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8:01-20 기업을 버린 발, 값을 좇아간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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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단 지파는 싸움 대신 살기 쉬운 땅을 찾아 다섯 정탐꾼을 보냅니다(1-2절). 그들은 미가의 집에서 레위 청년을 알아보고 길이 형통할지 묻고, 청년은 평안히 가라는 모호한 답을 줍니다(3-6절). 정탐꾼들은 평온하고 안전한 라이스를 보고 돌아와 하나님이 그 땅을 넘겨 주셨다며 형제들을 부추깁니다(7-10절). 무장한 육백 명이 올라가다 다시 미가의 집에 이르고, 다섯 사람은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들고 나옵니다(11-18절). 한 사람의 집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낫지 않느냐는 제안에, 청년은 마음에 기뻐하여 신상을 받아 들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갑니다(19-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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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17장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는 어머니의 은 천백을 훔쳤다가 저주가 두려워 돌려주었고, 그 은의 일부로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을 만들어 자기 신당에 두었습니다. 거기에 에봇과 드라빔을 더하고, 떠돌던 베들레헴의 레위 청년을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으로 고용해 제사장으로 앉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복 주실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17:13). 18장은 새 인물과 함께 새 이야기를 여는 듯하지만 곧 같은 집 문간으로 돌아와 앞 이야기와 한 몸이 됩니다. 한 집안의 잘못된 예배가 한 지파의 예배로 번져 가는 과정이 본문입니다.
# 단 지파는 여호수아 때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 블레셋 평야와 맞닿은 서쪽 해안 지대를 기업으로 받았습니다(수 19:40-48). 그러나 사사기 1장은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1:34). 그래서 단 사람들은 소라와 에스다올 언저리에 끼어 살았고, 삼손도 그 좁은 땅에서 태어났습니다(13:2). 여호수아 19:47은 단 자손이 레셈을 쳐서 차지했다고 짧게 적어 성공담처럼 들리지만, 사사기는 그 속사정을 들려주며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립니다.
# 라이스는 헤르몬산 자락, 요단강의 발원지 가까이 있는 성읍입니다. 단 지파가 본래 받은 땅에서 170킬로미터 넘게 떨어져 있었고,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졌으나 산줄기에 막혀 외부와의 왕래가 드물었습니다. 뒷날 이 성읍은 단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북쪽 끝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관용구를 낳았고, 나라가 갈라진 뒤에는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두 곳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왕상 12:29). 오늘 본문은 그 긴 어둠의 씨앗이 어디에서 뿌려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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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절 기업 대신 고른 길, 듣기 좋은 대답
성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싸워 지킬 기업을 맡기시는 분이시며, 그 자리를 떠난 걸음에 당신의 이름으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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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삿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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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로 문을 엽니다. 17장 6절에서는 이 말 뒤에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구절이 따라왔는데, 여기서는 앞부분만 적혀 있습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생략에도 18장 역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야기이며, 이 후렴이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라는 신호라고 읽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신호를 확인해 줍니다. 단 지파는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고, 그 까닭이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지파들의 기업이 그들에게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분배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분배된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기업으로 옮긴 히브리어 나할라는 본래 주인이 종속된 이에게 내려 주는 몫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실 때라면 알맞은 이 낱말이 스스로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의 형편에 쓰인 것은 역설이고, 저자는 이 한 낱말로 그들의 행동을 낮추어 봅니다. 기업은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기업을 두고 새 기업을 구한다는 말 속에 이 지파의 뒤틀림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선택은 여호수아 17장에서 철 병거를 핑계로 땅을 더 달라던 요셉 자손과 나란히 놓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삼림이라도 개척하라,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고 답했습니다. 단 지파에게 필요했던 것도 새 정탐이 아니라 옛 약속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정탐꾼 다섯이 미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들의 물음은 세 가지입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세 물음에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모두 들어 있는데, 청년은 가장 불편한 첫 물음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고용했다고만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 자기를 소개한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그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신탁을 청하고, 청년은 기도했다는 말도 여쭈었다는 말도 없이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답합니다. 화자가 그의 기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말이 받은 말씀이 아니라 비위를 맞추려는 자기 말이었음을 뜻합니다. 