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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01:12-22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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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세상에서와 특별히 고린도 교회를 향해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과 은혜로 행했다는 것을 양심이 증언한다며, 그것이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12-14절). 이어 고린도를 두 번 들르려던 방문 계획이 바뀐 일을 두고 경솔하게 '예' 했다가 '아니요' 하는 사람이 아니냐는 의심에 답합니다(15-17절). 그 답은 자기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입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예'가 되셨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며, 하나님은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18-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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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부터 7장까지는 바울이 자기 사역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긴 대목입니다. 그 첫 매듭은 방문 계획의 변경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 가겠다고 알렸고(고전 16:5-7), 그 뒤 고린도에 먼저 들렀다가 마게도냐에 다녀와서 다시 들르는 두 번의 방문으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급히 찾아간 '고통스러운 방문'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뒤, 다시 찾아가는 대신 눈물로 쓴 편지를 보냈습니다. 약속했던 두 번째 방문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회는 기다리던 사도 대신 편지 한 통을 받아 들었습니다.

# 그러자 교회 안에서 바울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이들은 말솜씨와 추천서와 혈통을 내세우며 바울의 사도됨을 깎아내렸고, 바뀐 일정은 좋은 빌미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관계를 다시 잇는 일과 복음의 신뢰를 지키는 일이 하나로 묶여 있었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의심받으면 전해진 복음도 함께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정 해명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가장 깊은 자리에 닻을 내린 채 시작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여행 일정이 복음의 신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이 대목의 긴장입니다.

#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건지셨고 건지실 분이며, 그 신뢰가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위로의 하나님은 곧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사형 선고 같은 밤에도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바울은 오해의 한복판에서도 그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환난에서 건지신 손과 약속을 지키시는 손은 같은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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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서로의 자랑

성부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를 서로의 자랑으로 세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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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세상에서와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육체의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말하며, 그것을 양심이 증언하니 이것이 자기의 자랑이라고 밝힙니다. 그는 편지에 숨은 뜻을 담지 않았고 그들이 읽고 아는 그대로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그들이 자신을 부분적으로 알지만 주 예수의 날에는 서로가 서로의 자랑이 되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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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문장에서 12절은 '자랑'이라는 낱말로 시작합니다. 문장 맨 앞은 가장 무게가 실리는 자리이니, 바울은 긴 변론의 첫 단어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못을 박는 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랑은 자기를 드러내는 부정적인 말이지만, 명예와 수치를 따지던 1세기 지중해 세계에서 자랑은 내가 무엇에 근거해 정당한지를 밝히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을 자랑하는지를 보면 그가 사도의 권위를 어디서 찾았는지가 보입니다. 그는 자랑의 내용을 말하기 전에 그 근거로 양심의 증언을 세우고, 이어 긍정과 부정과 긍정을 겹쳐 놓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육체의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사역의 수단이 사람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육체의 지혜'는 고린도의 반대자들이 내세우던 사역자의 조건, 곧 풍채와 말솜씨와 처세술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바울을 두고 교활하여 속여 취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12:16), 바울은 오히려 재정 후원을 거절하면서까지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기서 '진실함'으로 옮긴 말은 햇빛에 비추어 보아도 티가 없는 투명함을 떠올리게 하는 낱말이고, '거룩함'은 섞이지 않은 순전함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양심도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처럼 이성이나 관습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앞에서 깨어 있는 양심입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나 같은 사람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는 그를 사도로 부른 선물이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그를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13-14절은 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읽다'와 '알다'는 헬라어로 소리가 비슷한 말이어서, 바울은 말놀이처럼 읽는 대로 알아 달라고 청합니다. 겉으로 쓴 글과 속에 품은 뜻이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와 '완전히', '지금'과 '주 예수의 날'을 맞세웁니다. 부분적인 앎에 근거한 판단은 관계를 깨뜨리지만, 그날에는 숨은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날의 빛 앞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는 그가 받은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음을 보여 줄 열매이고,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그들을 바른 복음으로 그리스도께 이끈 사람입니다. 섬김과 세움이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고 서로에게로 흐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오해의 지금을 그날의 온전한 앎으로 이끄시고, 서로를 의심하던 사람들을 서로의 면류관으로 세우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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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를 부분적으로 알면서도 다 안다고 쉽게 말합니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말 바꿈으로 사람 전체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언제나 부분입니다. 주 예수의 날에야 온전히 알게 된다는 고백은 판단을 미루게 하는 겸손이자, 오해받는 자리에서도 견디게 하는 소망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성과나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투명한 삶이 될 때, 사람들의 판단에 덜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누군가를 한 장면만 보고 단정하지는 않았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식구의 말 한마디를 붙들고 그 마음 전체를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일터에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고 동료의 수고를 지워 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핍니다. 반대로 내가 오해받을 때 억울함을 앞세우기보다 투명하게 설명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쓰는 문자와 하는 말이 속마음과 다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읽는 대로 알아도 되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서로를 부분적으로 알기에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섭섭한 소문이 들려도 당사자에게 직접 묻고 듣는 교회, 오해가 생기면 덮어 두지 않고 정직하게 풀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의 약점이 아니라 서로의 자랑을 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의 날에 서로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나의 자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오늘부터 쌓아 가게 하옵소서. 겉과 속이 같은 말이 오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 안에서 오가는 단체 대화방의 글 한 줄에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이 묻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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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절 가볍지 않은 계획

