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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9:01-08 창고를 열어 보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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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에서 온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의 쾌유 소식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내오자, 왕은 기뻐하며 사절들에게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남김없이 열어 보입니다(1-2절). 뒤늦게 나아온 이사야가 두 번 묻고, 왕은 하나도 감춘 것이 없다고 스스로 답합니다(3-4절). 그 대답 위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립니다. 네 집의 모든 소유가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네게서 태어날 자손 몇이 그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는 선고입니다(5-7절). 왕은 그 말씀이 좋다고 수긍하면서,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라는 한마디를 덧붙입니다(8절). 앗수르를 이긴 밤과 그림자가 물러간 아침을 지나온 사람의 마지막 말이 여기서 이렇게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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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 전반부의 마지막 문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36-39장을 두고 "다른 장들에는 운문으로 된 신탁들이 압도적인데 비하여 이 네 장에서는 산문이 지배적"이라고 지적하며, 세 이야기 모두 이사야가 등장하지만 "그의 역할은 매우 소극적"이고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은 히스기야 왕"이라고 정리합니다. 36-37장은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와 극적인 구출을, 38장은 왕의 발병과 치유를, 그리고 39장은 바벨론 사절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전합니다. 앞의 두 이야기에서 히스기야는 기도의 사람으로 빛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얼굴을 보입니다. 같은 사람의 두 얼굴을 나란히 놓은 것이 이 네 장의 구성입니다.

# 순서에 손이 닿아 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36-39장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연대기적 순서를 무시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며, 역사적 순서대로라면 36-37장이 38-39장 다음에 와야 한다고 봅니다. 39장 1절에 등장하는 므로닥발라단을 근거로 계산하면 히스기야의 발병과 치유는 주전 701년 산헤립의 원정보다 "적어도 십이 년 또는 삼 년 이상 앞선 사건"이 됩니다. 데이비드 젝맨도 같은 자리에서 "연대적으로 38-39장이 36-37장보다 앞이라는 것"이며 "이사야가 연대적 순서를 뒤집은 것에는 주제상의 목적과 신학적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뒤집었을까요. 김필회 교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죽음에서 극적인 해방을 받았지만 "이러한 구원 경험이 이들의 미래를 영원히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제의 구원은 오늘의 면허가 아닙니다.

# 므로닥발라단이 누구인지 알아야 이 사건의 정치적 무게가 보입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그는 남부 바벨론에 정착한 아람 민족 비트야킨 지파의 수장으로, 앗수르 왕 살만에셀 오세가 죽은 뒤 바벨론의 통치권을 장악해 주전 722년부터 유프라테스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르곤 이세에게 710년에 추방당합니다. 705년 사르곤이 전쟁터에서 죽고 앗수르가 후계 다툼으로 혼란에 빠지자 그는 다시 왕위에 올라 아홉 달 남짓 바벨론을 다스리고, 내분을 정리한 산헤립에게 703년 완전히 축출됩니다. 곧 이 사람은 앗수르에 맞서 평생을 도모한 반앗수르 진영의 주모자였습니다. 존 오스월트도 그가 "아시리아를 대적하기 위한 계략을 모의"했고 "아시리아 제국 안에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자"를 찾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합니다. 축하 사절의 겉옷 아래 동맹 제안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장에서 처음으로, 유다의 미래를 삼킬 이름이 무대에 올라옵니다. 바벨론입니다. 이사야서 1장부터 38장까지 유다를 위협한 이름은 언제나 앗수르였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하룻밤에 무너진 그 자리에서, 축하 편지를 들고 찾아온 손님의 이름이 다음 시대의 심판자가 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39장의 심판이 "701년에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사건과 히스기야에게 준 구원 약속 이후의 저 너머에 있는 먼, 그러나 40장 이하에서는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미래"를 향한다고 씁니다. 그래서 39장은 문을 닫는 장이면서 동시에 여는 장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곧바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가 시작됩니다. 심판의 예고 바로 뒤에 위로의 명령이 놓이는 이 배치가 이사야서의 문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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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먼 나라에서 온 편지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열방 앞에서 증언하도록 기회를 여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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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냅니다(1절). 왕은 그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국 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사 39:2)고 본문은 적습니다. 감춘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왕은 자기가 가진 전부를 처음 본 손님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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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때에'라는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보아야 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현재의 문맥에서 '그 때에'는 39장을 바로 앞에 나오는 히스기야의 발병과 치료 이야기에 연결시켜준다"고 짚습니다. 곧 이 사건은 해 그림자가 뒤로 열 도 물러가는 기적을 본 사람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심을 몸으로 겪은 사람, 십오 년을 선물로 받은 사람, "아버지는 자녀에게 주의 진실을 알게 하리이다"(사 38:19)라고 노래한 바로 그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 노래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을 때 편지가 도착한 것입니다.

