 사도조차 자신이 가진 언변의 투박함과 현실의 벽 앞에서 철저한 무력감을 느끼며 떨었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스펙이나 능란한 처세술을 갖추지 못해 나는 실패한 인생 아닐까 하는 회의와 위축감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더 훌륭하고 세련된 헌신의 모습을 증명해 내야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무거운 강박에 지쳐 계신가요. 그렇다면 바울의 떨림이 우리의 떨림과 다르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포장된 지식이나 완벽함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그 텅 빈 두려움과 약함의 공간을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험한 세상을 얼마나 영리하게 헤쳐 나가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핑계 대지 않고 십자가 아래 엎드린 이들조차 넉넉히 품어 안으시어 기어코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혀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그 맹렬하고도 다사로운 은총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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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나는 작은 민들레와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그 두꺼운 아스팔트를 부수기 위해 거대한 중장비와 날카로운 철골, 곧 권력과 수사학과 힘의 논리만이 필요하다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쇠망치를 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미련하고 연약해 보이는 작은 씨앗 하나, 곧 십자가의 도를 그 틈새에 고요히 심으십니다. 겉보기엔 힘없이 밟히고 꺾일 것 같지만, 하늘의 햇살과 단비를 온전히 빨아들이며 세상의 풍조에 대들고 성령을 의지하는 묵상으로, 기어코 그 단단한 균열을 비집고 솟아올라 노란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의 그 맹렬한 부드러움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이자 성령의 능력입니다. 능숙한 말과 지식으로 자기를 증명하여 남을 누르려는 세상의 차가운 논리를 미련 없이 거절하고, 그 작은 씨앗처럼 균열 속에 고요히 뿌리를 내리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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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짙어지는 이 초여름, 능숙한 말과 지식으로 자기를 증명하여 남을 누르려는 세상의 차가운 수직적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세상 풍조에 당당히 대드는 거룩한 생명의 묵상에 고요히 엎드리며, 내 약함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이웃을 다정하게 껴안는 참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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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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