성자 예수님은 우리의 계획이 교회를 향한 사랑에 뿌리내리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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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번 은혜를 얻게 하려고 먼저 그들에게 들렀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다시 마게도냐에서 그들에게 돌아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로 가려 했던 계획을 밝힙니다. 그런데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회 안에서는 그를 두고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세울 때 경솔하게 했겠느냐고,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자기에게 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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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세웠던 계획은 고린도를 두 번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처음 고린도전서에 알린 계획보다 오히려 교회를 한 번 더 만나려는 쪽으로 바꾼 것입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두 번 은혜를 얻게 하려고'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서신에서 '은혜'는 자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와 함께 나옵니다(고전 16:3; 고후 8:6, 19). 16절이 연보를 들고 유대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것을 보면, 두 번의 방문은 고린도 교회가 그 은혜의 사역에 두 번 참여할 기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방문은 사적인 일정이 아니라 이방 교회와 유대 교회를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일에 교회를 초대하는 길이었습니다. 굶주린 예루살렘 성도를 돕는 일은 한 몸 된 교회가 서로의 짐을 지는 일이었고, 바울은 고린도가 그 기쁨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만큼 그 계획에는 고린도를 향한 기대와 애정이 실려 있었습니다.

17절의 '경솔히'로 옮긴 말은 본래 무게가 가볍다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이 꼴은 여기에만 나오지만, 같은 뿌리의 형용사는 주님의 멍에가 가볍다는 말씀(마 11:30)과 우리가 받는 환난이 잠시 받는 가벼운 것이라는 말씀(고후 4:17)에 쓰입니다. 고린도의 비판자들은 바울의 계획이 가볍다, 곧 무게 없이 바뀌는 변덕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상대가 이미 아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수사 질문으로 답합니다. 여러분도 내가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 계획하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단지 충동적이라는 뜻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유익을 따라 움직이는 옛 시대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반대자들은 사역자를 육체를 따라 평가하고 육체를 따라 자랑하던 이들이었으니(10:2; 11:18), 바울은 자신의 기준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예 예'와 '아니라 아니라'를 겹친 말은 입으로는 힘주어 긍정하면서 속으로는 부정을 품는 이중성을 그립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37). 말과 마음이 한 줄로 서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말입니다. 바울은 계획을 바꾸었지만 마음을 바꾼 적은 없었습니다. 23절 이하에서 밝히듯 그가 방문을 미룬 것은 교회를 아껴서였습니다. 바뀐 일정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변덕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 앞에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계획도 사람을 살리는 사랑에 뿌리를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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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바뀔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뀐 계획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밑에 흐르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계획이 바뀌면 쉽게 변덕이라 부르고, 내 계획이 바뀌면 사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계획의 무게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묻습니다. 계획을 지키는 것이 사람을 지키는 일이 될 때도 있고, 계획을 바꾸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일정표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사랑에 무게를 두는 사람은 계획을 바꿀 때도 가볍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는 바꾼 뒤에 얼마나 정직하게 설명하고 책임지는지에서 드러납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약속을 얼마나 가볍게 하는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아이에게 다음에 꼭 하자고 한 말이 몇 번이나 그냥 지나갔는지, 일터에서 해 보겠다고 한 말이 책임 없는 인사로 끝나지는 않았는지 살핍니다. 피치 못해 약속을 바꿔야 할 때는 미루지 않고 먼저 찾아가 사정을 정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내 형편을 지키려는 '예'가 아니라 상대를 아끼는 '예'를 말하고 싶습니다. 할 수 없는 일에는 처음부터 정중하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용기도 구합니다.

