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1:01-10 먼저 여쭈운 입, 가나안을 닮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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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죽고 후계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먼저 여쭙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먼저 올라가 싸우겠느냐는 물음에 하나님은 유다를 지목하시고 이미 그 땅을 주셨다고 승리를 약속하십니다(1-2절). 유다는 형제 시므온을 불러 함께 올라가고, 베섹에서 가나안과 브리스 족속 만 명을 치며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릅니다. 그는 자기가 칠십 왕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이 갚으셨다고 고백하고 예루살렘에서 죽습니다(3-7절). 유다는 이어 예루살렘을 치고 산지와 남방과 평지로 내려가 헤브론의 아낙 자손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입니다(8-10절). 승리의 기록인데, 그 승리의 결에 이미 금이 그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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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사사기를 엽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로 끝나는 책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책을 "하나님 나라를 구현할 이상왕을 열망하는 사사기"라고 이름 붙이고, 여호수아서가 "일사불란하고 통일된 가나안 정복 전쟁을 다루는 데 반해, 사사기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지리멸렬한 패배를 에누리 없이 기록하고 있다"고 정리합니다. 같은 땅, 같은 백성인데 두 책의 목소리가 이렇게 다릅니다. 여호수아서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여 준다면, 사사기는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흘려보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 시대적 배경은 가나안 정착기입니다. 대략 주전 1200년에서 1000년 사이, 왕정이 서기 전 이백여 년입니다. 이스라엘은 중앙 정부도 상비군도 없이 열두 지파의 느슨한 연합체로 살았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여호수아가 왜 모세처럼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는지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군사적 이유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전 민족 차원의 교두보 확보와 땅의 분배가 끝난 제3단계는 "각 지파별 책임하에 국지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중앙 지도자보다는 각 지파별 전략과 힘의 효율적 분산이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이유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중앙 정치 지도자보다는 중앙 성소와 제사장들 중심으로 신앙적으로 뭉치는 종교 국가가 되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곧 지도자의 공백은 사고가 아니라 설계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왕 노릇 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실패합니다. 사사기 1장부터 3장 6절까지는 그 실패의 진단서입니다. 옥스퍼드는 1장 전체의 강조점이 "성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임을 밝히는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뒤로 갈수록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 혹은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는 진술이 빈번해지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정복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불완전한 순종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문학적으로도 오늘 본문은 책 전체의 문을 여는 자리입니다. 옥스퍼드는 사사기의 서론부 첫머리와 종결부 첫머리가 정확히 짝을 이룬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1장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겠느냐 묻고 여호와께서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답하시는데, 20장 18절에서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이 반복됩니다. 다만 싸움의 상대가 다릅니다. 처음에는 '가나안 족속'이었는데 마지막에는 '베냐민 자손'입니다. 밖을 향하던 칼이 안을 향하게 되는 것, 그것이 사사 시대의 이백 년입니다. 오늘 본문의 승리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마냥 가볍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 정경적으로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의 속편이면서 사무엘서의 전편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의 속편으로 읽어야 함과 동시에 이상왕이 다스리는 왕정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사무엘서의 전편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사기가 바라는 왕은 아무 왕이 아닙니다. 요담의 나무 우화(9장)는 권력의 위험을 신랄하게 경고합니다. 사사기가 기다리는 왕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는 왕, 하나님의 통치를 몸으로 사는 왕입니다. 그 기다림은 다윗에게서 잠시 응답되었다가, 마침내 유다 지파에서 나신 한 분에게서 완성됩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계 5:5).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하신 그 지명은, 아주 멀리서 보면 갈보리를 향해 먼저 올라가신 한 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이 본문을 유다 지파의 무용담으로 읽으면 길을 잃습니다. 사사기는 영웅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서전입니다. 화자는 인물의 행동을 담담히 적어 놓고, 그 행동의 결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유다는 잘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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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지도자는 떠나고, 왕은 남으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도 자기 백성을 친히 이끄시는, 결코 공석이 되지 않는 참된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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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첫 문장은 부고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절). 가나안 정복을 진두지휘하던 지도자가 세상을 떠났고,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운 것과 달리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빈자리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여쭙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절). 