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01-15 한낮의 정적을 깨우는 방문 : 환대(Hospitality) 속에 임한 약속과 웃음의 회복
*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날이 뜨거운 한낮에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은 맞은편에 선 세 사람을 보고 달려나가 영접하며 극진히 대접합니다. 식사 후 그들은 사라의 안부를 묻고 내년 이맘때 아들이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장막 뒤에서 이를 듣던 사라는 자신의 노쇠함을 들어 속으로 웃지만, 하나님은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반문하시며 사라의 웃음을 지적하시고 약속을 재확인하십니다.
*
#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의 유목 문화에서 ‘환대’는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규범이었습니다. 나그네를 보호하고 먹이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인 ‘오정(날이 뜨거울 때)’은 모두가 활동을 멈추고 쉬는 시간이지만, 아브라함은 이 시간에 찾아온 낯선 이들을 위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이 본문은 17장의 할례 언약 이후, 하나님이 인간의 일상(식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시는 파격적인 사건입니다. 송민원 교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명령만 내리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장막으로 찾아와 먹고 마시며 대화하는 ‘수평적 관계’의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성육신(Incarnation)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
# 1-5절 아브라함의 영접과 수평적 환대 : 나그네를 향한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일상의 영성.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 심지어 휴식의 시간 속에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환대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사람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몸을 굽혀 영접합니다. 그는 "내 주여"라고 부르며 물을 가져와 발을 씻게 하고, 떡을 가져올 테니 마음을 상쾌하게 한 후에 지나가라고 간청합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수직적 통보가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 속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여호와인 줄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히 13:2). 그러나 그는 나그네(타자)를 향해 지극히 정성스러운 '수평적 환대'를 베풉니다. 뙤약볕에 달려나가는 99세 노인의 모습은 타인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깨어 있는 영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높은 산 위가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는 그 '관계의 현장'에 임재하셨습니다.
.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는 '효율'과 '안전'을 핑계로 타인에 대한 환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파트 문은 닫혀 있고, 교회 안에서도 끼리끼리의 교제만 넘쳐납니다. 오늘 내가 직장에서, 혹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웃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일 수 있습니다. 거창한 종교적 행위보다, 지친 동료에게 건네는 커피 한 잔, 택배 기사님께 드리는 따뜻한 인사가 바로 아브라함이 보여준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당뿐만 아니라, 우리가 베푸는 식탁과 친절 속에 찾아오십니다.
*
# 608절 풍성한 식탁과 섬김의 자세 : 계산 없는 최선의 섬김과 하나님과 나누는 식탁 교제(Table Fellowship).
하나님은 인간이 차린 식탁에 앉아 음식을 드심으로, 우리와 친밀한 수평적 관계를 맺기를 즐거워하시는 인격적인 분입니다.
.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약 22리터, 엄청난 양)로 떡을 만들게 하고, 자신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합니다. 그리고 엉긴 젖(버터)과 우유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서서 시중을 듭니다.
.
이 장면은 하나님이 인간의 대접을 받으시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요리한 고기를 드십니다. 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먹고 마시며 보여주신 '식탁 교제'의 원형입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계산적이지 않고 풍성했습니다(세 스아의 가루). 또한 손님들이 먹는 동안 주인인 아브라함이 '서 있었다'는 것은 철저한 섬김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수평적 읽기에서 이 식탁은 하나님과 인간이 친구처럼 마주 앉는, 신학적으로 매우 급진적인 '샬롬'의 공간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서도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혹은 섬기면서도 대접받으려는 '갑'의 위치에 서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서서 섬기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교회 봉사나 가정에서의 섬김이 형식적인 의무가 아니라, 나의 가장 소중한 것(기름진 송아지)을 자발적으로 내어드리는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말, 소원해진 가족이나 구역 식구들을 위해 정성스러운 식탁을 마련해 보십시오. 그 밥상머리에서 치유와 회복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 9-10절 사라를 찾으심과 구체화된 약속 : 소외된 자(사라)의 이름을 부르시며 막연한 약속을 구체적인 현실로 바꾸시는 은혜.
