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01:23-02:17 눈물로 쓴 편지 : 그리스도의 향기로 이끄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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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이 그들을 아끼려 함이었다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밝히고, 많은 눈물로 편지를 쓴 까닭은 교회를 근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려 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1:23-2:4). 이어 교회를 근심하게 한 사람이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여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합니다(2:5-11). 그리고 디도를 기다리다 마게도냐로 건너간 일을 돌아보다가, 문득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올립니다(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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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쁘시다는 고백으로 자기 말의 진실함을 변호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예'가 되었고, 바울의 말도 그 '예'에 매여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변호의 둘째 마디입니다. 바뀐 일정이 변덕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바울은 이제 방문을 미룬 진짜 까닭을 꺼내 놓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출발한 변호가 오늘은 교회를 향한 사도의 눈물로 이어집니다. 미쁘신 하나님을 붙든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정직하게 울 수 있습니다.
# 고린도전서를 보낸 뒤에도 교회의 문제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역 중에 급히 고린도를 찾아갔지만, 그 방문은 교회 안의 한 사람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거스르는 아픈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2장 1절의 '근심 중에' 이루어진 방문입니다.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다시 찾아가는 대신 마음을 쏟아 편지를 썼고, 디도가 그 편지를 들고 고린도로 갔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기다렸고, 소식이 오지 않자 마게도냐로 건너가 마침내 그를 만났습니다. 그 만남의 기쁨은 7장 5-7절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방문과 편지와 기다림이 얽힌 이 관계의 실타래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 오늘 본문의 끝자락인 14절부터는 편지의 큰 단락이 열립니다. 7장 4절까지 이어지는 이 대목에서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이 어떤 사람인지를 길게 풀어냅니다. 그 첫 그림이 로마의 개선 행렬과 그 길에 번지는 향기입니다. 디도를 찾아 헤매던 이야기가 갑자기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는 이 꺾임은, 사도의 사역을 사람의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행렬 위에서 보라는 신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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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2:4절 눈물로 쓴 편지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지 않고 기쁨을 돕는 사랑으로 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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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은 그들을 아끼려 함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돕는 사람이며, 그들은 이미 믿음에 서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시 근심 중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고, 큰 눌림과 걱정 속에서 눈물로 편지를 쓴 것은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려 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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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의 '내 영혼을 걸고'는 직역하면 '내 목숨에 대고'라는 맹세입니다. 만일 자기 말에 거짓이 있다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양심을 증인으로 세웠고, 이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그만큼 이 해명은 그에게 무거웠습니다. 그가 밝힌 까닭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었습니다. 여기 쓰인 말은 누군가가 곤란을 겪지 않도록 손을 거두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때 곧바로 다시 갔다면 바울은 사도로서 징계권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매를 드는 대신 교회가 스스로 문제를 풀 시간을 내어 주었습니다. 방문을 미룬 것은 회피가 아니라 사랑의 절제였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가장 깊은 돌봄이 됩니다.
24절은 이 절제의 뿌리를 보여 줍니다. '주관하다'로 옮긴 말은 주인처럼 다스린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 위에 주인으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신 자신을 '기쁨을 돕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낱말은 함께 일하는 사람, 곧 동역자를 뜻합니다. 사도는 교회 위에 서 있지 않고 교회 곁에서 기쁨을 함께 짓는 사람입니다. 그 근거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는 고백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은 바울에게 기대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위에 이미 서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반대자들이 사람을 제 입맛대로 다루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종처럼 부리고 잡아먹었지만(11:20), 바울은 교회를 자기 소유로 삼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장 1-4절에서 바울은 편지를 쓰던 때의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큰 눌림'은 짓눌려 숨이 막히는 고통이고, '걱정'은 마음이 조여드는 괴로움입니다. 그는 그 편지가 교회를 아프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근심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과 교회의 기쁨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교회가 기뻐할 때 자신도 기쁘고, 자신이 기뻐할 때 교회도 기뻐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가 남길 아픔보다 그 아픔 너머에서 다시 만날 기쁨을 바라보았습니다.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매를 들고 마을 어귀에 서 있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대신 눈물로 기다리십니다. 바울의 눈물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권위로 우리를 굴복시키실 수 있으나, 아들을 내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설득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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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로잡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먼저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집니다. 