더구나 앞에로 옮긴 노카흐는 맞은편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니, 듣기 좋은 축복이 실은 너희 길은 여호와의 맞은편에 있다는 선언으로도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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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자주 묻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묻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 지파는 이 길이 옳으냐고 묻지 않고 이 길이 형통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정한 길에 성공을 보증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도도 종종 그렇습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이직, 이미 기울어진 결정, 이미 미워하기로 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 형통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평안히 가라고 답해 줄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한국교회가 오래 앓아 온 병도 여기에 있습니다. 듣기 좋은 축복이 넘치고, 가는 길이 여호와의 맞은편일 수 있다는 말은 드물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강단과 소그룹과 심방의 자리가 형통을 보증하는 곳이 아니라 길을 되묻는 곳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맡겨진 기업을 다시 살펴보십시오. 가정과 일터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리는 대개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선 땅입니다. 불편한 관계, 풀리지 않는 과제, 오래 미뤄 둔 화해가 그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두고 더 쉬운 곳을 정탐하러 다니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느냐는 물음에 떳떳하게 답할 수 있는 자리는 도망쳐 간 곳이 아니라 보냄받은 곳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하나님께 묻는 물음이 옳으냐의 물음인지 되느냐의 물음인지 한 번 가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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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0절 평온한 땅과 빌려 온 하나님의 이름
성령 하나님은 우리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자처할 때 그 말을 가려내게 하시고, 약한 이웃의 평온을 먹잇감으로 보지 않는 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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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삿 1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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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탐꾼들이 본 라이스를 화자는 공들여 그립니다.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고,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평온하다는 말과 안전하다는 말에는 샤카트와 바타흐라는 두 낱말이 쓰였는데, 앞의 것은 밖으로 분쟁과 전쟁이 없고 안으로 근심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린다고 옮긴 구문도 직역하면 그 땅에는 일을 두고 굴복시키는 자가 없었고 강제력을 가진 자도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박유미 교수는 라이스를 외적의 압제 없이 평온하게 살던 성읍으로 읽습니다. 화자가 이렇게 라이스를 평화롭게 그려 냄으로써 독자의 동정은 단 사람들에게서 곧 그들의 손에 죽어 갈 라이스 사람들에게로 옮겨 갑니다.
7절 끝의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는 말은 라이스가 교만하게 문을 닫고 산 것처럼 들리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옮긴 낱말은 아람일 가능성이 높고, 상종하지 않았다는 말은 접촉이나 군사 동맹이 없었다는 중립적인 뜻입니다. 라이스는 시돈과 멀고 아람과도 동맹이 없어서 적이 쳐들어와도 도와줄 편이 없는 성읍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본 것은 그 땅의 복이 아니라 그 땅의 무방비였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네 마디로 요약됩니다. 매우 좋더라, 평화로운 백성, 넓은 땅,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곳. 그들이 평화롭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전쟁에 익숙하지 않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웃의 평화가 그들에게는 약점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가 모든 것을 덮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이 표현은 여호와께서 승리를 약속하실 때 쓰이는 거룩한 전쟁의 관용구입니다. 미가의 집 레위인에게서 받은 엉터리 신탁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서슴없이 동족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하나님이 그 땅을 단 지파에게 넘겨주셨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넘겨주신 땅은 라이스가 아니라 그들이 차지하는 데 실패한 본래의 기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정당했던 까닭은 가나안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인데, 라이스는 평화로운 백성이었으니 심판하실 이유가 없는 성읍입니다. 이 장면은 민수기 13장의 정탐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따라 합니다. 올라가자는 재촉은 갈렙의 말을 닮았고 그 땅이 매우 좋다는 보고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닮았습니다. 형식은 거룩한 역사의 옷을 입었지만 내용은 약한 자를 향한 탐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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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넘겨주셨다는 말만큼 쉽게 쓰이고 또 위험한 말도 드뭅니다. 좋은 땅이 보이고, 기회가 열리고, 상대가 약해 보이면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인도라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문이 하나님이 여신 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열린 문 너머에 누군가의 평온이 짓밟힐 자리가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도 성장과 확장의 시대에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을 너무 넉넉하게 썼습니다. 이웃 교회의 성도를 데려오는 일, 약한 교회를 흡수하는 일, 남의 수고 위에 간판을 다는 일에 축복의 언어를 붙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무엇을 얻었을 때 먼저 그 얻음 뒤에 눈물 흘린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같은 분별이 필요합니다. 일터에서 경쟁자가 무너졌을 때, 거래에서 상대가 사정을 몰라 유리한 조건이 생겼을 때, 우리는 쉽게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주시는 작은 불편함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약한 자의 무방비를 우리 손에 넘겨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방비를 지켜 주라고 우리를 보내시는 분입니다. 오늘 내 입에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이 나올 때, 그 말을 한 번 멈추고 화자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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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절 무장한 채 평안을 묻는 사람들
