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2:01-20 정의와 공의가 거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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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라는 한마디로 새 시대가 열립니다.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그 날,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며 마른 땅의 냇물이며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입니다(1-2절). 그 통치 아래서 감겼던 눈이 열리고 어눌한 혀가 분명해지며, 어리석은 자를 존귀하다 부르던 뒤집힌 저울이 바로잡힙니다(3-8절). 그러나 예언자의 눈길은 곧 안일한 여인들에게로 돌아섭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포도 수확이 없고, 희락의 성읍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궁전은 들나귀가 즐기는 곳이 됩니다(9-14절). 그 폐허 위에서 신탁이 뒤집힙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 주시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정의와 공의가 그 땅에 거하여 화평과 영원한 평안이 열매로 맺힙니다(15-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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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장의 역사적 자리는 앞 장들과 같은 주전 701년 전후, 히스기야 왕의 시대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서에서 28장부터 32장까지 수집된 예언들을 "열방 신탁과 히스기야 — 어떻게 해야 유다가 살아남는가"라는 한 물음 아래 묶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를, 히스기야는 애굽을 붙들었으니 의존 대상만 달랐을 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은 점에서는 부자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필회 교수는 히스기야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의존하여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는 것뿐이라고. 오늘 본문 첫 절이 바로 그 말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 문학적으로 32장은 앞 네 장과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김근주 교수가 지적하듯이 28장에서 31장까지는 모두 재앙을 선포하는 '호이'(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반면, 32장은 "보라"로 번역된 '헨'으로 시작합니다. 첫머리에서 주의를 끄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28-31장이 심판을 말했다면 32장은 심판을 거치고 나서 맞이할 회복을 말합니다. 또 32장은 정의와 공의가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지닙니다. 첫머리에서 정의와 공의로 다스릴 왕을 다루고(1절), 끝머리에서 정의와 공의가 광야와 아름다운 밭에까지 가득 찬 세상을 보여 주어(16절) 처음과 끝이 맞물립니다. 그 사이에 놓인 9-14절의 폐허는 이 두 기둥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길입니다.
# 1절의 왕은 누구입니까. 데이비드 젝맨은 "보라 한 왕이"라는 이 선언이 이사야 7장과 9장과 11장에 나왔던 메시아적 인물, 곧 임마누엘을 상기시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나라에 관해 하신 모든 약속을 구현할 완전한 다윗 계열의 왕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영적으로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왕의 의로운 통치는 그 아래서 섬기는 사람들 안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셉나(22:15-19)와 히스기야 행정부 자문단들의 어리석은 언행과는 전혀 다른 지도자들이 세워지는데, 그 자질은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왕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한편 김근주 교수는 15절에서 위로부터 임하는 영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정한 한 사람이 다스리는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한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한 왕에게서 시작된 통치가 온 공동체의 삶으로 번지는 것, 그것이 32장이 그리는 회복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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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절 광풍을 피하는 곳, 큰 바위 그늘 같은 왕
성자 하나님은 공의로 통치하시며 당신의 백성에게 피할 곳과 그늘과 냇물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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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하고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고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합니다.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합니다. 그러나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며 항상 존귀한 일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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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공의'와 '정의'는 이사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한 쌍의 열쇳말입니다. '미쉬파트'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공의로운 판단을, '체다카'는 관계를 바로 세우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여기 등장하는 방백들은 유다 왕국의 지방 행정 책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통치할 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적 탐욕에 따라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부여받아 다스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으신 것이 정의와 공의의 열매였고(5:7), 다윗의 왕좌에 앉을 이가 견고케 할 것도 정의와 공의였으며(9:7), 시온이 구속될 것도 정의와 공의로써였습니다(1:27). 그러니 회복의 시대를 여는 첫 문장이 정의와 공의여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2절은 네 개의 직유를 한 호흡에 쏟아 냅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 앞의 둘은 밖에서 몰아치는 것으로부터의 보호이고, 뒤의 둘은 안에서 말라 가는 것에 대한 소생입니다. 사람은 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몰아치는 것을 막아 주는 벽만 있어도, 목마름을 적셔 주는 물만 있어도 살 수 없습니다. 특히 '큰 바위 그늘'은 광야를 걸어 본 사람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사막에서 바위 그늘은 목숨을 살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왕이 그늘을 '주는' 분이 아니라 그늘 '같은'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 몸으로 햇볕을 막아섭니다. 훗날 이 그늘은 한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 위에 세워졌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은 이 바위 그늘의 목소리입니다.
