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8:1-13 숨을 돌리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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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은 이사야 28장 1절에서 13절까지 말씀으로 '숨을 돌리는 자리'라는 제목으로 묵상에세이를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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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더 높이 오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그 숨을 이웃에게 나누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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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중순입니다. 입추가 지났다는 말이 무색하게 한낮의 볕은 여전히 사납고, 매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웁니다. 그런데 해가 기울고 나면 공기의 결이 확실히 달라집니다. 어제 저녁 마당에 나가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 한 자락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여름이 물러갈 준비를 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 여름을 어떻게 지나오셨습니까. 폭염 속에서도 일터를 지키셔야 했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몫을 홀로 감당하며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면 무너질 것 같아 멈추지 못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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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언덕 위에 얹힌 화관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사 28:1). 여기서 면류관이라 옮겨진 말은 금으로 만든 왕관이라기보다 꽃을 엮어 만든 화관에 가깝습니다. 사마리아는 기름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진 도성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땅이 머리에 꽃관 하나를 얹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다른 것을 봅니다.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사 28:1). 꽃으로 엮은 관은 쓰는 순간부터 시들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의 비극은 화관을 쓴 데 있지 않았습니다. 시드는 것을 시들지 않는 것으로 착각한 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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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이 선포되던 때의 사정을 알면 문장이 더 아프게 들립니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전할 무렵, 사마리아는 이미 무너진 뒤였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예언을 왜 다시 꺼냈을까요. 무너진 이웃의 잔해를 가리키며 유다에게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배웠느냐. 그때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가 씌워 놓은 앗수르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이번에는 애굽에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앗수르를 붙들었고 아들은 애굽을 붙들었습니다. 붙드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하나님이 아닌 것을 붙든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이름만 바꾸어 되풀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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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심판의 문장 한가운데서 예언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집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사 28:5).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화관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화관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엮은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화관은 시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화관은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사 28:6)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면류관이 되신다는 것은, 그 백성의 판단이 바로 서고 무너진 공정이 회복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참된 영광은 늘 정의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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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부터 시선이 남쪽으로 옮겨 옵니다. 그런데 남쪽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사 28:7). 한 절 안에서 독주가 세 번, 비틀거린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문장 자체가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그리고 8절은 그 자리를 한 장면으로 못박습니다. 모든 상에는 토한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뜰의 상입니다. 거룩한 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상이 그러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취함을 술의 문제로만 좁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북쪽은 권력과 부에 취했고 남쪽은 종교적 자만과 전문가의 자존심에 취했습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 영광에 취해, 좋은 것을 차려야 할 상 위에 토사물을 올려놓는 일이 그때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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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자들은 예언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아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사 28:9). 우리를 어린애 취급하느냐는 항변입니다. 그러고는 예언자의 말투를 흉내 냅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옮기면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의 옹알이 소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버버 하는 소리로 흉내 내어 웃어 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가장 무섭습니다.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말씀을 시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익숙함이 조롱으로 넘어가는 자리, 사랑하라 용서하라 나누라는 말이 유치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자리, 거기가 바로 취함이 시작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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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오늘 본문의 심장이 열립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사 28:12). 심판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거나 제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 하지 않으십니다. 쉬라고 하셨는데 쉬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상쾌함이라 옮겨진 히브리말은 지친 몸이 숨을 돌리는 자리, 곧 쉼터를 뜻합니다. 안식이 시간이라면 상쾌함은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쉴 시간과 쉴 자리를 함께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오르느라 바빴고 지키느라 급했고 증명하느라 숨이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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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단 한 가지, 곧 방 안에 조용히 홀로 머물러 있을 줄 모르는 데서 비롯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오락과 소란을 찾아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는 이유가, 멈추는 순간 자기 존재의 허무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술에 취한 사마리아의 상과 예루살렘의 상은 결국 그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아 계속 잔을 채운 것입니다. 우리의 쉬지 못함도 대개 부지런함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내가 멈추면 이 일이 무너진다는 생각의 밑바닥에는, 결국 내가 이 세계를 붙들고 있다는 조용한 교만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쉼터에 앉는 일은 그러므로 게으름이 아니라 신앙 고백입니다. 이 세계를 붙들고 계신 분이 내가 아님을 몸으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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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눈여겨볼 것은 명령의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쉬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습니다. 받은 쉼은 반드시 흘러가야 하는 쉼입니다. 안식일 계명이 나 혼자 편안한 데서 끝나지 않고 소와 나귀와 종과 나그네까지 숨을 돌리게 하라는 데서 완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쉬어야 내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도 숨을 돌립니다. 그러니 안식을 거절하는 것은 나만 피곤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누군가는 나 때문에 멈추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곁의 곤비한 자는 누구입니까.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는 배달 노동자, 쉬는 날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돌봄 노동자, 이 폭염 속에 야외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버티고 있는 우리 집 식구입니다. 교회가 이들에게 숨 돌릴 자리 하나 내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12절의 그 제사장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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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운 본문을 덮기 전에 한 음성을 함께 듣고 싶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스라엘이 끝내 듣지 않았던 그 초대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들의 입술로 다시 하셨습니다. 이사야 28장에서 거절된 쉼터가 갈릴리의 언덕에서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초대하시는 분이 친히 그 자리를 만드셨습니다.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우시기 위해 몸소 가시로 엮은 관을 쓰신 분, 우리가 숨을 돌리게 하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앉는 쉼터는 값싼 자리가 아닙니다. 아주 비싼 값이 치러진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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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세 가지만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첫째, 하루 저녁을 정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고 그 빈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여기십시오. 둘째, 내 곁에서 가장 지쳐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의 짐 하나를 실제로 덜어 주십시오. 문자 한 통이든 식사 한 끼든 대신 서 준 자리 하나든 좋습니다. 셋째, 가장 익숙해서 이제는 시시하게 들리는 말씀 한 구절을 골라 처음 듣는 사람처럼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오. 익숙함이 조롱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 오늘 우리의 영적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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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처서입니다. 이 지독한 볕도 결국 물러갈 것이고, 들판의 벼는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람의 삶에도 그런 절기가 있습니다. 오르기만 하던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고개를 숙이며 여물어 가는 시간 말입니다. 우리가 머리에 얹었던 화관이 시드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꽃은 원래 시듭니다. 다만 그 시듦 곁에, 시들지 않는 화관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란히 서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잠시 숨을 돌리시고, 그 숨을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며, 마침내 곤비한 이들의 쉼터가 되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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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가 매일성경으로 매일 묵상하는 광양사랑의교회 평화의길벗_라종렬 목사였습니다. 묵상의 여정에 있는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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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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