삼위 하나님은 칼을 문간에 세워 두고 평안을 묻는 입술을 꿰뚫어 보시며, 참된 평화를 칼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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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삿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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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지파의 가족 가운데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합니다. 지금까지 사사기에 나온 군대들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인데, 정탐꾼들의 선동에 동조한 이가 많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기럇여아림 뒤에 진을 치고, 그곳은 오늘까지 마하네 단, 곧 단의 진영이라 불립니다. 이 이름은 앞선 삼손 이야기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셨던 곳입니다(13:25). 기대 속에 시작한 삼손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났듯 단 지파의 이주 계획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을 이 이름이 미리 알려 줍니다. 한때 성령이 한 사람을 휘저으시던 자리가 이제 무장한 무리가 욕심을 품고 진을 친 자리로 기억됩니다.
군대는 에브라임 산지로 올라가 다시 미가의 집 앞에 이릅니다. 그때 다섯 정탐꾼이 입을 엽니다.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이 말은 수사 의문문으로 은근히 알리고 간접적으로 선동하는 화법입니다. 그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도 자기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노골적으로 빼앗으라고 말하지 않는 이 말투가 오히려 더 간악합니다. 마땅히 행할 것이라는 말은 본래 옳은 일을 가리킬 때 쓰일 법한 말인데, 여기서는 도둑질을 부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옳음이라는 말 자체가 각자의 소견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다섯 사람은 청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에게 문안합니다. 문안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에게 평안에 관해 물었다는 뜻입니다. 6절에서 청년이 그들에게 평안히 가라고 샬롬을 빌어 주었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와 그에게 샬롬을 묻습니다. 그런데 그 곁 문 입구에는 무기를 지닌 육백 명이 서 있습니다. 청년을 겁주기 위한 무력시위입니다. 평안을 묻는 입술과 문간에 선 칼이 한 장면 안에 나란히 놓였습니다. 평안이라는 말은 남았으나 평안의 내용은 비어 버렸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를 참된 샬롬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선지자들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 말하는 자들을 꾸짖었고,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7). 세상의 평안은 문간에 칼을 세워 두고 얻어 내는 평안이지만, 그리스도의 평안은 칼을 거두라 하시고 스스로 찔리심으로 이루신 평안입니다. 바울은 그분이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골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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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에도 평안이라는 낱말이 흔합니다. 평안하시지요, 평안히 가십시오. 그런데 그 인사 곁에 무엇이 서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안부를 묻지만 속으로는 상대에게서 얻어 낼 것을 계산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드러운 말로 권하지만 뒤에 숫자와 힘과 여론을 세워 두고 사실상 강요하는 일이 있습니다. 회의에서, 직분자 선출에서, 공동체의 결정 과정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샬롬이라는 말은 남아도 샬롬은 사라집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대화가 문간에 칼을 세워 두지 않는 대화이기를 바랍니다. 다수라는 힘으로 소수를 에워싸지 않고, 직분이라는 무게로 약한 이의 입을 막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평안을 묻는 말 뒤에 목소리의 크기나 경제력이라는 무기를 세워 두지는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는 말을 들을 때 분별하십시오. 그 마땅함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인지, 이미 정해 놓은 욕심에 붙인 이름인지 물어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안부를 물을 때, 그 물음 뒤에 아무것도 세워 두지 않은 빈손으로 묻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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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0절 마음에 기뻐한 제사장
성자 하나님은 더 큰 자리를 내미는 유혹 앞에서 아버지의 뜻을 붙드시고, 삯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양 곁에 머무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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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삿 1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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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사람이 신당에 들어가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옵니다. 16-18절에서 이들이 신상을 가져가는 행동은 라카흐라는 동사로 세 번 언급되는데, 이 동사는 17장 2-4절에서 미가가 어머니의 은을 훔친 장면에도 세 번 쓰였습니다. 미가가 훔친 은으로 만든 신상을 이제 단 사람들이 훔쳐 가는 것입니다. 훔친 것으로 세운 예배는 결국 훔쳐 가는 자의 손에 들린다는 인과의 무늬가 드러납니다. 문간에 서 있던 제사장은 그제야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네 개의 명령과 하나의 질문으로 이루어진 협박이었습니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라, 제사장이 되라. 그리고 한 사람의 집과 한 지파 가운데 어느 것이 낫겠느냐는 물음이 따라옵니다.