3-4절은 6장 10절의 심판 선언과 정확히 대조를 이룹니다. 이사야가 부름받던 날 하나님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하고 듣는 자가 귀를 기울입니다. 심판으로 닫혔던 감각이 회복으로 열립니다. '조급한 자'로 번역된 '니므하림'은 진지하게 선포되는 말씀도 한 귀로 흘려 버리는 경솔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완악한 심령조차 심령에서부터 변화를 받습니다.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는 문자적으로는 말더듬이가 유창해진다는 뜻이지만, 문맥으로 보면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진리를 품고도 전하지 못하던 이들이 담대하게 증거하게 되리라는 예언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5-8절은 뒤집힌 저울이 바로잡히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당시 유다 사회는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5:20) 전도된 가치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우둔한 자'로 번역된 '킬라이'는 본래 돈 씀씀이가 인색한 수전노를 뜻하고, '존귀한 자'로 번역된 '쇼아으'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를 미화한 말입니다. 곧 돈을 제 마음대로 쓴다는 이유만으로 존귀한 자라 칭송받던 시대의 아첨을 냉소하는 표현입니다. 그런 아첨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고 6절은 어리석음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단지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를 거스르는 말을 하고,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이 없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이웃을 향한 태도로 함께 드러납니다. 반대로 존귀함도 신분이 아니라 '계획'으로 판명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존귀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마음에 품고 사는가로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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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저울은 여전히 기울어 있습니다. 많이 가진 이의 말은 그 자체로 지혜처럼 들리고, 가난한 이가 아무리 바르게 말해도(7절) 그 말은 쉽게 흩어집니다. 교회는 이 기울어진 저울을 바로 세우는 자리여야 합니다. 헌금 액수로 존귀함이 매겨지고 직분이 서열이 되는 순간, 우리는 이사야가 고발한 그 사회를 예배당 안에 그대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존귀함은 계획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의 계획표에 주린 자와 목마른 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누군가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고 큰 바위 그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늘이 된다는 것은 내가 햇볕을 맞는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곤비함을 대신 지고 서 있는 사람만이 그늘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 앞의 한 사람에게 나는 광풍인지 그늘인지를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존귀한 일을 하나만 계획해 보십시오. 존귀함은 늘 계획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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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4절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안일함의 잠을 깨우시고, 무너진 자리 위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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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안일한 여인들을 향해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들으라고 외칩니다. 염려 없는 딸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합니다. 일 년 남짓 지나면 그들이 당황할 것인데 이는 포도 수확이 없고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일한 여자들은 떨고 염려 없는 자들은 당황하며,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과 기뻐하는 모든 집에도 그리할 것입니다. 궁전이 폐한 바 되고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어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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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의 찬란한 미래에서 갑자기 9절의 경고로 넘어가는 이 단절은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사야의 목회적 지혜가 있습니다. 젝맨이 지적하듯이 1-8절은 예언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는 동기 역할을 합니다. 믿는 자들을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먼저 보여 주고, 그다음에 지금 여기서 무엇에 굴복하면 안 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 영광스러운 미래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라 해도, 오늘의 득의양양함에 굴복해서는 그 미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참된 반응은 환락과 편안함이 아니라 떨며 회개하며 우는 것입니다.
'안일한'과 '염려 없는'이라는 두 표현이 이 단락의 열쇠입니다. '염려 없는'에 해당하는 '뽀트호트'의 원형 '빠타흐'는 본래 무언가를 깊이 신뢰하거나 위기의 때에 무언가를 의지하여 피난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곧 이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엉뚱한 것을 너무 깊이 믿는 데 있었습니다. 지금의 풍요가 계속되리라는 확신, 내년에도 포도는 익으리라는 확신이 그들의 피난처였습니다. 여인들이 지목된 것은 여성이 더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3장 16절 이하에서도 예루살렘 상류층 여인들을 통해 유다 전체를 형상화한 바 있습니다. 다만 3장이 사치와 방탕을 겨냥했다면 여기서는 다가올 재앙에 아무 대비 없이 현재의 이익에만 만족하는 준비성 없음을 겨냥합니다. 안일함은 사치보다 훨씬 조용한 죄입니다.
13절의 '가시와 찔레'는 우연한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 쓰인 '코츠'는 창세기 3장 18절에서 '가시덤불'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최초의 인간이 범죄한 결과 땅이 저주받았음을 드러내는 그 표지가, 이제 돌이키지 않는 유다 땅을 뒤덮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에덴 밖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14절은 그 폐허를 담담하게 그립니다. 궁전이 버려지고 성읍이 적막해지며, 사람이 살던 자리에 들나귀가 즐기고 양 떼가 풀을 뜯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장이 반전의 예비입니다. 폐허가 된 자리가 '초장'이 되었다는 표현 속에는 이미 다음 단락의 밭과 숲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심으실 땅을 갈아엎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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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함은 우리 시대 신앙의 가장 흔한 병입니다. 큰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언자가 흔든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편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습관이 되고, 예배가 일정표의 한 칸이 되고, 말씀이 익숙한 소음이 될 때 우리는 이미 안일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 들으라는 부름은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라는 부름입니다.
