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8:01-22 심판의 심연을 넘어선 기억의 은총 : 하나님의 정념(Pathos)과 새로운 창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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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의 노아와 모든 생물을 ‘기억’하시어 바람을 통해 물을 물러가게 하십니다(1-5절).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며 지면의 상태를 살피고 인내하며 기다립니다(6-12절).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와 모든 생물을 방주에서 나오게 하시며 창조 본연의 번성 명령을 주십니다(13-19절). 노아는 제단을 쌓아 예배하며,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적 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생물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보존의 언약을 세우십니다(20-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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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의 홍수 신화(길가메쉬 서사시 등)에서 신들은 인간의 소음 때문에 잠을 설쳐 홍수를 일으키지만, 창세기의 ‘야웨’는 인간의 ‘포악함’과 ‘부패’라는 윤리적·관계적 붕괴에 반응하십니다.
# 신학적 배경 : 본문은 창세기 1장의 질서가 무너져 다시 1:2의 혼돈(심연의 물)으로 돌아갔던 ‘역창조(De-creation)’가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통해 ‘재창조’로 전환되는 분기점입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 하나님은 인간 노아뿐 아니라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동일한 기억의 대상으로 삼으시며, 이들의 생존과 평안을 위해 자신의 주권적 심판 의지를 스스로 꺾으시는 ‘자기 극복’의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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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혼돈의 퇴각
하나님은 소외된 생명을 잊지 않으시고, 자신의 영(숨결)을 통해 절망의 물결을 물리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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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하시니 물이 줄어들었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혔습니다. 물이 점점 물러가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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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다’(자카르)는 단순히 잊었던 것을 떠올리는 인지적 행위가 아니라, 대상을 구원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언약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 노아만이 아니라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의 주체로 포함하십니다. 이는 창조주가 피조물과 맺는 ‘수평적 연대’를 강조합니다. 또한 1절의 ‘바람’(루아흐)은 창세기 1:2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던 하나님의 ‘영’과 같은 단어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무질서(혼돈)를 질서(창조)로 되돌리는 재창조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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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와 효율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사회의 ‘방주’ 속에 갇혀 잊힌 존재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본문은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리의 짐승까지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를 위로합니다. 교회는 소외된 이웃, 동물권, 생태계 보존의 문제를 ‘하나님의 기억하심’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나만의 안녕을 넘어, 고통받는 모든 피조물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루아흐(바람)’가 우리 사회의 메마른 심연에 불어오기를 간구하는 영적 호흡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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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2절 인내의 관찰과 희망의 전령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인간의 능동적인 신뢰와 작은 시도들을 주목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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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이 지나 노아는 방주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오자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고,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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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원 박사는 노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성실함’으로 해석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까마귀와 비둘기라는 피조물과의 교감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고 확인합니다. 비둘기가 물고 온 ‘감람나무 잎사귀’는 심판의 홍수를 견뎌낸 생명의 끈질김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평화(Shalom)를 예고하는 징표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때 임한 성령(비둘기 형상)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정경적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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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경쟁의 피로 속에서 ‘마침내’를 갈망하는 한국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아와 같은 ‘관찰하는 인내’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요구사항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임한 하나님의 작은 징조(감람나무 잎)를 찾아내는 영적 민감성입니다. 직장에서의 갈등이나 가정의 불화라는 ‘홍수’ 속에서도 주님이 보내시는 작은 화해의 신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방주의 창문을 열고 나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둘기’와 같이 희망의 소식을 전달하는 ‘전령’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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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9절 새로운 세계로의 전진과 번성
하나님은 심판의 끝에서 생명을 다시 불러내어, 창조의 원래 사명을 회복시키시는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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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 1일, 지면에서 물이 걷혔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족과 방주 속 모든 생물을 데리고 나오라고 명령하시며,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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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서 ‘나오다’(야차)라는 동사는 창세기 1:24-25에서 땅이 생물을 ‘내다’라고 할 때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이는 노아의 하선이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무너졌던 창조 질서가 다시 수립되는 ‘재창조의 공식적 선포’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생육, 번성, 충만’의 축복을 노아에게 반복하심으로써,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폐기할 수 없음을 확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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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의 그늘이 짙은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방주(교회) 안의 평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화하신 세상(일터와 사회)으로 나아가 생명의 가치를 번성시켜야 합니다. 직장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터가 아니라, 창조의 리듬을 회복하는 ‘아다마(경작할 땅)’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수하는 거룩한 모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파괴적인 욕망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질서를 일구는 ‘재창조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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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절 예배의 향기와 보존의 언약
하나님은 인간의 변하지 않는 죄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통(정념)을 통해 인류를 용납하고 보존하시기로 결심하신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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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인간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거나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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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원 박사는 21절의 ‘인간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주목합니다. 홍수 이전(6:5)에는 인간의 악함이 심판의 근거였으나, 홍수 이후(8:21)에는 오히려 인간의 악함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보존’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심판만으로는 변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시고, 심판 대신 ‘자비의 인내’를 선택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념(Pathos)’이자 ‘자기 극복’입니다. 노아의 번제는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드리는 ‘대속의 예배’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려 세상을 보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예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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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심판의 정서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은 ‘보존의 언약’을 살아내야 합니다. 타인의 허물을 정죄하고 ‘멸절’시키려 하기보다,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적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는 악하나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고백으로 가득 차야 하며, 그 향기가 우리 주변의 메마른 관계들을 적셔야 합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보복의 논리를 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8:22, 사계절의 질서)을 신뢰하며 묵묵히 선을 행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쌓아야 할 ‘노아의 제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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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태초에 말씀으로 질서를 빚으시고,
심판의 홍수 속에서도 생명을 잊지 않으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방주 속에 갇힌 듯 막막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와 우리 곁의 작은 생명들까지 ‘기억’하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의 물결이 하나님의 루아흐(바람)를 통해 물러가게 하시고,
비둘기가 물어온 감람나무 잎사귀처럼
우리 삶의 작은 회복의 징조들을 발견하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여 끊임없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가죽옷으로 덮어주시며 ‘다시는 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신
주님의 그 아픈 사랑(Pathos)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향기를 품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갈등과 보복이 가득한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의 평화를 일구는 제단이 되게 하소서.
심판보다 자비를, 정죄보다 보존을 선택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
메마른 우리 사회에 주님의 샬롬을 흘려보내는
거룩한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방주이자 향기로운 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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