편지가 왜 왔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사절단에 대한 왕의 환대가 "이들이 단순히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바벨론 사절단은 아마도 앗수르가 모르게 비밀리에 우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 같다"고 봅니다. 그리고 왕이 무기고까지 열어 보인 것이야말로 "바벨론 사절단의 목적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덧붙입니다. 은과 금은 자랑거리지만 무기고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협상 자료입니다. 나에게 이만한 병력이 있으니 함께 앗수르를 치자는 계산서를 펼친 것입니다. 향료는 제사와 화장에 쓰이던 귀한 물건이고, 기름은 때로 화폐 노릇을 하던 값비싼 물품이었습니다. 왕은 국고와 군사력을 한꺼번에 공개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왕의 감정을 먼저 적습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2절 전반부를 "그리고 히스기야가 그들로 인하여 기뻐했다"로 직역합니다. '사마흐'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기쁨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부끄러운 기쁨이 아닙니다. 오스월트는 이 대목을 이렇게 읽습니다. "왜 히스기야가 사절단을 기쁘게 받아들였는지는 쉽게 이해가 된다. 아무튼, 세계적인 대 통치자가 조그마한 유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우리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길 때에 엄청난 아부가 생긴다." 문제는 기쁨 자체가 아니라, 그 기쁨이 무엇을 밀어냈는가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의 표현대로 "성공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기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제력이 부족하다."

무엇이 밀려났는지는 분명합니다. 오스월트는 "지금 히스기야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열방에게 선포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왔다"고 말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물어야 마땅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났는가. 어떻게 앗수르가 물러갔는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왕은 성전을 보여 줄 수도 있었고, 물러간 그림자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자기 눈물을 보신 하나님을 증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창고를 열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 시기의 왕을 두고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대하 32:25)라고 적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 아닌 것을 자랑할 때, 그 자랑은 곧 은혜를 지운 자리에 세워집니다. 훗날 주님은 같은 문제를 창고의 비유로 다루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 6:19). 카리스 종합주석도 이 대목에서 히스기야의 보물이 "모두 도둑맞을 수 있는 것들"이었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그 어느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는 저 하늘의 창고"에 쌓지 않고 있음을 반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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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편지가 옵니다. 뜻밖의 인정, 예상하지 못한 초대, 나를 대단하게 여겨 주는 시선입니다.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다만 그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여는지가 우리를 드러냅니다. 병에서 나은 이야기를 나눌 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병원 이야기와 보험 이야기와 인맥 이야기를 합니다. 사업이 회복된 이야기를 나눌 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매출과 규모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자꾸 내가 가진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히스기야의 실수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이번 주에 누군가 여러분의 회복을 축하하거든, 대답의 첫 문장을 미리 정해 두십시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로 시작하는 한 문장입니다. 그 한 문장을 준비해 두지 않으면 우리 입은 늘 하던 대로 창고 문부터 엽니다.