여호와께서 대답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절). 그런데 지목받은 유다가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먼저 형제 시므온을 찾아갑니다. 내 제비 뽑은 땅에 함께 올라가 주면 나도 네 제비 뽑은 땅에 함께 가겠다는 제안입니다(3절).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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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입입니다. 지도자를 잃은 백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묻는 일이었습니다. 중재자 없이, 온 지파가 함께, 곧장 여호와 앞에 나아갑니다. 당시 성막은 실로에 있었으니 그들은 실로에 모여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시작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모든 것이 잘될 때가 아니라 의지하던 것이 사라질 때 드러납니다. 그들은 절망 대신 기도를, 두려움 대신 사명을 택했습니다. 김회권 교수의 표현대로 "인간 지도자가 죽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어야" 했고, 이스라엘은 아직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음의 원어를 들여다보면 결이 조금 다릅니다. 개역개정이 "우리 가운데"로 옮긴 히브리어 '라누'는 "우리를 위해"(for us)로 번역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겠습니까?" 전성민 교수는 여기서 "지도자의 부재에 대한 불안이 은연중에 묻어난다"고 읽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지만, 그 질문 안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앞장서 줄 사람이 없다는 막막함입니다. 게다가 '가나안 족속'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 명사입니다. 가나안에는 여러 민족이 살았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하나의 거대하고 두려운 영향력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음은 경건했으나 마음은 이미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 떨림을 정면으로 받아 주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그리고 곧바로 근거를 주십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여기 '주었노라'는 완료형 '나탈티'입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의 결과를 미리 확정해 놓고 백성을 그 확정 안으로 초대하시는 화법입니다. 옥스퍼드는 4절의 두 동사 '올라가매'와 '넘겨 주시니'가 모두 와우 계속법으로 이어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그 행하는 것을 즉각적이며 완전하게 성취하게 하시는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순종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 안는 걸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법을 배웁니다. 은혜가 먼저고 순종이 나중입니다.
문제는 유다의 반응입니다. 질문은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했고, 그 질문은 "우리를 위해" 누가 올라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선봉으로 부름받은 유다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자기 친형제 지파 시므온에게만 눈을 돌립니다. 전성민 교수는 본문이 '유다 지파', '시므온 지파'가 아니라 인격체를 연상시키는 '유다'와 '시므온'을 쓰고 거기에 "그의 형제"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유다와 시므온의 사적인 관계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시므온의 기업이 유다의 기업 안에 있었으므로(수 19:1, 9) 두 지파의 협력에는 현실적 합리성이 있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오히려 이 동맹을 "하나님이 유다에게 주신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한 징표"로 평가하는 견해도 소개합니다. 그러나 사사기 전체의 흐름을 아는 독자에게 이 장면은 편치 않습니다. 온 지파의 물음에 온 지파의 응답이 아니라 두 형제의 연합으로 답한 것, 그 좁아진 원(圓)이 훗날 드보라의 노래에서 참전하지 않은 지파들에 대한 책망으로, 마침내 지파 간 내전으로 번져 가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실패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분열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유다를 쓰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입니다. 완벽한 순종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흠 있는 순종을 붙들고 그 안에서 당신의 약속을 밀고 가시는 분입니다. 참된 지도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참된 왕은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헬라어로 옮기면 '예수'가 됩니다. 여호수아는 죽어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으나,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우리의 지도자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먼저 올라가서 싸우실 이가 누구입니까"라는 사사기의 첫 물음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이 바로 그분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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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떠난 자리에서 무엇을 먼저 하는지가 그 공동체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유례없는 이양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 세대를 이끌던 목회자들이 은퇴하고, 오래 자리를 지키던 장로와 권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교회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찾는 일입니까, 하나님께 묻는 일입니까. 후임자를 세우는 방식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 세습과 사유화의 문제, 카리스마 있는 한 사람에게 공동체 전체를 얹어 두었다가 그 사람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는 일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사사기는 정확히 그 위험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능력과 권위에 의존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지는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첫째, 우리 교회의 중심에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놓이도록 함께 지켜 갑시다. 목사가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교회, 그러나 목사를 사랑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둘째,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쭙는 습관을 회복합시다. 가정의 진로, 사업의 결정, 교회의 사업, 무엇이든 먼저 묻는 순서를 되찾읍시다. 셋째, 유다처럼 '내 형제'만 챙기는 좁은 연대에 머물지 맙시다. 마음 맞는 몇 사람끼리의 소그룹은 편하지만, 그 편안함이 공동체 전체를 향한 부르심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주에 평소 말을 섞지 않던 한 지체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한 걸음이 사사기의 내리막을 거꾸로 오르는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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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이긴 자리에서 배운 가나안의 손
