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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05:13-20 믿음의 기도, 사랑의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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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편지의 마지막을 기도로 엽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하여, 삶의 모든 자리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게 합니다(13절).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라고 하면서, 우리와 성정이 같았던 엘리야의 기도를 증거로 듭니다(14-18절). 편지는 작별 인사 대신 진리를 떠난 형제를 돌아서게 하라는 권면으로 끝납니다(19-20절). 고난과 질병과 죄와 미혹 앞에서 홀로 서지 말고 서로를 붙들라는 것이 이 편지의 마지막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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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편지를 받은 흩어진 열두 지파의 일상은 그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부자들에게 삯을 떼이고, 법정에 끌려가고, 고아와 과부는 차별과 착취 속에서 도움의 손길에서 밀려나기 일쑤였습니다. 병이 들면 돌볼 사람도 약값도 없어 홀로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자칫 빈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기도를 혼자 견디는 일로 두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짊어지는 일로 세웁니다. 아픈 이의 방으로 찾아가는 장로들과 서로를 위해 무릎 꿇는 형제들이 이 편지가 그리는 교회의 마지막 얼굴입니다.

# 기도로 편지를 맺는 것은 당시 편지의 익숙한 마무리였지만, 야고보에게 기도는 편지 전체를 꿰는 실입니다. 1장에서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의심 없이 구하라고 했고, 4장에서는 정욕으로 잘못 구하는 기도를 꾸짖었습니다. 시편의 기도자들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었듯이(시 50:15), 야고보는 고난의 자리마다 그 하나님을 부르라고 권합니다. 또한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라 하시며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를 가르치셨듯이(마 7:7-11), 야고보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탕에 둡니다.

# 어제 본문은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며 선지자들과 욥을 인내의 본으로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기도라고 말합니다. 편지 첫머리에서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고 지혜를 구하라고 했던 야고보는, 이제 마지막에서 고난과 질병과 죄와 미혹이라는 구체적인 시험 앞에서 기도로 서로를 붙들라고 당부하며 편지를 둥글게 닫습니다. 인내가 기다림의 자세라면 기도는 그 기다림을 채우는 숨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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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6절 고난을 이기는 길은 기도

성부 하나님은 고난과 질병의 자리에서 그 백성을 일으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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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고 묻고 기도하라 명하며,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합니다. 이어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하고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며 죄도 사하신다고 약속한 뒤,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라고 공동체 전체로 넓힙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선언이 이 단락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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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의 기도하라와 찬송하라는 모두 현재 명령형입니다. 한 번 하고 마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이어 가야 할 삶의 습관이라는 뜻입니다. 고난당한다로 옮긴 말은 질병보다 넓은 말로, 박해와 가난과 억울함처럼 우리를 짓누르는 온갖 형편을 견뎌 내야 하는 마음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런 때에 불평하거나 이를 악물고 혼자 버티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운 날에도 찬송하라고 합니다. 즐거울 일이 생겼는데 입에서 찬송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시험에 빠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고난도, 하나님 없는 즐거움도 모두 우리를 넘어뜨리는 시험이 됩니다. 늘 기도하고 찬송하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해석할 때 우리는 시험을 이깁니다.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도 같은 결입니다(살전 5:16-18).

