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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1:1-36 폐허 위에 피어나는 기억의 꽃

신앙은 화려한 승전보가 아니라, 비루해 보이는 일상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넣는 거룩한 견딤입니다.

*

주님의 은총이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고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느라 여념이 없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스며들기를 빕니다.

겨울바람이 제법 매섭습니다.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고 나목(裸木)으로 서서 침묵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저 나무들처럼 춥고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손에 쥔 것은 별로 없고, 신앙생활마저 습관처럼 굳어져 가슴 뛰는 설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오늘 우리가 마주한 느헤미야 11장은 바로 그런 '황량함'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폐허였습니다. 그곳은 '영광의 도성'이라기보다는, 무너진 돌무더기와 가시덤불이 엉킨 '위험한 현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안전하고 비옥한 시골 마을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지도자들이 먼저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았고,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십분의 일을 그곳에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원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겠다고 한 사람들"을 백성들이 축복했다고 기록합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서 숲속에 난 두 갈래 길을 노래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앞에 놓인 길은 '편안한 망각의 길'과 '불편한 기억의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산다는 것은 매일 밤 경계를 서야 하는 고단함과,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 척박한 땅을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그곳이 하나님과 만나는 '성소'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1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열된 사람들의 이름과 숫자입니다. 낯설고 투박한 이름들의 행렬,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무엇일까요? 문학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스쳐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권력자들의 이름만 대서특필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폐허를 지키기 위해 남겨진 무명(無名)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호명(呼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영웅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무너진 성벽 곁에서, 비록 두렵고 떨릴지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긴 명단은 단순한 인명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네가 흘린 땀과 눈물, 남들은 알지 못하는 그 작은 헌신을 내가 다 기억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 회의에 빠지는 이유는, 내가 드리는 기도가 공허한 메아리 같고 나의 헌신이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제비 뽑혀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사람들의 두려움조차 안아주시고, 자원하여 고난의 짐을 진 자들의 용기를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주십니다. 우리가 위대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신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는 더 적극적인 신앙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나의 의지로 악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비록 초라한 예루살렘의 폐허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곳은 거룩한 성(Holy City)이 됩니다. 부디 우리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시는 그 넉넉한 은혜 안에서, 오늘 하루도 묵묵히, 그러나 기쁘게 각자의 자리를 지켜내는 복된 길벗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느헤미야 11:1-36 무심한 추첨, 거룩한 자리의 위태로움

가장 위태로운 거룩한 땅에 제비를 뽑아 정착하는 이들의 명단은, 안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상식과 달리 위험한 자리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은총을 증언합니다.

*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깊은 평강을 기원합니다.

느헤미야 11장은 성벽 재건이라는 거대한 물리적 노동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거주 문제를 다룹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비를 뽑아(11:1), 열에 하나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고 아홉은 다른 성읍에 머물도록 했습니다(11:1). 그리고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옮겨 살겠다고 나선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11:2).

이 대목은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과 신앙의 소명이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었지만, 그 성읍은 여전히 공격에 취약하고 생존 조건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기름진 땅(9:25)이나 상대적으로 안전한 근교 마을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은 어쩌면 불확실성취약함을 감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경쟁에서 이기고, 지위와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덜 떨어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위험하고 고단한 삶의 중심부에 서기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기 안전만을 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붙이는 돈(맘몬)의 지배와 성공이라는 욕망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늘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언자들의 시대부터 늘 그래왔듯이,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이나 웅장한 제도가 아니라, 가장 고통스럽고 취약한 자리에 당신의 현존을 두시고, 우리를 그곳으로 부르십니다.

특히 이들이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정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제비는 인간의 선택이나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 작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이들은 복을 받았지만, 제비에 의해 뽑힌 이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조건과 소명이 우리의 완벽한 의지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분께서 유한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자유를 제한하신 언약의 신비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측은한 마음(긍휼)과 인애(헤세드)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삶은 때로 모호하고 우리를 불안의 벼랑 끝으로 내몰 때가 많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들 수도, 혹은 더 적극적인 헌신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은 우리가 가진 '힘'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의 완악함과 나약함을 아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여행하는 분이심을 확신하며, 우리의 일상이라는 순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세상의 영광과 멀리 떨어진 '베다니'(고통의 집)처럼 보일지라도, 바로 그곳이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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