또 하나, 감춰야 할 것을 아는 지혜를 구합시다. 히스기야가 어리석었던 것은 자랑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을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시대입니다. 아이의 성적표도, 새로 산 물건도, 가정의 내밀한 사정도 손바닥 안의 창고에 펼쳐 놓습니다. 그러나 다 보여 준다고 해서 정직한 것은 아닙니다. 정직은 감출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누구 앞에 두어야 하는지를 아는 분별입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자랑을 위해 여는 문과 섬김을 위해 여는 문을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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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선지자의 두 물음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세우지 않으시고,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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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사 39:3). 왕은 첫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둘째 질문에만 답합니다.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러자 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사 39:4). 감출 생각이 없는 대답, 오히려 뿌듯함이 배어 있는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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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던진 질문의 성격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화가 "심판선포 앞에 나오는 이사야와 왕의 대화는 현재의 문맥에서 고발의 성격을 갖는 것 같다"며, "아마도 이사야는 왕의 입을 통해 스스로를 고발하도록 유도했"다고 읽습니다. 선지자는 몰라서 묻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도 "바벨론의 사신이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갔을 때 그 소문은 금방 도처로 퍼졌을 것"이고 "왕이 나라의 보물고나 무기고를 보인 것에 대해서도 이사야는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정리하면서, 이 질문이 "왕을 책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알면서 묻는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왕이 첫 질문을 건너뛴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왕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이들이 먼 나라, 곧 바벨론에서 왔다고 알려준다. 왕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한다"고 관찰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학자들의 설명을 셋으로 정리합니다. 칼빈은 왕이 자기 명성이 먼 바벨론까지 퍼졌음을 은근히 자랑한 것으로 보고, 비트링가는 먼 나라 사신을 환대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며 자기 잘못을 변호한 것으로 보며, 크노벨은 바벨론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선지자를 안심시키려 한 것으로 봅니다. 어느 쪽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왕은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라는 핵심을 피했습니다. 동맹 제안이 오갔다는 사실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에서 건너뛰는 질문이 대개 우리의 급소입니다.

'원방'이라는 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먼 땅'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먼 땅은 하나님의 구원이 미쳐야 할 지평으로 자주 등장하지만(사 5:26; 43:6), 여기서 먼 땅은 자랑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먼 땅은 백 년 뒤 유다의 자손들이 끌려갈 유배지의 이름이 됩니다. 히스기야가 자랑스럽게 발음한 그 지명이 그대로 심판의 주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을 하나님이 그대로 받아 쓰시는 장면을 자주 보여 줍니다.

이 두 물음은 성경의 오랜 물음의 계보 위에 있습니다. 동산에서 하나님은 숨은 사람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물으셨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어 스스로 판결을 내리게 했습니다(삼하 12:1-7).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처럼 왕의 허물을 담대히 책망하는 것이 "선지자의 숭고한 임무 중 하나였다"고 짚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 부인한 제자에게 벌을 내리는 대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함정이 아니라 문입니다. 그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하는 순간 회복이 시작됩니다. 다만 히스기야는 그 문 앞에서 자랑을 택했고, 그래서 질문은 선고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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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도 묻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묻는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무엇을 보여 주었느냐고, 왜 그랬느냐고 묻는 사람은 곧 불편한 사람으로 분류되고, 우리는 나를 칭찬해 주는 목소리만 남겨 두는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합니다. 그렇게 정리된 자리에는 축하 사절만 남고 선지자는 없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나에게 불편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을 곁에 두십시오. 배우자여도 좋고, 오래된 신앙의 벗이어도 좋고, 소그룹의 지체여도 좋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을 때 화를 내지 않기로 미리 결심해 두는 것입니다. 결심이 없으면 두 번째 질문부터는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 훈련을 권합니다. 하루를 마치며 오늘 나는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무엇을 감추었는가, 건너뛴 질문은 무엇이었는가를 적어 보십시오. 우리가 피해 간 질문의 목록이 곧 우리가 다루어야 할 회개의 목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몰아세우지 않으시고 물으십니다.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할 자리를 오늘 저녁에 마련하는 것이 이 본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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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절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들

하나님은 우리가 자랑한 바로 그것으로 우리를 깨우치시며, 심판 가운데서도 언약을 놓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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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릅니다.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사 39:5). 그리고 선고가 내립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39:6).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7). 재물과 자손, 곧 왕이 붙들고 있던 두 가지가 모두 그가 문을 열어 보인 그 나라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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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이 여기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호칭이 "이제 전달하려는 것이 예언자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예언자가 "예루살렘 제의의 공식적인 신명인 만군의 여호와를 사용하여 심판을 선포한다"고 설명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병행 본문인 열왕기하 20장 16절에는 '만군의'라는 말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짚으며, 이사야서가 이 호칭을 넣은 이유를 그로건의 말로 정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여호와의 권능 행사에 무한한 자원들이 사용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자원들을 대단하게 여겼을 수 있지만, 여호와의 자원들은 훨씬 더 위대했다." 창고 하나를 가진 사람이 만군을 가지신 분 앞에 선 것입니다.

