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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2:1-26 오래된 미래, 그 거룩한 이어달리기


신앙이란 황무지 같은 현실 속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켜낸 이들의 ‘기억’에 잇대어,
오늘 나에게 주어진 ‘거룩한 당번’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

주님의 평화가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고뇌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깃들기를 빕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앙상해진 겨울 나무들을 보노라면, 화려했던 잎사귀들은 다 어디로 갔나 싶어 마음이 헛헛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무는 알고 있습니다. 잎이 진 자리는 끝이 아니라, 뿌리로부터 올라온 생명이 머무는 새로운 시작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느헤미야 12장의 본문은 마치 겨울 나무의 뿌리처럼,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지탱해 온 ‘숨겨진 이름들’의 목록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족보나 명단이 나오면 슬그머니 건너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낯선 히브리 이름들의 나열이 지루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 김춘수 님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듯, 이 무미건조해 보이는 명단 속에는 꽃처럼 피어났다가 흙으로 돌아간 치열한 삶의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스룹바벨과 함께 1차로 포로 귀환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무너진 성전과 잡풀이 우거진 예루살렘의 폐허를 택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을 반겨준 것은 환호성이 아니라 짐승의 울음소리와 적들의 위협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황무지 위에 제단을 쌓고 예배의 불씨를 살려냈습니다. 오늘 본문 12장은 바로 그 ‘예배의 개척자’들의 이름과, 그 뒤를 이어받은 후손들의 이름을 나란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연속성’입니다. 할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이 명단은 신앙이 ‘나 혼자만의 고독한 결단’이 아니라, 거대한 은혜의 강물 속에 합류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지만,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응답이 빚어내는 이중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회의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나 하나 예배 빠진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나의 이 작은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수많은 이름 중에는 우리가 아는 위대한 영웅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성전 문을 지키고, 찬양을 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 이들이 있었기에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재건이라는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보십니다. 누군가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지만,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줄을 당겨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그 두 사람의 무게가 다르지 않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인생의 무게 때문에 잠시 주저앉고 싶은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고아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이 눈물로 닦아놓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1절부터 26절까지 이어지는 이 지루한 이름들의 행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다는 ‘기억의 증명서’입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곳을 ‘성소’로 삼으십시오. 거창한 일을 하려 애쓰기보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시간과 공간을 묵상과 기도로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써 내려갈 느헤미야 12장의 뒷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이어달리기를 하는 주자들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손에 들린 바통을 하나님은 가장 귀한 보물처럼 여겨주실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

느헤미야 12:1-26 오랜 목록 속에 새겨진 소명 : 흐르는 시간 속의 불멸성

기나긴 제사장들의 명단은,
시간의 부식 속에서도 당신의 언약을 성실하게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고요하고 끈질긴 은총에 대한 증언입니다.

*

광양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깊은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느헤미야서 12장의 시작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긴 목록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 때에 돌아온 이들의 이름(1-7절)과 대제사장 가문의 계보(10-26절)가 건조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서사의 흐름을 멈추게 만드는 이 기나긴 이름들을 보며 우리는 종종 이 문헌을 건너뛰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마치 지루한 역사 교과서를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아야 사물이나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듯, 이 목록은 단순한 계보가 아닙니다. 이 명단은 오랜 망각의 시간과 파괴의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꿈을 지키기 위해 소명을 부여받았던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존재의 소환장과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화려한 영웅들의 이름과 찰나적인 성공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와 재산, 혹은 뛰어난 지혜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기억에서 쉽사리 사라질 수 있는, 겉보기에 평범한 이들의 이름을 역사 속에 굳이 새겨 넣었습니다. 이들의 소명은 거창하고 드라마틱한 '사자후'를 토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성전 제의를 감당하고, 백성의 정결함을 돕는 반복적이고 성실한 일상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의 이 긴 목록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가장 깊은 진실은 바로 하나님의 끈질긴 인애(헤세드)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이탈하는 '반역의 드라마'였지만, 하나님은 크신 긍휼을 따라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목록은, 회복된 예루살렘의 종교적 질서가 인간의 능력이나 완벽한 헌신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음을 웅변합니다.

우리의 삶 역시 불확실성과 모호함 속에서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의 작은 헌신이 거대한 세상의 무의미 앞에서 무슨 소용일까 회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의 이름은, 비록 우리의 삶이 때로 누추하고 너절하며, 사소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큰 구원의 이야기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완벽한 성취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심연 속에 있을 때조차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하늘의 인력(引力)과, 그분의 은총을 확신하며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소박한 응답입니다. 마치 만리장성이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완성되었듯이, 우리의 믿음은 화려한 체험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라는 순례의 길 위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성실성에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그분의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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