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11 억울함의 법정을 허무는 십자가
.
참된 신앙이란, 내 권리와 의로움을 끝끝내 입증하기 위해 형제를 세상의 심판대 위에 세우는 얄팍한 투쟁을 내려놓고, 말씀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욕망을 멈추고 살아계신 주님과 진솔하게 만나는 영적 호흡을 통해, 이기적인 다툼으로 얼룩진 우리조차 기어코 씻어내어 거룩한 백성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광대한 자비에 온전히 안기는 생명 사건입니다.
.
"내가 밝으면 상대의 어둠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두우면 상대의 밝음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한동일 선생의 이 서늘한 통찰은 인간관계의 가장 깊은 모순을 정조준합니다. 대지가 눈부신 초록의 자태를 한껏 뽐내는 눈부신 초여름입니다. 이 찬란한 빛의 향연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와 억울함 때문에 내 안의 강렬한 '옳음'의 빛만을 쏘아대며 타인의 허물을 정죄하느라 남몰래 영혼의 시름을 앓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야속한 현실 속에서 신앙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다툼조차 너른 품으로 안으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내 권리는 1원 한 푼이라도 침해받아서는 안 되며, 억울한 일을 당하면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려 이겨야만 한다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6장의 풍경은, 그토록 거룩하게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가 '내 몫'을 찾겠다는 이기적인 권리 투쟁 때문에 어떻게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이진섭 교수는 성경 본문을 읽을 때 그 텍스트가 놓인 전후 문맥을 주의 깊게 헤아릴 것을 권면합니다. 5장에서 교회 내의 끔찍한 음행 문제를 제대로 치리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의 영적 무감각을 질타했던 바울은, 6장에 들어서자마자 돌연 교인들 간의 법정 소송 문제를 꺼내 듭니다. 교인들 사이에 재산이나 권리 문제로 분쟁이 생겼을 때, 그들은 사랑과 양보로 문제를 풀거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의 법정으로 형제를 끌고 갔습니다.
.
바울은 탄식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3). 장차 만물을 심판할 영광스러운 신분을 지닌 자들이, 고작 세상의 썩어질 재물 몇 푼을 지키겠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권력 앞에 엎드려 판결을 구걸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참담하냐는 꾸짖음입니다. 바울의 진단은 매섭습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끝까지 시시비비를 가려 내 권리를 찾아내는 것이 세상의 지혜라면, 십자가의 지혜는 형제를 잃느니 차라리 내가 기꺼이 바보처럼 속아주고 손해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속임을 당하여 불의를 겪더라도, 세상의 법정에 서기보다는 그 고통을 끌어안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이렇듯 내 권리를 주장하려는 날 선 자아를 내려놓고 기꺼이 속아주는 십자가의 넉넉함 속으로 우리를 던져 넣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권연경 교수는 묵상의 본질이 '대화'에 있다고 통찰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종종 내가 이미 정해놓은 욕망과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메시지를 취사선택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앞에 '너(Thou)'로 서 있는 살아있는 말씀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한낱 내 뜻대로 요리하는 사물('그것', It)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입니다. 참된 묵상은 내 고집을 내려놓고 말씀을 매개로 그리스도와 마주하며 진솔한 대화를 이어 가는 시간입니다. 박대영 목사는 묵상을 가리켜 '관계'라고 역설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단지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깊은 관계를 지으신 것입니다. 대화와 관계로서의 묵상 자리에 고요히 머물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억울함을 갚아달라고 떼쓰는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권리를 내어주지 않았느냐"라고 속삭이시는 주님의 다정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찌른 형제를 향해 들이대던 법의 잣대를 거두고 너른 긍휼의 관계망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내 이익을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이웃을 향해 날카로운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느라 깊은 피로감에 지쳐 계십니까. 반대로 험한 세상에서 나만 억울하게 속고 빼앗긴 것 같아 "하나님은 왜 내 억울함을 갚아주시지 않느냐"며 깊은 회의와 상실감에 젖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내 힘으로 권리를 되찾고 얄팍한 정의를 입증하려 꽉 쥐었던 그 서늘한 법전과 계산기를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바울은 서로 속이고 빼앗으며 법정에서 으르렁대던 그 치사하고 비루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놀라운 은혜의 선언을 던집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하나님은 틈만 나면 형제를 고발하고 다투는 우리의 그 옹졸한 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더러운 다툼의 흙탕물 한복판에 찾아오시어 십자가의 붉은 피로 우리를 말끔히 씻기시고, "너는 의롭고 거룩한 내 자녀다"라고 선언해 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타인보다 도덕적으로 더 옳았음을 입증하는 권리 투쟁에 있지 않습니다. 흠집 많고 이기적인 우리의 적나라한 일상조차 무한한 자비로 씻어 안으시어 기어코 거룩한 생명의 백성으로 빚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
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수많은 오염물질을 품어 안고 끝없이 스스로를 정화해 내는 광활한 바다의 넉넉함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잣대는 누가 덜 더럽고 더 깨끗한지 시시비비를 가리라며 서로를 작은 유리병에 가두고 흙탕물이라며 정죄하기에 바쁩니다. 그 비좁은 유리병 안에서는 작은 불순물조차 서로를 치명적으로 해치는 독이 됩니다. 그러나 위대한 은총의 바다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좁은 율법의 병 속에 가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서로 옳다며 으르렁대는 우리의 그 더러운 흙탕물조차 한없이 넓고 푸른 십자가의 심연 속으로 조건 없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핏대 세워 내 깨끗함을 증명하려는 헛된 몸부림을 멈추고 주님의 깊은 품속으로 내 영혼을 흘려보낼 때, 옹졸했던 우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마침내 우리는 남의 허물조차 기꺼이 씻어 품어주는 가장 맑고 웅장한 하늘의 쪽빛 바다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
생명이 약동하는 이 눈부신 유월, 알량한 내 몫을 챙기기 위해 이웃을 정죄하는 세상의 팍팍한 논리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살아계신 주님과 깊이 대화하며 관계를 맺는 묵상의 자리에 엎드리며, 내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곁에 있는 연약한 이웃에게 기꺼이 져주는 넉넉하고 맑은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