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3:1-24 다시는 뽑지 않을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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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내 힘으로 안전을 쌓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지키시는 분의 땅에 삶의 말뚝을 옮겨 박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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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처서입니다. 땅에 붙어 있던 더위가 슬며시 등을 돌리고, 새벽 공기에는 어느새 서늘한 결이 섞여 듭니다. 마당 끝 풀잎 위에 밤새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에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고, 매미 소리가 잦아든 자리를 귀뚜라미가 조심스레 채웁니다. 계절은 이렇게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기는데, 우리 삶의 자리는 왜 이토록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일까요. 여름 내내 견디느라 애쓰신 분들,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 앞에서 밤잠을 설치는 분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짐을 반쯤 싸 둔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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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하루는 말뚝을 뽑는 일로 시작해 말뚝을 박는 일로 끝났습니다. 풀이 마르면 걷어야 하고, 물이 줄면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는 늘 밧줄 자국이 남아 있었고, 마음에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이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그림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우리도 평생 말뚝을 뽑으며 살지 않습니까. 전셋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 관계를 옮기고, 때로는 마음까지 옮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끝자락에서 예언자는 우리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장막 하나를 보여 줍니다. 다시는 걷지 않아도 되는 장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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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701년, 앗수르의 대군이 예루살렘 성문 앞에 진을 쳤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의 은과 금까지 긁어모아 조공으로 바쳤지만 산헤립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병거를 믿었던 외교는 무너졌고, 협상하러 간 사신들은 좋은 소식 대신 눈물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33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다 소진된 자리. 성경은 그런 자리를 절망이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시작점이라 부릅니다. 이사야 28장부터 33장까지는 '화 있을진저'라는 외침이 여섯 번 울립니다. 앞의 다섯 번은 사마리아를 믿고 애굽을 믿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었는데, 마지막 여섯 번째만은 방향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그들을 짓밟던 자를 향합니다. 백성이 마침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고 여호와께로 돌아선 그 순간에야, 하늘의 화살이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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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닥에서 예언자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놀랍습니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한 번의 극적인 구출을 구하지 않고 아침마다의 팔을 구합니다. 고난이 매일 새롭기 때문에 도움도 매일 새로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하루치씩만 내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축해 둔 은혜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매일 아침 손을 내밀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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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 밖의 풍경은 여전히 참혹합니다. 대로가 황폐하여 다니는 사람이 끊겼고, 레바논의 삼나무가 마르고 사론의 들판이 사막처럼 변했으며 갈멜의 잎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침묵하시던 분이 입을 여십니다.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사 33:10). '이제'가 세 번 겹칩니다. 예루살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일어나 판을 뒤집으십니다. 인간의 방책이 완전히 바닥난 지점, 거기가 하나님의 첫 문장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심판의 묘사입니다. 하나님이 대적을 직접 내리치신다고 하지 않고, 그들이 겨를 잉태하고 짚을 낳으며 자기 호흡이 불이 되어 자신을 삼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은 저를 태울 연료를 이미 제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 그것이 교만한 제국의 초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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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원의 소식이 들리자 뜻밖의 두려움이 성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사 33:14). 앗수르의 불은 피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불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대답은 제단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주어집니다.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부당하게 얻은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뇌물에 손을 흔들어 물리치는 자. 성전 출입증은 예배의 열심이 아니라 장부와 법정과 골목에서 발급됩니다. 그 목록 앞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참 미달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 다음 절에서, 약속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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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사 33:17). 성문 앞에 적군이 진을 친 성 안에서, 사람들은 적군 대신 왕의 얼굴을 봅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 그것이 구원의 첫 증상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장막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 33:20). 성전도 성벽도 아니고 굳이 장막이라 부른 것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견고함은 재료에서 오지 않습니다. 함께 계시는 분에게서 옵니다.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짓는 초막은 일부러 비도 새고 별빛도 스며들도록 엉성하게 짓는다지요. 튼튼한 집에 들어앉는 순간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시인은 유목민의 천막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붕을 펼쳐 얹으면 천막은 아침 신전이 된다." 돌로 쌓은 바벨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을 모신 천 한 장은 신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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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성인은 『수도 규칙』 첫 장에서, 이 수도원 저 수도원을 사흘 나흘씩 떠돌며 평생을 보내는 수도자들을 두고 늘 움직이면서도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제 뜻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수도 공동체의 첫 번째 약속이 '정주', 곧 이 집에 머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거룩함이란 더 좋은 곳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에 남아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말뚝을 뽑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가 아니면 저기,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 이 교회가 아니면 저 교회. 그러나 이사야가 본 성에서는 아무도 짐을 싸지 않습니다. 그 성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이유를 말해 줍니다.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사 33:24). 머물 수 있게 하는 힘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용서였습니다. 용서받은 사람만이 도망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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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하루, 내 삶의 말뚝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호의에 박혀 있다면 그 호의가 식는 날 다시 뽑아야 합니다. 통장의 잔고에 박혀 있다면 숫자가 흔들리는 날 다시 뽑아야 합니다. 건강 검진 결과지에 박혀 있다면 한 줄의 수치가 바뀌는 날 온 장막이 흔들립니다. 저는 이 물음이 결코 한가한 물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 위에 서 있는가는 평온한 날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바람이 부는 날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사 33:22)라는 고백 위에 박혀 있다면, 우리는 이제 짐을 풀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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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광양사랑의교회가 성도들에게 드려야 할 것은 더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뚝을 뽑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누군가 자기 실패를 조심스레 털어놓았을 때 그 말이 다음 주에 다른 입을 통해 돌아오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은 그곳에 말뚝을 박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죄가 선포되고 그 선포가 끝까지 지켜지는 공동체라면, 사람들은 거기서 비로소 밧줄을 내려놓고 짐을 풉니다. 서로의 죄를 들추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사죄를 확인해 주는 자리, 그것이 이사야가 본 장막의 오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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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의 아침 이슬은 곧 마르겠지만, 그 서늘한 결은 가을 끝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계절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기듯, 우리 마음의 말뚝도 오늘 조용히 옮겨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들리는 것들 위에 박아 두었던 그 말뚝을 뽑아,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는 분의 땅에 깊이 박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하루가 걷어야 할 천막이 아니라 아침 신전이 되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던 마음이 마침내 짐을 푸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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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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