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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4:1-17 폐허에 깃든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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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심판을 지운 자리에 값싼 위로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셈하시는 분께 우리의 억울함과 우리의 복수심을 함께 맡겨 드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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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가 지났습니다. 한낮의 볕은 아직 따갑지만 해가 기울면 바람의 결이 달라집니다. 논둑을 걸으면 벼 이삭이 어느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담장 곁 배롱나무는 백 일을 채우려는 듯 붉은 꽃을 마지막까지 매달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더위도 결국은 물러갈 때를 압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은 그렇지가 않아서, 물러가야 할 것이 물러가지 않고 끝나야 할 일이 끝나지 않은 채 몇 해를 끄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어 혼자 그 장면을 되감아 보는 밤을 지나고 계신 분들, 여름을 견디느라 마음의 여백을 다 써 버린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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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읽기 힘든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피와 불과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열일곱 절 안에 빼곡합니다. 저도 이 본문 앞에서 며칠을 머뭇거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전해 온 입술로 이 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들여다보는 동안 한 가지가 보였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한 분인가를 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확함은, 오래 억울했던 사람에게는 무서움이 아니라 위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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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열리자마자 예언자는 온 땅을 불러 세웁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34:1). 이사야 1장에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던 그 목소리인데, 이번에는 증인이 아니라 피고로 부릅니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립니다. 별들이 마른 무화과 잎처럼 후드득 떨어집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신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신들의 거처가 바로 저 별자리였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말려 올라간다는 것은 사람이 절대라고 믿어 온 무대 자체가 접혀 치워진다는 뜻입니다. 못 박힌 듯 흔들리지 않아 보이던 것들이 종잇장처럼 말립니다. 저는 이 장면 앞에서 겁이 나기보다 오히려 숨이 트였습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것들이 사실은 그리 견고하지 않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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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카메라가 한 나라로 좁혀집니다. 에돔입니다. 하필 왜 에돔이었을까요. 에돔은 에서의 후손, 곧 이스라엘과 피를 나눈 형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는 이스라엘이 무너질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광야 길을 막았고, 유다가 흔들릴 때마다 등을 돌렸으며,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불태우던 날에는 곁에 서서 헐어 버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오바댜는 그 장면을 이렇게 못 박습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하지 말 것이며"(옵 1:12). 에돔의 죄는 칼을 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제가 쓰러지는 날 팔짱을 낀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방관을 중립이라 부르지 않고 가담이라 부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래 마음이 저렸습니다. 우리가 무너지는 이들 곁에서 몇 번이나 구경꾼이었는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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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장의 심장 같은 한 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사 34:8). '보복'이라 옮겨진 히브리어 나캄은 감정적인 앙갚음이 아니라, 한쪽의 폭력으로 어그러진 저울을 다시 수평으로 돌려놓는 행위를 뜻합니다. 나란히 놓인 '신원'은 안전하다, 회복하다, 갚다라는 뜻의 샬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복은 부수는 일이 아니라 바로잡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시온의 송사"라는 표현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시온은 지금 소송을 걸어 놓고 판결을 기다리는 원고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판결이 나지 않으니 사람들은 재판장이 잠들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접수되어 있었습니다. 사건 번호가 있고, 선고의 해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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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발칸반도에서 이웃이 이웃을 학살하는 전쟁을 겪으며 『배제와 포용』을 썼습니다. 그는 원수를 껴안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껴안음이 하나님의 심판을 지운 자리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못 박았습니다. 인간이 칼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정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의가 더 좋은 법정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편해하는 서구의 안락한 신학자들에게, 그 주장을 불타는 사라예보의 한복판에서 한번 해 보라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오늘 본문의 정확한 주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셈하지 않으신다면, 셈은 결국 우리 손에 남습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남은 셈은 반드시 또 다른 피를 부릅니다. 로마서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고 인용한 것은 복수의 허락이 아니라 복수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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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이 지나간 땅의 풍경은 처참합니다. 시내는 역청이 되고 티끌은 유황이 되며,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십니다. 여기 쓰인 두 낱말 토후와 보후는 창세기 첫 장의 "혼돈하고 공허하며" 바로 그 말입니다. 창조의 질서를 고집스레 거스른 세력에게 하나님은 그 질서를 거두어 가시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도구입니다. 줄과 추는 본래 집을 지을 때 쓰는 연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확히 허물기 위해 쓰입니다. 하나님은 홧김에 부수지 않으십니다. 재고 수평을 맞추어 부수십니다. 심판조차 정밀하다는 이 사실이 저를 서늘하게 하면서 동시에 안심시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는 그 무엇도 대충 처리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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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폐허의 한복판에, 뜻밖의 한 문장이 숨어 있습니다. "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사 34:15). 궁궐이 무너지고 나라가 사라진 자리에서, 새들이 짝을 찾고 알을 낳고 새끼를 품습니다. 주석가들은 이것을 파멸이 영구하다는 표시로 읽습니다. 사람 대신 짐승이 대를 잇는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다른 결의 울림을 듣습니다. 심판하시는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불탄 자리에도 짝은 옵니다. 우리가 다 태워 버렸다고 여긴 자리, 다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으리라 단정한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짝을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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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지막 두 절이 이 장의 문을 다시 엽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사 34:16). 예언자는 미래의 독자에게 대조해 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오래전에 적어 둔 목록을 꺼내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 한 줄씩 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조의 결론이 놀랍습니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짐승은 한 마리도 빠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한 문장도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참된 묵상이란 바로 이 대조 작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감정에 맞는 구절을 골라 위안을 얻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실제로 일어난 일을 나란히 놓고 하나씩 맞춰 보는 일입니다. 이 대조를 해 본 사람만이 다음에 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신뢰는 감정이 아니라 기록의 축적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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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다음 장에서 예언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봅니다. 광야가 기뻐하고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며, 거룩한 길이 나서 사자도 사나운 짐승도 다니지 못하는 그 길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노래하며 돌아옵니다. 34장의 사막과 35장의 사막은 같은 땅입니다. 다만 하나는 심판이 지나간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가 지나간 자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인생의 지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도 두 개의 사막이 있습니다. 스스로 만든 폐허와, 하나님이 길을 내려고 남겨 두신 여백입니다. 심판을 정확히 이루시는 그 손이 회복도 정확히 이루십니다. 신실하심은 나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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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하루, 각자의 '여호와의 책'을 한 번 펼쳐 보시면 좋겠습니다. 지난 세월 하나님이 지키신 약속들의 목록 말입니다. 그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일들이 지금 와 보니 제 짝을 찾아 앉아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응답이 없다고 여겼던 기도가 다른 모양으로 이미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혼자서는 자기 삶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 세지 못합니다. 그래서 짝이 필요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서로에게 그 책을 읽어 주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자기 인생의 목록에서 빠진 것만 세고 있을 때, 곁에 앉아 그가 잊고 있던 항목을 대신 읽어 주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이 폐허에도 짝을 두셨다면, 하물며 당신의 교회에 짝을 두지 않으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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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가 고개를 숙이는 이 계절에, 우리도 셈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손으로 판결하려던 그 사건을 하나님의 법정에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것 같은 마음의 폐허에도, 언젠가 깃들일 짝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하늘 아래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빠진 것 하나 없이 이루시는 그분의 손을 붙들고 걷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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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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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QTV-A_Vgg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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