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3:1-12 고난 속에서 주의 진실과 의에 호소하는 참회자의 기도
무력한 인생,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과 인도를 간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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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3편은 다윗이 극한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개인 탄원시이자 참회시입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하면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함을 인정하고 심판을 행하지 말아 주시기를 호소합니다(1-2절). 이어서 원수들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어 심령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을 토로하며(3-4절), 과거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 역사를 묵상함으로 다시 힘을 얻고 마른 땅이 비를 갈망하듯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5-6절).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속히 응답하셔서 자신을 구원하시고(7-9절), 주의 선하신 영으로 인도하시어(10절), 주의 이름과 의, 그리고 인자하심에 근거하여 원수를 멸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자신이 주의 종임을 재차 고백합니다(1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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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및 문화적 배경 : 이 시편은 표제에 다윗의 시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에 다윗은 왕권을 상실하고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피신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극한의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원망이나 불평에 앞서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 신학적 및 정경적 배경 : 시편 143편은 시편 전체의 일곱 편의 참회시 (시 6, 32, 38, 51, 102, 130, 143편) 중 마지막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이 시는 회개의 실천을 가르치는 중요한 본문으로, 특히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시편을 시편 32, 51, 130편과 함께 ‘바울적인 시’로 명명했는데, 이는 구원이 행위보응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의 법(원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3:20~27과 연결).
또한 이 시는 시편 140-142편과 함께 일련의 비탄시(Lament Psalms) 그룹에 속하며, '간구' 모티브가 주도적으로 나타나면서도, 다윗의 후기 저작으로 간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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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심판을 피하는 기도와 인간의 죄성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기준을 가지셨으나, 언약적 진실과 긍휼에 근거하여 죄인에게 응답하시는 자비의 근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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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라고 간절히 청하며, 응답의 근거로 '주의 진실과 의'를 제시합니다. 이어서 그는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라고 요청하는데, 그 이유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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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응답을 요청하며 제시한 '진실'(에무나)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의'(체다카)는 보복적 율법의 의가 아닌, 당신의 백성을 옹호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의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속성(인애와 진실)에 기도의 근거를 둡니다.
특히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고백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천명하며,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설파한 로마서 3장 20절의 신학적 기초가 됩니다. 시인은 이러한 대전제 하에,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율법적 기준)이 아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애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주의 종'이라 칭함으로써,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전과 생계를 책임져 주셔야 하는 언약적 관계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과 용서는 인간의 행위나 의(義)에 있지 않고, 오직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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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난이나 징계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 철저히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자기의 열심이나 공로가 아님을 인식할 때, 우리는 세상의 불의한 기준이나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을 가지고 설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부당한 대우나 핍박을 받을 때에도, 감정적인 복수심이나 사사로운 원한(사적인 감정)에 휩쓸려 대응하기보다,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하여 판단해 주시도록 호소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사회적 약자들(고난당하는 자, 궁핍한 자 등)을 옹호하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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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극심한 핍박과 내면적 쇠잔의 탄식
하나님은 원수의 혹독한 공격과 영혼의 극한 절망 속에서도 그의 백성의 고통을 꿰뚫어 아시는 전지하신 보호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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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라고 고통을 토로합니다. 그 결과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라고 내면의 황폐함을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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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하다'는 단순히 괴롭히는 것을 넘어 사냥꾼이 짐승을 추격하여 숨통을 끊으려는 듯한 잔인한 행위를 뜻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는 시인이 실제로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흑암한 곳'과 '죽은 지 오랜 자'라는 표현은 시인의 상태가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극도의 절망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내면의 상태를 묘사하는 '심령이 상하며'(쇠약해지다, 압도당하다)와 '참담하니이다'(황폐케 하다, 파괴되다)는 동의 대구법과 점층법으로 시인의 영적, 심리적 존재가 전인격적으로 파괴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고통과 압박으로 인해 활력과 의지마저 상실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은 근원적으로 죄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의 깊이와 영혼의 황폐함을 꿰뚫어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가장 비참하고 무력할 때,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탄원(토로)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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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난의 순간에 자기 연민이나 세상적인 허무함에 빠져, 자신의 상태를 회피하거나 외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내면의 무기력과 고통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하나님께 토로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참담하게 파괴되는 순간조차도, 그 고통의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평안한 듯 보여도 내면적으로는 언제나 절망과 혼돈의 흑암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유한한 인간 실존의 고통을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그분을 향한 절규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비극을 다루는 가장 고상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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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절 옛 은혜 회상에 근거한 구원과 인도 갈망
