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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1:1-9 날개 아래로 돌아오는 길

샬롬! 오늘은 이사야 31장 1절에서 9절까지 말씀으로 '날개 아래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묵상에세이를 나누겠습니다.

온전한 신앙이란 힘 있어 보이는 것을 향해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덮으시는 분의 날개 그늘 아래로 돌아서는 생명 사건입니다.

팔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입추가 지나고 처서를 앞둔 이 무렵이면, 그악스럽게 대지를 달구던 뙤약볕도 어느새 한풀 꺾여 저녁 바람 끝이 조금씩 서늘해집니다. 매미 소리는 여전히 요란하지만 그 소리에도 어딘가 다급함이 배어 있고, 논둑의 벼 이삭은 소리 없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내내 무언가를 붙들고 버티느라 어깨가 굳어 버린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밤새 계산기를 두드린 분, 가족을 지키려고 자존심을 접어 둔 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두려움을 안고 오늘 아침을 맞은 분 —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새들은 바람이 잔잔한 날이 아니라 바람 부는 날을 골라 둥지 만들기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윤석산 시인의 시 한 편이 그렇게 노래합니다. 알과 새끼가 바람에 부서지지 않도록,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굵은 가지를 먼저 대고 벽을 더 두텁게 쌓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늘 본문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앗수르라는 사나운 바람이 성벽을 흔들던 그 시절, 예루살렘 위에 날개를 펴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성의 사람들은 날개를 올려다보는 대신, 남쪽으로 난 흙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때는 주전 701년 무렵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봉기를 일으켰고, 예루살렘 왕궁의 지혜롭다는 정치가들은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때 애굽은 눈에 보이는 가장 확실한 힘이었습니다. 말이 있었고 병거가 있었고 마병이 있었습니다. 반면 여호와의 약속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정치적 이해타산의 눈으로만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신탁은 실체가 없는 '말'이거나 위험부담이 너무 큰 '주장'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려갔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31:1). 여기 쓰인 '내려가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지형을 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애굽은 예루살렘의 산지보다 낮은 저지대에 있으니 실제로 내려가는 길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이 말을 고른 데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힘 있는 것에 기대려고 하나님을 떠나는 그 걸음 자체가 영적인 내리막이라는 것입니다. 오르막은 늘 숨이 차고 내리막은 언제나 편합니다. 그러나 편한 길이 늘 사는 길은 아닙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을 달리며 사냥하는 일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속도와 힘에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무엇이 있어서, 병거의 수를 세는 손은 좀처럼 멈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곧바로 찬물을 끼얹습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사 31:3). 히브리 사람들에게 '육체'는 정신의 반대말이 아니라 연약함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지금 무섭게 보이는 그 힘도 결국은 숨이 끊어지면 그만인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고 도움을 받는 자도 함께 엎드러집니다. 놀랍게도 옛적 갈대 바다에서 애굽의 병거를 삼키셨던 그 손이, 이제 애굽을 의지하는 자를 치시는 손입니다. 우리를 건지신 손과 우리를 붙드시는 손은 언제나 같은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탁은 심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두 가지 그림으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는 먹이를 움킨 사자입니다. 목자들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떠들어도 사자는 놀라지 않고 굴복하지 않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비유가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담고 있다고 읽습니다. 사자의 발톱 아래 놓인 예루살렘은 분명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먹이는 사자의 것이어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이지만,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붙들려 있다는 것, 그것이 안전의 증거입니다.

또 하나의 그림이 날개입니다.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사 31:5). 여기서 히브리어 본문은 동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보호하고, 호위하고, 건지고, 뛰어넘어 구원한다고 네 번을 잇대어 말합니다. '뛰어넘는다'는 말은 유월절 밤에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죽음이 문설주를 지나쳐 가던 그 밤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위를 넘어가시며 건지십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 너희를 모으려 했다고 우신 것은(마 23:37), 이사야가 본 그 날개가 마침내 육신을 입고 그 성 위에 다시 드리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마지막에 방향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 31:6). 돌아옴에는 반드시 던져 버림이 따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 붙들고 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각 사람이 던져 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모든 것을 뒤집습니다.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까지 내려가 찾던 그 힘이, 실은 그들이 떠나온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저는 이 문장이 오늘 본문의 가장 정확한 주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다의 비극은 잘못된 나라를 골랐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앞에서 가만히 머물러 하나님을 바라볼 줄 몰랐다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불안이 밀려올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견딜 수 있어서, 전화를 걸고 사람을 만나고 계획을 세우고 또 다른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전한 대로, 때로 신앙은 가던 길에 멈추어 서서 옛길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깊은 병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를 생각합니다. 우리도 오랫동안 무언가를 만드는 데는 부지런했지만 던져 버리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성장의 방식과 성공의 문법과 서열의 감각을 우리 손으로 빚어 놓고, 이제는 그것에 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빼앗기면 정작 세미한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을 뜻하는 서양 말 안에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뼈아픕니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은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귀가 막혀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번 주에는 손에 쥔 것 하나를 내려놓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시기를 권합니다. 김교신 선생은 상처의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면 덧날 뿐이고 안에서 새살이 돋아야 저절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회개도 그렇습니다. 이를 악물고 나쁜 것을 끊어 내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자리에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던져 버린 만큼 두 손이 비고, 빈 손만이 날개 아래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 한 분 한 분이 그 빈 손으로 예배의 자리에 서시기를,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 도시의 지친 이들 위에 드리워지는 작은 날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늦여름의 바람이 조금씩 결을 바꾸고 있습니다. 새들이 바람 부는 날을 골라 둥지를 짓듯,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가장 세찬 바람 속에서 우리를 위한 집을 지어 가십니다. 그 집의 이름이 곧 그분의 날개입니다. 오늘 내려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서서 그 날개를 올려다보시는 여러분 모두가, 애굽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이켜 시온의 불 앞으로 돌아오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든 성도가 매일성경으로 매일 묵상하는 광양사랑의교회 평화의길벗_라종렬 목사였습니다. 묵상의 여정에 있는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zftqlPePA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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