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린도전서 1:10-17 균사체의 복음 - 땅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평화

.

참된 신앙이란, 화려한 언변과 세속적 지혜를 척도 삼아 타인과 나를 구분 짓고 파벌을 조장하는 세상의 경쟁 원리를 거부하고,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을 화해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샬롬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영적 투항을 통해, 십자가의 미련해 보이는 넉넉한 은총 안에서 기어코 참된 연합을 누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

초여름의 눈부신 태양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며, 저마다의 나무들이 짙푸른 생명력을 뽐내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겉보기에는 더 높이 가지를 뻗으려 치열하게 경쟁하는 듯한 숲의 풍경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서는 수많은 뿌리들이 다정하게 얽히며 생수를 나누는 신비로운 연대가 약동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겉모습으로 나를 포장하고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팍팍한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상처 입고 지쳐 계신 분들, 그리고 내세울 것 없는 연약함 때문에 깊은 소외감과 회의를 안고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넉넉히 끌어안으시는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끝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서열을 매기며, 남들보다 더 뛰어난 지식이나 능력이 있어야만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다그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이 펼쳐 보이는 풍경은, 이토록 철저한 세속의 경쟁과 과시욕이 거룩해야 할 교회 공동체마저 어떻게 산산조각 내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 분열의 참상 한복판에 어떻게 십자가라는 은총의 닻을 내리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

고린도라는 도시는 상업적인 번성과 더불어 헬라 이원론,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과 수사학이 고도로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달콤하고 유창한 말솜씨를 지혜라 여기며 숭상했고, 지적 허영심에 들떠 새로운 사상을 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세속적 관습은 고스란히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전한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며 파벌을 나누어 분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쟁의 핵심에는 지혜에 대한 얄팍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진리 그 자체보다, 누가 더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수사학적으로 세련되게 설교하느냐를 두고 경쟁했습니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도자의 뒤에 숨어, 사실은 남들보다 더 우월한 지식을 가졌다는 스스로의 교만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복음마저 자기만족과 지적 허영을 채우는 종교적 액세서리로 전락시킨 가장 참담한 분열이었습니다.

.

이들을 향해 바울은 탄식하며 외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고 자신의 소명은 화려한 말의 지혜에 있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구원이 지식의 세련됨이나 화려한 언변에 있지 않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타인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 관계는 차갑고 비인격적인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한다고 통찰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무장해제되는 대신, 복음을 이념화하여 타인을 정죄하고 파당을 짓는 도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지혜로는 미련해 보일지언정, 모든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다정한 환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

나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세속적 잣대를 부수고 십자가 아래에서 참된 연합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묵상이란 평화라고 갈파합니다. 창조에서부터 새 창조로 나아가는 성경 전체의 거대한 전망은 다름 아닌 샬롬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참된 묵상이란 내 입맛에 맞는 지식을 얻어내어 영적 우월감을 뽐내려는 고린도적 사유가 아닙니다. 묵상은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을 다시 화목하게 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눈을 뜨고, 그 광대한 평화의 여정 속으로 내 존재를 기꺼이 던져 넣는 거룩한 항복입니다. 우리가 조용히 말씀을 묵상할 때,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던 세상의 경쟁과 분열의 인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는 하나님의 평화 안에서, 내 곁에 선 연약한 형제자매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내가 가진 직분, 헌신의 업적, 혹은 성경적 지식을 무기 삼아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피곤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화려한 수사학이나 능력이 내게 없어서 나는 별 볼 일 없는 교인이야 하며 짙은 회의와 절망의 섬에 스스로를 가두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세상의 무대 위에서 내 쓸모를 입증해 내야 한다는 그 무겁고 서늘한 짐을 십자가 앞에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앞세우며 분열을 일삼던 고린도 교인들의 그 얄팍한 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지혜 있고 잘난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지극히 연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을 통해 기어코 온 세상을 끌어안으시고 살려내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