14-15절에서 야고보는 병든 자에게 장로들을 청하라고 합니다. 병든 자가 장로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이 병든 자에게 가야 하는 모습이니, 그만큼 그는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합니다. 기름은 당시 상처를 다스리는 약으로도 쓰였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 치유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기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도, 장로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고친다는 말 대신 구원한다는 말을 쓰고, 그를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라는 조건문은 모든 병이 죄 때문이라는 단정을 막으면서도, 몸의 회복과 영혼의 회복이 함께 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6절에서 야고보는 이 기도를 공동체 전체로 넓힙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기도하라는 명령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할 때 의인은 특별히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사는 공동체의 한 사람입니다. 장로는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성숙하고 겸손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연륜과 경험이 쌓이면 자칫 고난 중에 있는 후배들에게 훈수를 두며 이미 시험을 다 이긴 달인처럼 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람의 기도에 힘이 있는 것은 그가 넘어질까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일으키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형편을 맡겨 드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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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난의 날에 기도를 마지막 수단으로 미뤄 두고, 즐거운 날에는 찬송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 앞에 서는 예배자로 살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리고 아플 때 혼자 앓지 말고 기도를 청하라고, 또 기도의 요청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라고 부릅니다.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장로로서, 목자로서 과연 온전한 자인가, 주의 뜻을 옳게 분별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의 사람인가, 연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인가 돌아봅니다. 기도를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첫 번째 응답으로 삼고 있는지, 아플 때 체면 때문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지는 않은지도 살핍니다. 내가 어려울 때 기도를 요청할 장로가 내 곁에 있는지, 누군가 나를 향해 그런 기도를 청할 만한 신뢰와 기도의 능력을 내가 지니고 있는지도 묻습니다. 가정에서 아픈 식구 곁에서 말보다 먼저 손을 잡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일터에서 힘들어하는 동료의 이름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아픈 이를 찾아가 기도하는 공동체, 서로 허물을 털어놓아도 안전한 공동체, 즐거운 일 앞에서 함께 찬송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그룹마다 서로의 기도 제목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병 낫기를 위해 함께 무릎 꿇는 일이 우리교회의 일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병상에 있는 지체를 찾아가 짧게라도 함께 기도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즐거운 소식 앞에서는 함께 기뻐하며 찬송하고, 슬픈 소식 앞에서는 함께 울며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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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절 기도의 모범, 엘리야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의 기도에도 하늘을 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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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의인의 간구에 힘이 있다는 말의 증거로 엘리야를 불러냅니다. 그는 먼저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런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기도와 응답을 두 번 짝지어 보여 주면서, 평범한 사람의 기도가 하늘과 땅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앞의 의인의 간구에 대한 증거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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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가 엘리야를 소개하며 맨 먼저 꺼낸 말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평범함입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와 똑같은 감정과 약함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를 모세와 함께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높였고, 하늘로 올라간 그를 거의 천상의 존재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도 한 여인의 협박에 도망쳐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된 까닭은 그 안에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정욕으로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했으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자기 나라에 고난을 내려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아합의 다스림 아래 바알과 아세라를 비와 풍요의 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 우상들의 거짓을 드러내 주시기를, 이 시대의 악 앞에서 침묵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 결과가 삼 년 반의 가뭄이었습니다. 이른 비 한 번만 걸러도 한 해 농사를 망치는 땅에서 그 긴 가뭄은 누구도 바알이 비의 신이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병든 나라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칼이었습니다. 그러니 의인의 기도는 내 소원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아픈 이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빨리 낫게만 해 달라고 구하기보다,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을 보게 해 달라고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먼저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붙든 기도였습니다(왕상 18:1).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일곱 번이나 엎드렸습니다(왕상 18:42-44). 그 끈기는 고집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의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의 손으로 그를 먹이시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빚으셨습니다. 메마른 땅 위로 쏟아진 비는 병든 사람이 다시 일어날 때의 기쁨과 같습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막 11:24). 우리 기도가 하늘에 닿는 것은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사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6-27). 그래서 의인의 간구는 하늘을 움직이는 능력이 아니라, 하늘이 움직이시도록 자기를 내어 드리는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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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를 보며 기도는 특별한 사람의 몫이라고 물러서기 쉽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불러 세웁니다. 내 연약함이 기도를 막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됩니다.

나의 기도를 점검합니다. 간절한 기도,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 믿음의 기도, 신실한 기도, 의인의 기도, 인내의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자기 부인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만을 구하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옮겨 가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에도 내 바람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구하고, 일터의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일곱 번 엎드리는 끈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그 침묵 속에서 나를 빚으시는 손길을 신뢰하기를 원합니다. 나 같은 사람의 기도도 들으신다는 사실이 오늘 나를 다시 무릎 꿇게 합니다.