내 말이 옳으니 따르라고 하고, 따르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바로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옳은 말을 하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대의 믿음을 인정했고, 시간을 내어 주었고, 그 사이를 눈물로 채웠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휘어잡는 힘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일어서도록 곁에서 돕는 힘입니다. 옳음을 앞세운 말은 이길 수는 있어도 사람을 얻지는 못합니다. 눈물로 쓴 말은 더디게 도착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가정에서 식구들의 신앙을 돕는 사람인지, 주관하려는 사람인지 묻습니다. 자녀에게 기도하라, 말씀 읽으라는 말을 얼마나 명령조로 했는지, 배우자의 연약함을 얼마나 조급하게 다그쳤는지 살핍니다. 일터에서도 맡은 자리가 높아질수록 동료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내 의견이 꺾일 때 서운함부터 드러내지는 않았는지도 돌아봅니다. 할 말을 줄이고 기다리는 시간을 늘리겠습니다. 꼭 해야 할 쓴소리라면 눈물로 기도한 뒤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이미 믿음에 서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말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서로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서로의 기쁨을 돕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직분이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곁에서 함께 일하는 자리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성도의 믿음이 이미 그리스도 위에 서 있음을 믿고, 성도는 목회자의 권면에 담긴 사랑을 먼저 읽어 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갈등이 생기면 서둘러 판결하기보다 시간을 들여 기도하며 기다리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사이에 오가는 쓴 말에도 눈물의 흔적이 남게 하옵소서. 다스리는 손이 아니라 붙들어 주는 손이 많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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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1절 은혜로 하는 용서
성령 하나님은 용서의 자리를 지키시어 교회를 사탄의 계책에서 건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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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근심하게 한 사람이 자기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교회 전체를 근심하게 했다고 말하며, 그가 많은 사람에게서 받은 벌은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합니다. 이제는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여 지나친 근심에 삼켜지지 않게 하고, 그를 향한 사랑을 공식적으로 나타내라고 권합니다. 자신도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했으니, 이는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 함이라고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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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에서 바울은 그 사람의 이름을 끝내 부르지 않습니다. '근심하게 한 자', '이러한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바울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당사자였지만, 그는 그 일을 자기 개인의 억울함으로 좁히지 않고 교회 전체의 아픔으로 넓힙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라는 말을 두 번 덧붙여 과장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6절의 '많은 사람'은 교회의 다수를 가리킵니다. 눈물의 편지를 받은 교회가 마침내 움직였고, 그 사람에게 공동체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바울은 그 벌이 '마땅하다', 곧 이미 넉넉하다고 말합니다. 징계는 그 사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판단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교회에 음행한 사람을 내보내라고 했을 때도 그 목적은 그의 영이 주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고전 5:5). 바울에게 권징은 언제나 회복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7절의 '용서하다'는 흔히 쓰는 '죄를 놓아 주다'라는 말이 아니라 은혜라는 낱말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직역하면 '은혜를 베풀라'에 가깝습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져 그를 새 사람으로 빚어 가는 하나님의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고른 것은 용서가 지난 잘못을 덮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을 다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 곁에 '위로하라'가 붙습니다. 1장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한 바울은 이제 그 위로가 넘어졌던 한 사람에게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라는 말은 바다에 삼켜지는 그림입니다. 회개한 사람에게 끝없는 정죄는 구원이 아니라 익사입니다. 교회가 내민 손이 그를 건져 올리는 구명줄이 되어야 합니다.
8절의 '나타내라'는 공적인 결정을 확정할 때 쓰던 말입니다. 마음속으로만 품지 말고 교회 앞에서 그를 다시 받아들였음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10절의 '그리스도 앞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는 용서입니다. 11절의 '속지 않게'는 남의 것을 가로채거나 이용한다는 말의 수동형입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교회는 사탄에게 이용당합니다. 정의를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한 사람을 잃고 공동체가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는 교회 안에서 사탄의 계책이 설 자리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정죄가 굳어지려는 자리마다 용서를 일깨우시며 한 몸을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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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용서하면 잘못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고, 정의가 무너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징계와 용서를 맞세우지 않습니다. 징계가 그 일을 다 했으면 이제 용서가 일할 차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징계를 멈출 때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낙인찍고, 돌아선 뒤에도 그 꼬리표를 떼어 주지 않습니다. 용서는 그 꼬리표를 떼어 주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그 손길은 내가 먼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비로소 움직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판결을 내리고 문을 닫아 둔 사람이 없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다툼이 있을 때마다 오래전 상처를 아직도 들추며 식구를 다시 근심에 빠뜨리지는 않는지, 일터에서 사과를 받고도 여전히 그 사람을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용서했다고 말하면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것도 반쪽 용서입니다. 오늘은 그 사람에게 먼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겠습니다. 다시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내 용서를 확인해 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내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겠습니다.