우리의 상처 많고 파편화된 신앙 여정은 거대한 숲을 떠받치고 있는 캄캄한 땅속의 균사체 네트워크와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로만 숲을 바라보면, 각각의 나무들은 한 줌의 햇빛과 수분을 더 차지하기 위해 키를 재고 잎을 뻗으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분쟁하는 독립된 개체들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흙속 깊은 곳에는 수많은 버섯과 균류들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연결망이 숲 전체를 완벽하게 감싸 안고 있습니다. 나무들은 이 은밀한 평화의 연결망을 통해 서로 부족한 양분을 대가 없이 나누어 주고, 병든 나무에게 치유의 수액을 흘려보내며 전체의 숲을 하나로 살려냅니다. 우리가 누가 더 잘났느냐며 지혜를 겨루던 시끄러운 입술을 닫고 고요히 십자가 아래 엎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경쟁하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한 은총이라는 거룩한 생명망 안에서 모두가 다정하게 연결된 단 하나의 몸이라는 가장 눈부시고도 평화로운 진리를 온전히 감각하게 될 것입니다.

.

파벌을 짓고 남과 나를 비교하여 우월감을 느끼려는 세상의 낡은 관성을 미련 없이 끊어내십시오. 그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샬롬의 비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평화의 묵상에 고요히 머물며,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이웃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는 참된 연합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xpliJjKd6YU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75 고린도전서 9:1-23 권리의 제단을 허무는 십자가, 스스로 종이 되어 누리는 적극적 자유 new 평화의길벗 2026.06.13 0
274 고린도전서 8:1-13 지식의 칼날을 거두고 내어준 자리 평화의길벗 2026.06.12 0
273 고린도전서 7:25-40 비워진 뼈로 날아오르는 은총의 비행 평화의길벗 2026.06.11 0
272 고린도전서 7:1-24 여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평화의길벗 2026.06.10 1
271 고린도전서 6:12-20 쾌락의 밤을 지나는 빈 배, 영혼을 껴안는 거룩한 성전 평화의길벗 2026.06.09 0
270 고린도전서 6:1-11 억울함의 법정을 허무는 십자가 평화의길벗 2026.06.08 0
269 고린도전서 5:1-13 거짓 자유의 누룩을 도려내는 아픔, 유월절 어린 양이 지어주신 순결한 식탁 평화의길벗 2026.06.07 0
268 고린도전서 4:6-21 만물의 찌꺼기를 자처한 십자가 평화의길벗 2026.06.06 1
267 고린도전서 3:16-4:5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을 허무는 은총 평화의길벗 2026.06.05 4
266 고린도전서 3:1-15 불길 속에서 빚어지는 것들 평화의길벗 2026.06.04 0
265 고린도전서 2:1-16 단단한 아스팔트를 뚫는 씨앗 평화의길벗 2026.06.03 4
264 고린도전서 1:18-31 질그릇이 품은 생수 평화의길벗 2026.06.02 7
» 고린도전서 1:10-17 균사체의 복음 - 땅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평화 평화의길벗 2026.06.01 5
262 고린도전서 1:1-9 닻을 내리는 자리 평화의길벗 2026.06.01 6
261 창세기 50:15-26 애굽의 관을 뚫고 피어나는 약속 평화의길벗 2026.05.30 7
260 창세기 49:29-50:14 막벨라의 순례자, 워터마크의 빛 평화의길벗 2026.05.29 3
259 창세기 49:16-28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 상처의 화살을 품어 빚어낸 은총의 진주 평화의길벗 2026.05.29 5
258 창세기 49:1-15 폭력의 칼을 꺾고 피어나는 샬롬 평화의길벗 2026.05.27 5
257 창세기 48:8-22 어긋맞긴 두 손에 담긴 하늘의 혁명 평화의길벗 2026.05.27 4
256 창세기 47:27-48:7 애굽의 안락을 거절한 지팡이 평화의길벗 2026.05.25 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 Next
/ 1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