우리교회가 기도로 하늘을 여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의 능력이 몇몇 사람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의 특권이라는 것을 믿고,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함께 기도의 자리에 서기를 원합니다. 새벽마다, 수요일마다, 묵상의 첫자리마다 드려지는 작은 기도들이 메마른 땅에 비를 부르는 엘리야의 기도처럼 쌓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가 행사가 아니라 우리교회의 호흡이 되기를 원합니다. 응답이 더딜 때에도 일곱 번 엎드린 엘리야처럼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기도의 자리를 지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 은혜를 함께 기억하며 감사의 찬송을 올려 드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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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절 떠난 이를 돌아서게 하라

성자 하나님은 미혹된 길의 죄인을 찾아 생명으로 돌이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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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하고 부르며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가 있을 때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사람은 죄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고 허다한 죄를 덮게 된다고 말합니다. 편지는 작별 인사도 축복도 없이, 길 잃은 한 사람을 돌아서게 하라는 이 당부로 끝납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는 기도에서 길 잃은 영혼을 돌이키는 사랑으로 권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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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되다로 옮긴 말은 길을 잃고 헤매다, 속다는 뜻을 가진 낱말로 1장 16절의 속지 말라와 같은 말입니다.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서는 율법을 버리고 특히 우상을 섬기는 일을 가리킬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진리는 머릿속 생각만이 아니라 걸어가는 길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시편 기자가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라고 기도했듯이(시 25:5), 진리를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던 길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0절에서 이를 미혹된 길이라고 부릅니다. 야고보가 염두에 둔 사람은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 중에 있던 형제, 한때 함께 예배하다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길을 잃은 공동체의 지체입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이런 이들이 생깁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기도 하고, 고난 가운데 시험에 들어 지쳐 포기하기도 합니다.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무너진 경우도 많습니다.

왜 야고보는 편지를 이 권면으로 끝낼까요? 이 편지를 쓴 목적 자체가 흩어진 성도들을 잘못된 길에서 지키고 돌이키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1장의 시험에 임하는 태도, 시험을 이기는 길, 시험의 실제 예라는 순서가 5장 끝에서 그대로 되풀이되며 편지를 감쌉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듯이 떠난 형제를 돌아서게 하는 것도 살아 있는 믿음의 일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영혼의 생명과 죽음이 갈리는 일입니다. 마귀가 그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면, 믿음의 지체들은 그를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남을 정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내릴 자격이 없듯이, 누군가를 포기함으로써 그에게 심판을 선고할 자격도 없습니다. 스스로 돌이키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다시 불러 주는 형제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고 허다한 죄를 덮는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잠언의 말씀처럼(잠 10:12), 돌이킨 죄인의 죄를 덮으시는 분은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한 손과 발로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주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비유로 이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마 18:12-14). 그리고 친히 길 잃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으셨습니다. 야고보가 편지의 마지막 마침표를 돌이킴에 찍은 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 결국 길 잃은 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데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돌이킨 것이 아니라 먼저 돌이킴을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도 다른 이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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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떠나간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만 하다가 돌아서기 쉽습니다. 그러나 길 잃은 영혼을 돌아서게 하는 일은 특별한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불러 주신 것, 진리를 알게 하신 것, 누군가를 기도와 섬김으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돕는 일은 모두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이들, 연약한 믿음의 여정에 있는 이들, 낙심한 이들, 고난의 여정에 있는 이들이 모두 우리가 돌보고 품어야 할 이들입니다. 오랫동안 예배에 나오지 않는 가족과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가정에서 신앙을 잃어 가는 식구에게 정죄보다 사랑으로 먼저 다가가고, 일터에서 지친 동료에게 복음의 소망을 조용히 건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다가가지 않고, 그가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나 또한 언제든 미혹될 수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며 겸손히 서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시고, 방황하고 길 잃은 영혼들을 긍휼히 여겨 옳은 길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도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교회가 떠난 이의 자리를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동안 보이지 않는 지체에게 안부를 묻는 작은 연락 하나가 그를 다시 돌아서게 하는 손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돌아온 이를 따지지 않고 덮어 주며 환대하는 공동체, 탕자의 귀환에 버선발로 달려 나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떠난 이의 허물을 들추기보다 사랑으로 덮어 주고, 돌아온 이가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곁에서 함께 걸어 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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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고난의 날에는 기도하고

즐거운 날에는 찬송하며

모든 순간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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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이들, 고난 중에 있는 이들,

시험 가운데 있는 이들을 발견하고

찾아가 손을 얹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서로의 허물을 고백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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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성정이 같았던 엘리야처럼

믿음의 기도, 신실한 기도,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끝까지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의 동역자들을 붙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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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을

분별하고 섬길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다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여

몸과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도

온전히 회복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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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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