하나님은 폭력을 행한 자에게 그가 행한 그대로 갚으시는, 이방인의 입술로도 인정받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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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 올라가자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베섹에서 만 명이 쓰러집니다(4절). 유다는 베섹의 통치자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 이기고(5절), 도망하는 그를 끝까지 쫓아가 붙잡아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릅니다(6절). 그때 아도니 베섹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7절).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는 거기서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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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승리의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4절은 유다가 올라갔다고 말한 뒤 곧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고 적습니다. 3절에서 그렇게 공들여 등장했던 시므온은 이 장면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화자는 이 승리가 유다와 시므온의 연합 전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임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옥스퍼드는 '싸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함'의 본래 의미가 '먹다'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짚습니다. 민수기 14장 9절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거민을 두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할 때 쓰인 '레헴'과 자음이 같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거인도 밥상이고, 불신의 눈으로 보면 밥상도 거인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대적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눈의 크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눈부신 승리의 한복판에 이 책의 첫 균열이 새겨집니다. 유다는 도망하는 아도니 베섹을 붙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릅니다.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다시 무기를 잡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고, 엄지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빠르게 달릴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는 '끊으매'로 번역된 '와예갓체추'가 강의형(Piel)으로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는 단호함"을 표현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대목을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신체절단형이 실행된 예가 없으며, 당시 주변 문화와 달리 이스라엘이 살아 있는 적군의 신체를 자른 다른 예도 성경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가 가나안의 풍습에 물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를 가나안의 잔인한 풍습대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박유미 교수도 같은 아이러니를 짚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가나안 족속의 잔인한 관습을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지파가 그대로 따라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화하고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첫 전투, 첫 승리, 그런데 벌써 이깁니다. 그리고 벌써 닮습니다.
더 서늘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넘겨주신 승리인데, 승전의 마무리는 감사가 아니라 적장의 손발가락이었습니다. 승리 자체가 사람을 지켜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긴 자리가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이길 때 우리는 방법을 묻지 않게 되고,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덮어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됩니다. 김회권 교수는 사사기 전체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읽는다는 것이 "가나안 땅 정복의 성공과 실패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심 여부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점에 주목하며 사사기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이라는 말이 아프게 들립니다. 유다의 마음은 이미 두 조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락의 절정에서, 뜻밖의 인물이 신학자가 됩니다. 사로잡힌 이방 왕 아도니 베섹입니다. '아도니 베섹'은 고유명사라기보다 '베섹의 주(主)'라는 직책 호칭에 가깝습니다. 그는 자기가 칠십 명의 왕에게 행한 잔혹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고, 자기에게 닥친 일에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읽어 냅니다.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언약 백성이 아닌 사람이, 심판을 당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가장 먼저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 신학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도덕적 요구를 하시는 부족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심판자이십니다. 가나안 정복은 단순한 영토 전쟁이 아니라, 사백 년을 참으신 하나님이(창 15:16) 마침내 그 잔혹에 응답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훗날 사도는 같은 원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러나 심판의 원리를 아는 것과 그 원리 아래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이후 이백 년 동안 이 원리를 몸으로 겪으면서도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배교하고, 압제당하고, 부르짖고, 구원받고, 또 잊어버립니다. 