이 물음은 협박이면서 동시에 제안입니다. 청년이 미가의 집에 들어갈 때 미가는 그에게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했습니다(17:10). 단 사람들도 똑같이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말합니다. 같은 자리를 더 크게 불러 준 것입니다. 연봉과 관할과 명예가 한꺼번에 올라갑니다. 그러자 본문은 짧게 적습니다.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여기 쓰인 와이타브 레브는 몹시 만족스럽고 즐거운 상태를 가리키고, 뒤이어 붙은 문장은 조금의 갈등이나 주저함도 없이 자리를 옮겼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합류했고, 에봇과 드라빔과 신상을 스스로 챙겨 들었습니다. 돈만 주면 어디든 가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삯꾼이자 종교업자의 모습입니다.
17절부터 20절까지 화자는 그를 줄곧 그 제사장이라고만 부릅니다. 호칭이 되풀이될수록 그의 행동이 과연 제사장다운지를 꼬집는 반어가 됩니다. 그는 자기를 거두어 아들처럼 대했던 집을 등지고 그 집의 신상을 자기 손으로 들고 나갑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장면이 사사 시대가 제사장 사유화의 시대였을 뿐 아니라 배신과 힘 숭배가 만연한 시대였음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미가 한 사람의 것이었던 제사장이 한 지파의 것이 되었을 뿐, 누구도 그를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가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더 큰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한 분이 서 계십니다. 광야에서 마귀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엎드려 경배하면 다 주겠다고 했으나(마 4:8-9),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그 손을 물리치셨습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요 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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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자리의 제안은 오늘도 옵니다. 더 큰 교회, 더 높은 직책, 더 넓은 무대가 부르는 소리는 대개 합리적이고 때로는 거룩하게 들립니다. 한 사람의 집보다 한 지파가 낫지 않겠느냐는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운 셈법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리를 옮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옮기는 까닭이 부르심인지 기쁨인지입니다. 청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나님의 뜻을 여쭌 결과가 아니라 마음에 기뻐함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교회를 옮길 때, 성도들이 교회를 고를 때, 그 결정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목회자와 직분자들이 자리의 크기보다 맡겨진 양 한 마리를 더 무겁게 여기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목회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터에서 더 좋은 조건이 올 때, 봉사 자리에서 더 눈에 띄는 역할이 제시될 때 우리 마음도 쉽게 기뻐합니다. 그 기쁨을 누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 앞에서 한 번 멈추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섬기는 이들을 두고 떠나도 괜찮은지, 들고 나가는 것이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목회자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더 큰 자리의 유혹 앞에서 작은 양 떼 곁에 머무는 것이 선한 목자를 닮는 길임을 붙들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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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주신 기업을 두고
더 쉬운 땅을 찾아 떠돌던
저희의 발을 멈추게 하옵소서.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느냐는
그 물음 앞에
떳떳이 대답할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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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령님,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을
너무 쉽게 꺼내는 저희 입술을 붙드소서.
이웃의 평온을 약점으로 보지 않고
지켜야 할 복으로 보게 하시며
열린 문 너머의 눈물을
먼저 살피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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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하나님,
문간에 칼을 세워 두고
안부를 묻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다수의 힘으로 작은 목소리를 누르지 않고
빈손으로 평안을 묻는
광양사랑의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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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더 큰 자리를 내미는 손 앞에서
마음이 먼저 기뻐하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소서.
삯이 아니라 사랑으로
맡기신 양 곁에 머물게 하시고
주님처럼 끝까지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