하나님은 무대 뒤편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때가 찼을 때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러 오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
그들이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이 장막에 있다고 하자, 그중 한 분이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라는 장막 문 뒤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은 이제 대화의 초점을 아브라함(남성/대표자)에게서 사라(여성/숨겨진 자)에게로 옮기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손님 접대 자리에 나설 수 없었으나, 하나님은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심으로 그녀를 약속의 당당한 파트너로 호명하십니다. 송민원 교수의 책이 질문을 강조하듯, 하나님의 질문은 사라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녀의 소외감을 만지십니다. 막연했던 자손의 약속이 '내년 이맘때'라는 구체적인 시간(Kairos)으로 확정됩니다.
.
우리는 때로 사라처럼 장막 뒤에 숨어 있는 기분을 느낍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 없으셔'라고 생각할 때, 주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직장에서 승진에 누락되었거나,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무대 뒤에 있는 당신의 이름을 아시고, 당신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표를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
# 11-13절 사라의 웃음과 현실 인식 :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와 이성적 판단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냉소적 반응.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체념과 냉소적인 웃음(불신)까지도 다 들으시고 아시는 세밀한 감찰자이십니다.
.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독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느냐"라고 지적하십니다.
.
사라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참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냉소'였습니다. 송민원 식의 해석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현실(늙음, 생리 중단)이 주는 절망의 무게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는 책의 제목처럼,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할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으로 한 웃음'까지 들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의 상처와 체념까지 감찰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봅시다. 입술로는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게 되겠어? 내 상황이 이런데'라며 씁쓸하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 문제, 건강 문제 앞에서 우리는 사라처럼 냉소적인 현실주의자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속마음, 그 한숨 섞인 웃음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체면 차릴 필요 없이, 나의 불신과 절망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
# 14-15절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전과 변화 : 인간의 불가능을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바꾸시며 비웃음을 참된 웃음으로 변화시키시는 권능.
하나님은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는 질문을 통해 우리의 닫힌 세계관을 깨뜨리시고, 두려움을 넘어 믿음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전능자(El Shaddai)이십니다.
.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은 기한이 이를 때 아들이 있으리라고 재차 말씀하십니다. 사라는 두려워서 웃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고 정곡을 찌르십니다.
.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는 질문은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입니다. 여기서 '능하지 못한(팔라)'은 '기이한', '놀라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수평적 조건)를 뛰어넘는 수직적 개입을 선포하십니다. 사라가 거짓말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녀를 벌하지 않으시고, "네가 웃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는 정죄가 아니라, 그녀의 냉소를 참된 기쁨(이삭=웃음)으로 바꾸기 위한 해산의 고통과도 같은 과정입니다. 결국 그녀의 비웃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의 웃음(21:6)으로 바뀔 것입니다.
.
당신의 삶에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능하지 못한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주님은 그 문제의 한복판에서 질문하십니다.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우리가 할 일은 거짓말로 믿음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전능자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나의 냉소적인 웃음이 변하여 찬송의 웃음이 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지금의 꽉 막힌 현실은 하나님의 기적을 담을 그릇입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의 일상 틈바구니로 찾아오셔서 말을 건네시는 하나님 아버지,
마므레의 뜨거운 볕 아래서 나그네를 맞이했던 아브라함처럼,
오늘 우리도 분주한 삶 속에서 잃어버렸던 환대의 영성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내 곁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소외된 이웃, 가족을 대할 때
주님을 대하듯 정성을 다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식탁이 주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성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우리는 사라처럼 장막 뒤에 숨어
현실의 벽 앞에 냉소 짓고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며 스스로 한계를 긋고 포기했던
우리의 불신앙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속마음을 들으시는 주님 앞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는
그 질문을 생명의 동아줄로 붙잡습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냉소와 한숨을 거두어 가시고,
마침내 약속의 자녀 이삭을 안고
기쁨으로 웃게 하실 그날을 기대합니다.
우리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