아도니 베섹은 한 번에 알아본 것을 언약 백성은 이백 년 동안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7절 마지막의 "죽었더라"에 쓰인 '무트'는 인위적 죽음이 아니라 자연적 죽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를 두고 아도니 베섹이 살해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생활하다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여기서 "유다 지파가 진멸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고 말합니다. 잔인해야 할 곳에서 잔인했고, 단호해야 할 곳에서 미적거렸습니다. 순종의 초점이 어긋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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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한 거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세상의 방식으로 누리는 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면서 세상의 마케팅 논리를 그대로 가져오고, 교회를 세운다면서 기업의 성과주의를 그대로 들여옵니다.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고, 밀어붙이는 사람을 유능하다 하고, 이겼으니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언어로 포장되었을 뿐 손은 이미 가나안의 손입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상대를 짓밟는 방식은 조금도 정의롭지 않은데, 우리는 옳은 편에 섰다는 확신 하나로 잔인함을 정당화합니다.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언어의 절단, 이겨 놓고도 상대의 엄지를 마저 자르고 마는 습관이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흔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점검할 것은 결과가 아니라 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첫째, 이번 주에 내가 이긴 자리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내가 옳았고 상대가 물러선 자리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내 손이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긴 다음의 한마디, 이긴 다음의 표정이 우리의 진짜 신앙입니다. 둘째, 승리 뒤에 감사를 놓치지 맙시다. 유다의 첫 승리 기사에 감사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잘될 때 가장 자주 기도를 잊습니다. 셋째, 아도니 베섹의 고백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남에게 행한 것이 언젠가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협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정직하게 지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누군가의 존엄을 자르고 있지 않은지, 말과 결정으로 누군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있지 않은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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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이겼으나 다 이기지 못한 자리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면서도, 백성의 미완의 순종을 정직하게 기록하시는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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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섹의 승세를 몰아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고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사릅니다(8절). 그 후 남쪽으로 내려가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웁니다(9절). 그리고 헤브론으로 가서 거기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입니다. 화자는 짧게 덧붙입니다.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10절). 세 절 안에 북쪽 예루살렘에서 남쪽 헤브론까지, 산지와 네겝과 쉐펠라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전선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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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승리의 규모를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없이 치른 첫 전쟁에서 유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둡니다. 예루살렘은 훗날 다윗이 다시 정복해야 했던 난공불락의 성이고(삼하 5:6-7), 헤브론의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는 정탐꾼들을 떨게 했던 아낙 자손입니다(민 13:22). 거대한 체구로 유명해 이스라엘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였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이 오늘 본문에서 한 줄로 정리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거인의 이름은 목록이 됩니다. 여호수아 15장 14절은 이들을 물리친 사람이 갈렙이라고 적는데, 사사기는 같은 사건을 유다 지파의 업적으로 다시 기록합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를 두고 사사기 1장이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각 지파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을 수집해놓은 것"이며, 갈렙과 옷니엘의 승리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유다 지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인물이 갈렙입니다. 그는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수 14:14)입니다. 그니스는 에돔 족속과 연결되는 이름이고(창 36:11, 15, 42), 그의 가문은 출애굽 때 합류한 '수많은 잡족'(출 12:38)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곧 그는 혈통상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가장 많고 가장 강력한 유다 지파에서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가문이 이방 출신의 작은 가문이었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여기서 "땅을 차지하는 문제가 군사력이나 전술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읽어 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법이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하나님은 규모가 아니라 신뢰를 보십니다. 여든다섯의 노인이 가장 무서운 적이 사는 땅을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낙 자손을 문제의 본질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이 승리의 목록 안에 슬며시 그림자를 심어 둡니다. 유다가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단락인 21절은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라고 적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루살렘은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정복됩니다. 