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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05:11-21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화목의 사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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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권면하며, 자기를 추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11-13절). 그가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이 길을 가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입니다(14-15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며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지 않습니다(16-17절).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18-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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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을 '그러므로'로 이어받아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라고 시작합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설 날을 아는 사람은 오늘 사람 앞에서 어떻게 일하는지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이 오늘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사역의 동기와 화목의 직분으로 이어집니다. 무너질 장막을 아는 사람이 남은 날을 무엇에 쓰는지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 고린도교회에는 화려한 말솜씨와 추천서를 앞세운 순회 교사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으며 고난을 끊임없이 겪는 바울을 업신여겼고, 어떤 이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까지 수군거렸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그 말에 마음이 기울어 바울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는 고통스러운 방문과 눈물의 편지가 남긴 금이 아직 다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화목'은 신학의 낱말이기 전에 바울과 교회 사이의 아픈 현실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교회의 소식을 기다리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 오늘 본문은 3장 1절에서 7장 4절까지 이어지는 바울의 사도직 변론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며, 고린도후서 전체의 신학적 심장이라 불립니다. 바울은 자기 사역의 원천(11-15절), 그 사역이 열어 놓은 새 창조(16-17절), 그리고 그 사역의 내용인 화목의 직분(18-21절)을 차례로 밝힙니다. 화목은 이 편지 전체를 꿰는 바울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리고 다음 본문에서 이 화목의 부름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간곡한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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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5절 사랑이 사랑으로 사랑이게

성자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신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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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권면한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이미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 있으니 성도들의 양심에도 그렇게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가 자기를 다시 추천하는 것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성도들이 대답할 말을 주려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미쳤든 온전하든 그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며, 그를 몰아가는 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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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의 '두려우심'은 겁에 질린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갖는 경외입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합니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평가하실 분이 주님이시기에 그는 사람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고, 동시에 그 일을 맡은 자로서 함부로 일하지 않습니다. 13절의 '미쳤어도'는 본래 '자기 밖으로 나가 서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이 말을 바울의 황홀한 체험으로 읽는 이들도 있지만, 앞뒤 맥락은 다른 그림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매 맞고 갇히고 죽을 고비를 거듭 넘기면서도 복음을 전했고, 사람들의 상식으로 보면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비난을 부인하지 않고 받아 냅니다. 내가 미쳤다면 하나님 때문이요, 온전하다면 여러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교회를 향해서도 자기를 위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14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바로 이어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이 그 사랑의 내용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강권하시는도다'로 옮긴 말은 사방에서 에워싸다, 붙잡아 이끌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말 성경 가운데는 이를 '휘어잡습니다'로 옮긴 번역도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울을 묶어 꼼짝 못 하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붙잡아 어딘가로 데려가는 사랑입니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붙들려 교회를 박해하러 갔습니다. 다메섹 이후의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 그 교회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잡으려던 예수께 잡혔고, 죽이려던 예수를 위해 죽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사랑이게 하는 이 전환이 바울 사역의 원천입니다.

15절은 그 사랑이 겨냥한 목적을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모두를 대표하여 죽었으니 모두가 죽은 것이며, 이제 그 안에서 사는 삶은 자기를 위한 삶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거짓 교사들과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힌 바울의 차이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율법이나 두려움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으로 보이신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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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욕심, 뒤처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남의 시선에 떠밀려 하루를 삽니다. 교회 안에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의무감이 봉사의 동력이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힘은 곧 바닥이 나고, 사람의 박수가 그치면 우리도 멈춥니다. 바울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도 멈추지 않았는데, 그를 붙든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사로잡히면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기꺼이 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고, 마음과 걸음을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무엇에 붙잡혀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식구를 섬기는 일이 의무와 생색이 되지는 않았는지,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까닭이 그저 뒤처지지 않으려는 두려움은 아닌지 살핍니다. '최선'이라는 말에는 그저 열심히 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한다는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오늘 내가 목숨까지 걸 만큼 마음을 쏟는 일이 주님의 뜻과 맞닿아 있는지 돌아보겠습니다.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사는 하루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잡힌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의 칭찬과 숫자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섬김의 이유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보기에 손해 보는 일,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라도 그 사랑이 이끄는 길이라면 기꺼이 걷게 하옵소서. 지쳐서 멈춘 지체가 있다면 다시 그 사랑 앞에 서서 새 힘을 얻게 하옵소서. 섬김의 자리에서 서운함이 쌓인 이들에게도 그 사랑이 먼저 닿게 하옵소서.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주님이 아신다는 사실로 넉넉해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 모든 성도의 삶의 동인이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 흘러가 또 다른 사람을 붙잡는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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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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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제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그리스도까지도 육신을 따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을 보는 눈을 바꾸었고, 그 눈으로 보면 세상은 이미 새 창조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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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의 '육신을 따라'는 사람을 보는 잣대를 가리킵니다. 혈통과 지위, 외모와 말솜씨, 성공과 실패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재는 방식입니다. 고린도의 교사들은 바로 그 잣대로 바울을 재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도 한때 그 잣대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다메섹 이전의 바울에게 나무에 달려 죽은 나사렛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였고, 로마를 무찌를 메시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을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버린 것은 예수가 아니라 육신의 잣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게 된 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듯 사람을 보는 눈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17절은 동사가 생략된 감탄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새 창조!'라는 외침에 가깝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의 약속을 울립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19).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사 65:17). 선지자들이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리라 기다렸던 하나님의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피조물은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진 사람이 아니라 새 시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새 창조는 한 사람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인류와 마침내 온 피조 세계로 번져 갑니다.