우리교회가 계획을 세울 때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행사와 일정이 바뀔 때마다 그 이유를 투명하게 나누고, 바뀐 결정을 듣는 이들은 서로의 진심을 먼저 헤아려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이들이 일의 성과보다 영혼의 유익을 앞세우게 하옵소서.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말의 문화가 우리교회 안에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계획이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이웃을 초대하는 길이 되게 하옵소서. 계획이 틀어진 날에도 서로를 탓하기보다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찾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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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2절 예만 있는 분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치시고 하나님의 '예'를 마음에 보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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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하나님이 미쁘시기에 자신들이 고린도 교회에 한 말에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자신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있었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 안에서 '예'가 되었으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세우시고 기름을 부으시며 인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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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은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맹세할 때 쓰는 관용어이기도 하지만, 바울은 그 이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그 결과로 우리 말에도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노래 첫머리에서 자기 말을 들으라고 호소하며 그 근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 두었습니다(신 32:1-4). 본문의 구조도 이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선언(18절)과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다는 말씀(20절)이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있었다는 고백(19절)을 감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증하는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시니,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의 '예'도 그리스도의 '예'에 매여 있습니다. 바울은 변호의 무게를 자기 성품이 아니라 자기가 전한 그리스도께 옮겨 놓습니다.

19절에서 그리스도에게는 '예'만 있었다는 말은 아버지의 뜻을 향한 아들의 한결같은 순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선지자들에게 주신 약속을 그 아들 안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20절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예'에 교회가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굳다, 믿을 만하다는 뜻을 품은 말이고, 18절의 '미쁘시다'도 같은 결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라고 말씀하시면,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아멘'이라고 대답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초대교회 예배에서 회중은 기도와 찬송 끝에 함께 아멘을 외쳤고, 고린도 교인들도 이 편지를 읽으며 그 소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쿰란 공동체가 저주 선언에 아멘으로 답했던 것과 달리, 바울의 아멘은 언제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찬양입니다.

21-22절에서 하나님은 네 가지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굳건히 세우시고, 기름을 부으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굳건하게 하다'는 법정에서 계약을 확증할 때 쓰던 말이고, '기름 부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하나님께 따로 세울 때의 일입니다. '인치다'는 소유를 밝히는 도장이며, '보증'으로 옮긴 아라본은 거래에서 먼저 내는 계약금입니다. 계약금을 낸 사람은 잔금까지 치르겠다고 스스로를 묶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헬라어에서 이 말이 약혼반지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사실은 그 뜻을 더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루실 새 창조를 성령으로 미리 우리 마음에 맡겨 두시고, 끝까지 '예'를 지키시겠다고 스스로를 묶으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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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뢰는 사람의 일관성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흔들리고 계획은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말해졌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도장처럼 찍혀 있습니다. 내 감정이 흔들리는 날에도 보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내 마음의 온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건네신 보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예'에 날마다 '아멘'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그 아멘은 감정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약속이 더디 보이는 날에도 드리는 믿음의 대답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기도의 끝에 붙이는 아멘을 습관처럼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가정에서 식구와 함께 드리는 기도의 아멘이 오늘 하루를 맡기는 고백이 되고 있는지, 일터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에 아멘 할 수 있는지 살핍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하나님의 보증이시라는 사실을 붙들고, 불안한 날에도 그 도장을 다시 손으로 만지듯 기억하고 싶습니다. 내 '예'가 하나님의 '예'를 닮아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는 작은 약속 하나라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 떠오르면 변명보다 사과를 먼저 건네겠습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예'에 함께 '아멘'으로 답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일 예배의 아멘이 소리로만 끝나지 않고 한 주의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를 함께 그리스도께 세우신 하나님이 목회자와 성도를 한 몸으로 굳게 세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답게 서로를 의심하기보다 서로 안에 계신 성령을 신뢰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미쁜지를 우리교회의 삶으로 증언하게 하옵소서. 낙심한 지체가 있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읽어 주며 그 곁에서 아멘으로 답해 주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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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미쁘신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약속에

'예'라고 답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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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적으로 알면서

다 아는 듯 판단하던 입술을 용서하시고

겉과 속이 같은 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걷게 하옵소서.

주 예수의 날을 바라보며

서로의 자랑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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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바뀌는 날에도

사랑만은 바뀌지 않게 하시고

가볍게 '예' 했다가

가볍게 '아니요' 하지 않게 하옵소서.

.

우리 마음에 보증으로 주신 성령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시고

주님의 '예'에

온 삶으로 '아멘' 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세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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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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