하나님은 과거의 구원 역사를 묵상하는 자에게 현존하시며, 마른 땅같이 그분을 사모하는 자에게 새 생명과 방향을 제시하시는 언약의 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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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자신의 고통에 몰입하는 대신,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라고 고백하며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그의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간절히 아룁니다. 그는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라고 절박하게 간구하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처럼 되지 않기를 두려워합니다. 이어서 아침에 인자한 말씀을 듣고, 다닐 길을 알도록 인도받기 원하며, 주께 피하여 숨었다고 고백하며 건져내심을 호소합니다(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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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묵상하며-생각하고'라는 동사들은 과거의 하나님의 행사를 상기하는 행위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확신을 선언하는 점층적인 믿음의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시인이 회상하는 '옛날'과 '주의 손의 행사'는 이스라엘의 구속사(출애굽, 가나안 정복 등)뿐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셨던 개인적 은혜도 포함합니다.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한다'는 비유는 시인의 영혼이 곤비하고 메마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단비)를 갈망하는 절대적인 의존을 나타냅니다. '손을 펴는' 행위는 도움을 구함, 찬양,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헌신을 포괄합니다.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간구이며, '아침에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밤(고난)이 지나고 구원의 빛이 속히 임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확한 인도를 요청하는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는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과거의 구원 경험(개인적/역사적)을 묵상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분의 말씀(언약) 안에서 살 길과 나아갈 길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는 능동적인 의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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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 공동체의 위기 상황이나 절망의 시기(예: 경제 위기, 사회적 혼란)에 우리는 민족의 구속사와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영적 훈련을 통해 현재의 난관을 하나님의 통치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처럼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오늘날 공동체의 믿음을 강화하고 미래의 승리에 대한 희망을 굳건히 하는 힘이 됩니다.
개인의 삶에서 불확실한 미래나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내면의 '마른 땅'을 인정하고 감정적인 갈급함에 이끌리기보다,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자하심, 구원)을 듣고 그분의 뜻에 따라 나아갈 구체적인 방향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막연한 행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우리를 지도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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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2절 주의 뜻에 순종하는 종의 구원 확신
하나님은 당신의 종의 신분과 당신의 영광을 근거로 삼아 당신의 선한 영으로 의로운 길(공평한 땅)을 인도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는 주권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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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구원의 근거로 '주의 이름', '주의 의', '주의 인자하심'을 차례로 제시하며 자신을 환난에서 끌어내시고 원수를 멸하소서라고 호소하고, 마지막으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시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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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는 시인과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언약적 관계를 다시금 강조하며,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는 구원을 구하는 간구를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의지를 피력합니다. 이 가르침의 목적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실천(행함)에 있습니다.
'주의 신이 선하시니'라는 고백은 성령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호소하며, '공평한 땅'으로 인도하심은 물리적으로 안전하고 평안한 곳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도덕적이고 올바른 삶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구원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주의 의로'(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 행위) 그리고 '주의 인자하심으로'(헤세드, 언약적 사랑)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원수를 멸해 달라는 간구는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라,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한 공의로운 심판의 요청입니다. 이 모든 구원의 이유를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통해 다시금 확증합니다.
성도의 구원과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악인의 파멸이 아닌, 주의 선한 뜻을 행하며 공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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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공평한 땅'으로 인도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통해 매일 주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주님의 주권 아래 복종시키는 신앙적 결단입니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알기에, 성령의 선하신 인도를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 개인이 '주의 종'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이 정체성은 하나님의 영광(주의 이름)을 위해 행동하며, 불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동력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악은 멸망하며,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확신 아래, 공의로운 세상을 위한 영적 전투에 동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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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진실과 의의 하나님,
우리가 당신의 목전에 의로울 수 있는 인생이 단 하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심판을 행치 마시고, 오직 죄를 용서하시는 당신의 무한하신 긍휼을 따라
이 종의 간구에 귀 기울여 주시옵소서.
원수들의 핍박과 내 영혼의 참담한 쇠잔함 속에서도,
내가 과거 당신의 놀라운 구원 행사(行事)를 묵상하며,
마른 땅과 같이 당신을 사모합니다.
이 죄인을 속히 건져내시고,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사,
당신의 선하신 영으로 나를 공평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주의 의를 온 세상에 증거하시기 위하여,
이 연약한 종을 환난에서 이끌어 내시고,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오직 주의 종이며,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과 영광이 되심을 믿사오니,
사망의 어둠 속에서도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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