우리교회가 넘어진 지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잘못이 드러났을 때 덮지도 않지만, 돌이킨 사람을 끝까지 정죄하지도 않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근심에 삼켜지기 전에 먼저 찾아가 위로하는 손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수군거림이 아니라 공적인 환대로 사랑을 확인해 주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사탄이 갈라놓으려는 자리마다 은혜가 먼저 도착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의 용서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는 창이 되기를 바랍니다. 징계보다 회복의 이야기가 더 많이 전해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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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17절 그리스도의 향기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승리의 행렬로 이끄시고 생명의 향기가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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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드로아에 이르렀고 주 안에서 문이 열렸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말씀을 팔아 이익을 챙기지 않고 순전함으로 말한다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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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절은 바울의 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드로아는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린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문을 두고 떠났습니다. 디도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편지가 교회를 살렸는지 더 깊은 상처를 냈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마음에 쉼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역의 기회보다 한 교회와의 관계가 더 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끊기고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디도를 만난 이야기는 7장 5절에 가서야 이어집니다. 바울은 그 사이에 자신의 불안과 방황을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다시 놓습니다. 쫓기듯 떠난 길도 하나님이 이끄신 길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마음의 쉼을 잃은 사도와 감사를 터뜨리는 사도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안해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 불안까지 품은 채로 행렬을 이끄십니다.
14절의 '이기게 하시고'는 로마의 개선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 전쟁에서 이긴 장군은 전리품과 포로를 앞세우고 로마 시내를 행진했고, 길에는 향이 피어올랐습니다. 이 동사 뒤에 오는 사람은 대개 승리한 병사가 아니라 끌려가는 포로였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승리를 빛내는 포로로 그립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처럼 맨 끝에 두셨다고 한 고백(고전 4:9)과 같은 결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그 자리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감사로 받는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포로가 된 것이 그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한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 퍼뜨리십니다.
15-16절의 '향기'는 제사 때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같은 향기가 어떤 이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냄새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과 같습니다(고전 1:18). 그래서 바울은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하고 탄식합니다. 17절의 '혼잡하게 하다'는 포도주에 물을 타서 파는 행상의 속임수를 가리키던 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복음을 듣기 좋게 묽혀 팔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패배의 모양으로 승리하신 분이며,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의 약함을 통해 생명의 향기를 퍼뜨리십니다. 향기가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들린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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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승리를 크고 화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이 열린 곳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고, 마음이 흔들려 자리를 옮기는 것은 실패라 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불안해서 떠난 길조차 하나님이 이끄신 개선 행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약함과 방황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를 퍼뜨리는 길이 됩니다. 향기는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향기를 꾸며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곁에 오래 머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복음을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묽히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듣는 이의 표정을 살피느라 십자가와 회개를 말해야 할 자리에서 입을 다문 적은 없었는지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듣기 싫은 진리는 슬쩍 피하고 위로의 말만 골라 하지는 않았는지,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손해가 될까 봐 향기를 감추고 있지는 않은지 살핍니다. 반대로 내 말과 태도가 사람을 밀어내는 냄새가 된 적은 없는지도 돌아봅니다. 내 고집 때문에 풍기는 냄새를 복음 때문에 받는 핍박으로 착각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 받은 그대로의 말씀을 정직하게 살아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날에도 불평보다 감사를 먼저 입에 올리겠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우리 동네 곳곳에 퍼뜨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시장과 학교와 병원과 일터로 흩어지는 걸음마다 그 향기가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모으려고 복음을 묽히지 않고, 받은 말씀을 받은 그대로 나누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크게 보이는 일보다 작은 자리에서 조용히 향기를 내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앞길이 막히고 마음이 편하지 않은 날에도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의 예배와 섬김이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보며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게 하옵소서. 교회 문을 나서는 성도들의 옷깃마다 하나님 앞에서 피어오른 향기가 배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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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아끼시는 하나님,
매를 드는 대신 눈물로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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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믿음을 다스리려던 마음을 내려놓고
곁에서 기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옳은 말보다 먼저 눈물의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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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선 형제를 끝까지 정죄하던
굳은 마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은혜로 용서하게 하옵소서.
사탄의 계책이 설 자리가 우리 가운데 없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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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하지 않아 길을 옮기는 날에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말씀을 묽히지 않고 받은 그대로 살아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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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