심판의 형태를 보면 하나님의 정밀함에 놀라게 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모티어를 따라 이렇게 정리합니다. 히스기야는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라고 말했고 이사야는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라고 응답했으며, 히스기야가 '바벨론'이라 말했고 이사야도 '바벨론'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쓴 낱말이 그대로 선고문의 낱말이 됩니다. 김필회 교수도 "왕이 자랑하며 바벨론의 사절들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재물들이 바로 그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다 약탈당할 것"이라고 씁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임의적인 보복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문장을 그대로 되읽어 주시는 방식으로 임합니다. 자랑은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은 그대로 압수 목록이 됩니다.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라는 표현도 무겁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루아침에 모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래 여러 세대가 쌓아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의 한나절 자랑이 수백 년의 축적을 날립니다. 실제로 궁중 보물의 일부는 이미 산헤립에게 바쳐졌고(왕하 18:14-16), 나머지는 여호야긴 때와 시드기야 때 느부갓네살에게 몰수당합니다(왕하 24:13; 25:13-17).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본절의 시점으로부터 무려 100여 년이 지난 후에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적으면서, 물론 바벨론 유수가 히스기야의 죄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균형도 함께 놓습니다. 심판은 즉시 오지 않고 백 년을 걸어옵니다. 그 느린 걸음을 무죄 선고로 오해하는 것이 인간의 오랜 착각입니다.

자손에 대한 선고는 더 아픕니다. 김필회 교수는 "왕의 아들들이 보좌에서 쫓겨나 이방 왕의 신하가 되어 종사함은 수치에 해당한다"고 지적합니다. '환관'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사리스'는 왕궁의 고위 관리를 뜻하기도 하고 거세된 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다윗의 왕좌를 이어야 할 자손이 남의 궁에서 시중드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그 바벨론 왕궁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단 1:3-4) 뽑힌 소년들 가운데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심판의 자리가 증언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면서도 언약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으려 창고를 지킨 왕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7)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골 2:3)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수 없는 창고는 오직 그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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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쌓은 것은 언제나 옮겨집니다. 부동산도, 예금도, 학위도, 인맥도 결국 다른 이름 아래로 넘어갑니다. 문제는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자랑이었을 때 함께 무너지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자신의 '자랑 목록'을 한번 적어 보십시오. 누가 물었을 때 가장 먼저 꺼내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목록 옆에 이렇게 적어 보십시오. 이것은 옮겨질 수 있는 것인가. 옮겨질 수 있는 것을 자랑하며 살면, 그것이 옮겨지는 날 우리 신앙도 함께 옮겨집니다.

특히 다음 세대에 관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심판은 히스기야가 아니라 그의 자손에게 임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물려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물어야 할 때입니다. 건물과 조직과 규모는 잘 물려주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기도의 습관은 물려주지 못했다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앞 장에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주의 진실을 알게 하리이다"(사 38:19)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노래가 노래로 끝나지 않으려면, 자녀에게 보여 줄 것이 창고가 아니라 무릎이어야 합니다. 이번 주 가정예배에서 자녀에게 재산 이야기 대신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하신 일 한 가지를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것이 옮겨지지 않는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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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절 좋소이다, 그리고 내 생전에는

하나님은 심판의 선고 앞에서도 당신께 매달리는 자에게 평안과 견고함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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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릅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사 39:8).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도, 항변하지도, 취소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38장에서 죽음의 선고를 받고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통곡하던 그 사람이, 여기서는 재산과 자손을 잃는다는 선고 앞에서 조용히 수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이며, 이사야서 전반부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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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마디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김필회 교수는 두 길을 다 보여 줍니다. "일부 주석자들은 여기서 히스기야의 이기주의적이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기도 한다. '내 시대에 그러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실제로 많은 설교가 이 길을 택해 왔고, 그 지적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자녀가 끌려간다는 말을 듣고 자기 시대의 평안을 헤아리는 것은 아버지의 반응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김필회 교수는 곧바로 "이러한 이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못 박고 다른 길을 냅니다. "히스기야의 대답은 하나님의 심판 결정을 선한 결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히스기야는 한편으로는 그분의 심판을 의로운 결정으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께 의존하여 이 심판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심판을 취소시킬 수는 없지만 연기시킬 수는 있다. 앞으로 닥칠 유다의 심판에 히스기야의 책임이 없지는 않지만, 그는 후대의 왕들에게 이 심판을 어떻게 연기시킬 수 있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그 근거가 앞의 두 장에 있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했고(37장), 벽을 향해 매달렸으며(38장), 그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낙관이 아니라 의존입니다.