또 하나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건강, 지금의 수입, 지금의 관계가 내년에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조용한 확신이 실은 우리의 애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겁주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너져 본 자리에서만 새것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 여러분 가운데 지금 삶의 어느 부분이 궁전이 폐한 것처럼 무너져 내린 분이 계신다면,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늘 폐허에서 다시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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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0절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부어 주시리니
성령 하나님은 위로부터 부어져 광야를 아름다운 밭으로 바꾸시고 정의와 공의를 삶의 자리에 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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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할 것이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입니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을 것이며,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될 것입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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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로 번역된 '아드'는 앞의 폐허와 뒤의 회복 사이를 잇는 경첩입니다. 폐허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그 폐허를 건너뛸 수도 없다는 것을 이 한 단어가 함께 말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방향이 제시됩니다. '위에서부터'입니다. 회복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노력의 총합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부어 주심입니다. 여기 쓰인 '루아흐'는 바람이자 숨이자 영입니다. 앞 장에서 예언자는 애굽의 말들이 "육체요 영이 아니라"(31:3)고 선언했습니다. 그 없던 것이 이제 하늘로부터 부어집니다. 유다가 애굽에서 구하려던 것, 병거로도 마병으로도 살 수 없던 것이 값없이 부어집니다.
그 결과가 놀랍습니다.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됩니다. 여기 '아름다운 밭'으로 번역된 말은 갈멜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진 땅의 이름입니다. 광야가 갈멜이 되고, 그 갈멜이 다시 숲처럼 여겨질 만큼 무성해집니다. 변화의 폭이 한 단계가 아니라 두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원상복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예언자는 그 밭에 무엇이 자라는지를 말하지 않고, 그 땅에 무엇이 '거하는지'를 말합니다. 정의가 광야에 거하고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합니다. 곧 성령이 부어진 표지는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 뿌리내린 정의와 공의입니다. 김근주 교수의 지적처럼 32장은 1절의 왕의 통치와 16절의 정의·공의로 앞뒤가 맞물리는데, 이는 왕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통치가 마침내 온 땅의 일상으로 번져 나갔음을 뜻합니다.
17절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열매'로 번역된 '마아세'는 공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거나 힘써 행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 '아사'에서 온 명사로, '일'·'작품'·'소출'을 함께 뜻합니다. 화평은 저절로 오는 정적이 아니라 공의가 공들여 지어 낸 작품입니다.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바른 것이 자리를 잡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18절의 세 표현—화평한 집, 안전한 거처, 조용히 쉬는 곳—은 30장 15절에서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그 "조용히 있음"이 마침내 선물로 주어진 장면입니다. 원하지 않아 거절했던 것을 하나님은 끝내 은혜로 안겨 주십니다.
19절은 다시 우박과 파괴를 말해 흐름을 끊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회복의 취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 숲'과 '그 성읍'—곧 교만한 권력의 상징인 앗수르—이 무너져야 내 백성의 조용한 쉼이 지켜진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20절이 축복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복이 있느니라'에 해당하는 '아쉐레켐'의 원형 '아쉐르'는 산상수훈의 '마카리오이'로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행복이 아니라 오직 위에서부터 내려 주시는 복을 가리킵니다. 물 가에 씨를 뿌린다는 것은 낭비처럼 보이는 넉넉한 파종을 말합니다. 물이 넉넉하니 아끼지 않고 뿌립니다. 영이 부어진 사람의 삶은 계산하지 않고 뿌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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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변화를 아래에서 만들어 내려 합니다. 결심을 다지고 계획을 세우고 습관을 고칩니다. 그러나 광야를 밭으로 바꾸는 힘은 위에서 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일은 더 애쓰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두 손을 벌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신앙생활의 장식이 아니라 뼈대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부어진 증거를 우리는 감정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영이 부어지면 정의가 광야에 거하고 공의가 밭에 거한다고. 성령의 표지는 예배당의 뜨거움이 아니라 일터와 가정과 골목에 자리 잡은 바름입니다. 계약서를 정직하게 쓰는 일, 약한 이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내 이익이 걸린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일 - 그것이 광야에 거하는 정의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도시에서 그런 밭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성도 한 분 한 분이 물 가에 씨를 뿌리는 사람, 계산하지 않고 선을 뿌리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화평은 그렇게 공들여 지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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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공의로 통치하시는 왕이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향해 "보라" 하고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어 주시고
마른 땅의 냇물이 되어 주시며
곤비한 우리에게 큰 바위 그늘이 되어 주시니
그 그늘 아래서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감겼던 눈을 열어 주시고 닫힌 귀를 기울이게 하시며
존귀한 일을 계획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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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
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던
그 조용한 잠에서 우리를 일으켜 주소서.
지금의 풍요와 지금의 평온을 피난처로 삼던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을 피난처로 삼게 하소서.
가시와 찔레가 돋은 자리, 궁전이 폐한 자리에서도
주님은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하소서.
무너진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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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영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 광야를 밭으로 만들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영을 우리 위에 부어 주시어
메마른 심령이 아름다운 밭이 되게 하시고
그 밭에 정의와 공의가 거하게 하소서.
공의의 열매인 화평을 우리 가정과 교회에 두시고
조용히 쉬는 곳을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도시의 광야에 뿌려지는 씨가 되어
모든 물 가에 아끼지 않고 뿌리는 복된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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