이 점령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거나, 어쩌면 애초에 완전한 점령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헤브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다지만 아낙 자손은 이후에도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습니다(수 11:22). 승리는 진짜였지만 완결은 아니었습니다. 옥스퍼드가 정리한 대로 이스라엘의 '불완전한 정복'은 곧 '불완전한 순종'의 초상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단락에 대해 "1장 8-10절은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족속과, 헤브론의 거인 족속을 패퇴시킨 이야기를 보도한다"고 하면서, 사사기 1장 전체를 두고 "개별 지파는 가나안 정복을 향한 열의를 내지 않았다"고, 그리고 "패배의 이유는 매 사건마다 백성들이 그 땅의 원주민들을 파멸하라는 야웨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진단합니다. 이 진단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은혜롭습니다. 성경이 승리를 부풀리지 않고 실패를 감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백성의 홍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완을 정직하게 기록하시는 분이고, 그 정직함이야말로 우리가 이 책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유다가 다 이루지 못한 정복을 다윗이 이어받고, 다윗이 다 이루지 못한 통치를 다윗의 자손이 완성하십니다. 유다 지파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먼저 올라가셔서, 우리가 결코 다 쫓아내지 못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그가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사사기는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는 완결이 없다는 것을 이백 년에 걸쳐 가르치는 책입니다. 그 가르침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왕을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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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오늘도 '이겼으나 다 이기지 못한 자리'입니다. 지난 세기 우리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세계가 놀랄 만한 부흥이었고,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성공주의, 물량주의, 세습, 권위주의,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무관심입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함께 거주'하다가 어느 순간 주도권을 가져갑니다. 사사기 1장의 뒷부분이 정확히 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쫓아내지 못했고, 다음에는 함께 살았고, 나중에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끼어 살게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첫째, 우리 각자의 '골짜기'를 정직하게 이름 붙여 봅시다. 오래 회개했으나 여전히 남아 있는 습관, 몇 년째 미루고 있는 화해, 손대지 못한 채무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남겨 둔 것은 언제나 자라납니다. 둘째, 갈렙의 자리를 사모합시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방 출신의 작은 가문에서 가장 큰 믿음이 나왔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배움이 짧다고, 형편이 어렵다고 물러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규모가 아니라 신뢰를 보십니다. 셋째,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에게 '점령 목록'이 아니라 '순종의 방식'을 물려주었으면 합니다.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어떻게 걸었느냐가 유산입니다. 오늘 하루, 다 이루지 못한 자리에서도 도망하지 않고 한 걸음 더 올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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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도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으신 하나님,
여호수아가 죽은 그 아침에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살아 계셨던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것이 사라질 때 절망보다 먼저 주님을 찾게 하시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답이 아니라 주님을 구하게 하소서.
우리 입술이 "누가 우리를 위해 먼저 올라가리이까" 물을 때,
이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먼저 오르신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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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기도 전에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순종이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는 걸음임을 알게 하소서.
그러나 이긴 자리에서 방법을 잃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승리를 세상의 손으로 누리지 않게 하시고,
옳은 편에 섰다는 확신으로 잔인함을 정당화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 우리 손이 무엇을 자르고 있는지 정직하게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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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왕의 입술로 주의 공의를 고백하게 하신 주님,
우리가 남에게 행한 것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그 정직한 이치 앞에서 두려움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가정과 일터와 이 사회에서 힘없는 이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잘린 손을 붙들어 일으키는 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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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쫓아내지 못한 것들을 아시는 주님,
우리 안에 오래 함께 거주해 온 것들을 오늘 이름 붙여 내어놓습니다.
남겨 둔 것이 자라 우리를 다스리기 전에 주의 은혜로 정리하게 하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함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이룬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간 순종의 방식을 물려주게 하소서.
우리의 미완을 정직하게 기록하시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그 신실하심에 기대어 오늘 하루도 한 걸음 올라가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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