낱말이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평안과 견고함'의 히브리어는 '샬롬'과 '에메트'입니다. 그런데 '에메트'는 바로 앞 장에서 히스기야가 자기 기도의 근거로 내밀었던 그 낱말입니다.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사 38:3)의 '진실'이 곧 '에메트'입니다. 흔들림 없는 성실, 신뢰할 수 있는 견고함을 뜻합니다. 38장에서 자기 편에 있다고 주장했던 '에메트'가 39장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기를 바라는 선물로 되돌아옵니다. 자기 의로 내세우던 것을 은혜로 구하는 자리로 옮겨 온 것입니다. 그 이동만으로도 이 문장은 무책임한 안도와 구별됩니다.

그렇더라도 이 문장은 우리를 편하게 두지 않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장 전체를 두고 "구원약속(38:6)과 히스기야 정치(39장)의 충돌"이라 이름 붙이고, "모델이 된 히스기야의 신앙과 불신앙"이라 정리합니다. 한 사람 안에 두 가지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뼈아픈 진단을 덧붙입니다. "과거의 신앙이 현재 나의 신앙에 토양이나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안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다면 그 선택은 현재화되어야 한다." 후손들은 결국 "38장의 히스기야가 아닌 39장의 히스기야를 선택해서 심판이 현실화" 되었다고 그는 씁니다. 우리에게도 두 히스기야가 있습니다. 벽을 향해 울던 사람과 창고를 열어 보이던 사람. 오늘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다음 세대가 물려받을 이야기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 미완의 문장 바로 뒤에서 하나님은 다른 문장을 시작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사람의 마지막 말이 애매하게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첫 말이 시작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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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로 '내 생전에는'의 신앙으로 삽니다. 기후도, 연금도, 교회의 다음 세대도, 나라의 미래도, 내 임기 안에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계산이 어느새 상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계산이 얼마나 짧은지를 백 년 뒤의 성취로 보여 줍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우리가 세우는 계획의 시간표를 조금 늘려 잡읍시다. 내년이 아니라 삼십 년 뒤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지금 우리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지금 태어나지 않은 손주와, 아직 우리 교회에 오지 않은 청년과, 이 도시의 다음 세대를 위해 이름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내 생전에는'을 넘어서는 첫걸음입니다.

동시에 히스기야의 다른 면도 배워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판결을 "좋소이다"라고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쁜 소식 앞에서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를 합니다. 부인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을 선하다고 인정하는 자리에서만 새로운 순종이 시작됩니다. 심판을 취소해 달라고 조르는 대신, 이 판결이 옳다고 인정하고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삶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가 하나 있다면 그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여, 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 무엇을 하리이까." 그 기도가 놓인 자리에서 하나님은 위로의 첫 문장을 시작하십니다.

*

# 거둠의 기도

주여, 뜻밖의 인정 앞에서 마음이 부풀어 오를 때

가장 먼저 열어야 할 문이 어디인지 알게 하소서.

받은 은혜를 말할 자리에서

내가 가진 것을 늘어놓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한 문장을

잊지 않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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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몰아세우지 않고 물으시는 하나님,

오늘도 우리 곁에 묻는 사람을 보내 주소서.

불편한 물음 앞에서 화내지 않게 하시고

건너뛰고 싶은 질문일수록

그 자리에 우리의 급소가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정직한 대답이 회복의 문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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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여, 우리가 쌓은 것은 다 옮겨지고

우리가 자랑한 목록이 그대로 잃을 목록이 됨을 압니다.

옮겨질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 하시고

자녀에게 보여 줄 것이 창고가 아니라

무릎 꿇은 자리가 되게 하소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진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창고를 두게 하소서.

.

성령이여, 내 생전에만 평안하면 된다는 계산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 시대에 결정된 일이

다음 세대의 짐이 되지 않게 하소서.

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고백한 뒤

이제 무엇을 하리이까 묻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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