'보라'는 놓치지 말고 눈여겨보라는 부름이고, '되었도다'는 이미 이루어져 지금도 그 상태가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시제입니다. 새것은 장차 올 소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현실입니다. 다만 우리 눈에는 아직 옛 세상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눈을 여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시고, 아직 변하지 않은 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것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시고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며 만물은 다스림을 맡은 대상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새 창조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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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도 육신의 잣대로 사람을 잽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차림새와 말투, 사는 동네와 다니는 직장을 보고 마음속으로 값을 매깁니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과 헌신의 크기로 사람을 줄 세우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가 하찮게 여긴 그 사람도 하나님이 새로 지으신 작품입니다. 새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나만 새로워졌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을 쓸모로 재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으로 다시 지으십니다. 그 눈을 빌려 볼 때 우리 곁의 관계도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가정에서 식구들을 지난날의 실수와 허물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이를 능력과 쓸모로만 평가하지는 않았는지 살핍니다.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볼 때 낙심하기보다 이미 시작된 새것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육신의 잣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말씀을 붙들고, 어제의 실패에 묶이지 않고 새 피조물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를 오래 괴롭혀 온 옛 습관 앞에서도 그것이 이미 지나간 것이라는 선언을 믿음으로 받겠습니다. 새것은 내 노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새 창조를 미리 살아 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나누지 않고, 가난한 이와 넉넉한 이, 오래된 성도와 처음 온 이가 한 식탁에 앉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가운데 들어오는 이웃과 다문화 가정의 지체들이 낯선 손님이 아니라 새 피조물의 형제자매로 환대받게 하옵소서. 과거의 상처로 서로를 묶어 두지 않고, 새것이 되었다는 선언을 서로에게 들려주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를 통해 이 동네가 하나님의 새 일을 엿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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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1절 화목의 말씀을 부탁하셨으니

성부 하나님은 먼저 화목을 청하시고 우리를 그 사신으로 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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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화목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합니다. 그 근거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 대신 죄로 삼으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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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의 '화목'은 본래 상거래에서 값을 서로 맞바꾸는 일이나, 원수 된 관계가 친구 사이로 바뀌는 것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신약에서 구원을 이 말로 설명한 사람은 바울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주어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를 청하는 쪽은 대개 잘못한 쪽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화목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화목의 대상도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말합니다. 상처 입은 쪽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고대의 어떤 글에서도 공격받은 신이 먼저 화해를 시도했다고 말한 예를 찾기 어렵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사람과 화해 받아야 할 분으로 나오지 않고 늘 화해를 먼저 이루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19절은 그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습니다. 아들을 멀리서 대신 보내신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서 몸소 그 길을 걸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반역을 처리하신 길 그 자체입니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는 장부에 적힌 빚을 그 사람 앞으로 계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빚을 그리스도 안에서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소식을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20절의 '사신'은 왕을 대신하여 그 뜻을 전하고 조약을 맺는 대사입니다. 사신은 자기 말을 하지 않고 보낸 분의 말을 전합니다. 바울은 그 말을 명령이 아니라 간청으로 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시니,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비노니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왕의 사신이 엎드려 비는 모습에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담겨 있습니다.

21절은 그 모든 일의 바닥에 놓인 거래를 밝힙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알지 못하신다는 것은 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우리 자리에 서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옛 신앙의 선배들은 '놀라운 교환'이라 불렀습니다. 로마서 3장이 길게 풀어 낸 하나님의 의가 여기 한 문장으로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로 말미암아 진노 아래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 의가 우리 안에서 화목한 삶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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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화해를 어려워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조차 먼저 사과하기가 어렵고, 내가 상처받았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처 입은 쪽이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세상에서 거의 기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전할 사신으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화해는 우리 손에서 멈추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건네라고 주신 것입니다. 화목의 직분은 목회자만의 직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이웃과도 화목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화목의 복음을 전하면서 정작 가까운 사람과 원수처럼 지낸다면, 그 말은 힘을 잃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말보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먼저 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먼저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는지 묻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모든 삶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오래 말을 섞지 않은 식구는 없는지, 일터에서 마음을 닫아 버린 동료는 없는지 살핍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기대어 화해를 미루고 있다면, 상처 입은 쪽이면서도 먼저 손을 내미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오늘 한 사람에게라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목의 말을 건네는 사신으로 살겠습니다. 사신은 자기 말을 하지 않으니, 내 억울함을 앞세우기보다 주님의 간청을 먼저 전하겠습니다. 상대가 그 손을 잡지 않더라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처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교회가 화목의 직분을 맡은 사신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갈라진 마음이 있다면 서로를 정죄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가 갈등이 많은 이 지역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간청을 품고 사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말로만 화목을 전하지 않고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게 하옵소서. 주님과의 화목과 이웃과의 화목을 날마다 점검하며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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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사랑의 주님,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붙잡아 이끄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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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평판에 떠밀려 살지 않고

주의 두려우심을 아는 마음으로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하여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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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은혜로

육신의 잣대를 내려놓게 하시고

내 곁의 한 사람을

하나님이 새로 지으신 작품으로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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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으시고도 먼저 손 내미신 하나님,

우리에게 화목의 말씀을 맡기셨으니

새 백성답게 그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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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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