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3:12-31 오른손이 묶인 사람, 소 모는 막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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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자 하나님은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십니다.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 자손을 모아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은 열여덟 해 동안 그를 섬깁니다(12-14절). 백성이 부르짖으매 하나님은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을 구원자로 세우십니다. 공물을 바치러 간 그는 오른쪽 허벅지에 감춘 좌우에 날 선 칼로 서늘한 다락방에서 에글론을 찌르고, 문을 잠근 뒤 무사히 빠져나옵니다(15-26절).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분 에훗은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고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쳤으며,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27-30절).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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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사사기 본론부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어제 읽은 옷니엘 이야기가 배교와 심판과 부르짖음과 구원과 안식이라는 다섯 마디를 군더더기 없이 갖춘 표준형이었다면, 오늘의 에훗 이야기는 그 틀을 그대로 쓰면서 분량이 네 배로 늘어납니다. 옷니엘은 다섯 절이고 에훗은 열아홉 절입니다. 사사기의 화자는 중요한 대목에서 시간을 늦춥니다. 늘어난 자리를 따라가면 그가 무엇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 무대는 요단강 동편의 모압입니다. 모압은 롯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 먼 친척뻘이지만 광야 시절부터 껄끄러운 사이였습니다. 그 모압의 왕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을 끌어들여 요단을 건너와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합니다. 신명기 34장 3절 등에 비추어 이곳은 여리고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무너뜨린 성이었습니다. 그 성을 도로 빼앗겼다는 것은 가나안 정복의 시계가 통째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입니다.
# 압제의 기간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팔 년이었는데 에글론은 열여덟 해이고, 뒤에 오는 야빈은 스무 해입니다. 죄가 되풀이될수록 징계의 길이가 늘어납니다. 사사기의 순환은 제자리를 도는 원이 아니라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입니다.
# 이야기의 주인공은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은 그를 '오른손이 묶인 자'라고 부릅니다. 언뜻 장애를 가리키는 말처럼 들리지만, 같은 표현이 사사기 20장 16절에서 물매를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던 베냐민의 정예 칠백 명에게도 그대로 쓰입니다. 결함이 아니라 특기입니다.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인 시대에 왼손을 쓰는 병사는 상대의 방어 자세를 무력화할 수 있었고, 오른손잡이를 전제하고 설계된 성문 구조에서도 유리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는 오른손을 묶어 두고 왼손만 쓰게 하는 훈련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훗은 훈련된 특수요원이었습니다.
# 여기에 아이러니가 겹칩니다. '베냐민 사람'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 오른손이 묶인 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하고 있던 일은 적국의 왕에게 공물을 나르는 심부름이었습니다. 15절의 '그를 통하여'는 원문으로 '그의 손으로'입니다. 정예 요원임을 증명하던 그 손이 지금은 조공을 들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던 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 마지막 한 절에 삼갈이 붙어 있습니다. 이름을 이루는 자음이 넷이어서 히브리식 이름으로 보기 어렵고, '아낫의 아들'이라는 소개는 그가 가나안의 전쟁 여신 아낫을 섬기던 사람일 가능성까지 열어 둡니다. 무기는 소 모는 막대기였습니다. 하나님이 도무지 쓰실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쓰실 것 같지 않은 물건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에훗과 삼갈을 나란히 놓으면 한 주제가 또렷해집니다. 하나님의 의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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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되감긴 시계 앞에서
하나님은 열방의 힘까지 손에 쥐고 계셔서 그 힘으로도 당신의 백성을 돌이키시는 온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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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삿 3:12). 화자는 '또'라는 한 글자를 앞세워 이것이 처음이 아님을 못 박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셨고,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합니다(13절).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깁니다(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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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주어가 도중에 바뀝니다. 앞부분의 주어는 이스라엘이고 뒷부분의 주어는 여호와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했고,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셨습니다. '강성하게 하사'라는 표현은 에글론이 스스로 힘을 키운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위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힙니다. 압제자의 등장까지도 하나님의 문장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에글론은 '송아지'라는 뜻을 담고 있고, 17절은 그를 "매우 비둔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잘 먹여 살찌운 송아지의 그림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 그에게 '공물을 바치다'라고 할 때 쓰인 낱말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쓰는 말과 같습니다. 살진 송아지 한 마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이스라엘의 예물을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빼앗긴 장소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동편에서 서편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발을 들이며 가장 먼저 무너뜨린 성이었습니다. 나팔 소리에 성벽이 무너지던 그 자리,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사실을 온 백성이 눈으로 본 자리입니다. 그 성을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내어 줍니다. 그것도 요단 건너편에서 올라온 모압에게 내어 줍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벧엘 같은 주요 성읍과 지척입니다. 여리고를 잃었다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다시 잃을 수도 있다는 경보였습니다. 승리의 기념비가 압제의 교두보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열여덟 해입니다. 앞선 압제는 팔 년이었고 뒤에 올 압제는 스무 해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거움은 언약을 파기하는 무거움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내리는 징계의 무거움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만 계신 지역 신이 아니라 모압과 암몬과 아말렉의 힘까지 손에 쥐고 계신 온 열방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에글론이 약해지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제는 언제나 대적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거리였습니다. 훗날 히브리서 기자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 12:6)라고 쓴 그 마음이 여기서 이미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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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 이 단락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습니다. 우리는 무너짐의 원인을 자주 바깥에서 찾습니다. 인구가 줄어서, 시대가 험해서, 반기독교 정서가 강해져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압제의 원인을 모압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찾습니다. 에글론이 강해진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 작아진 만큼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세상이 얼마나 험해졌는가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작아졌는가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리에서는 '되감긴 시계'를 살펴야 합니다. 한때 분명히 하나님이 일하신 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응답받은 기도, 회복된 관계, 끊어 낸 습관, 무너진 여리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다시 내어 준 일은 없습니까. 은혜의 기념비가 어느새 다시 압제의 교두보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는 지난 몇 년 사이 하나님이 무너뜨려 주셨던 여리고를 하나만 떠올려 보십시다. 그리고 그 성이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 정직하게 살펴보십시다. 되찾는 일은 새로운 힘을 얻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그 성을 무너뜨려 주신 분을 다시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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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9절 오른손이 묶인 사람
하나님은 세상이 쓸모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면 바로 그 손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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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삿 3:15). 그는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 선 칼을 만들어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16절), 매우 비둔한 자였던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칩니다(17절). 공물 바치기를 마친 뒤 함께 온 자들을 돌려보내고(18절),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홀로 돌아와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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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왼손잡이'라는 낱말을 붙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오른손이 묶인 자'입니다. 그래서 에훗을 오른손에 장애가 있던 사람으로 읽는 견해도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20장 16절은 물매를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던 베냐민의 정예 칠백 명을 똑같은 말로 묘사합니다. 결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면 정예 부대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인 전장에서 왼손잡이는 상대의 익숙한 방어를 무너뜨렸고, 오른손잡이 공격자를 전제하고 지은 성문 구조에서도 유리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는 오른손을 묶어 두고 왼손만 쓰게 훈련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약점의 고백이 아니라 특수요원의 자격증입니다.
여기서 화자는 뼈아픈 대비를 하나 심어 둡니다. '베냐민 사람'은 문자적으로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 오른손이 묶인 자였습니다. 게다가 15절 끝의 "그를 통하여"는 원문으로 '그의 손으로'입니다. 정예 요원임을 증명하던 바로 그 손이 지금은 적국 왕에게 바칠 조공을 들고 있습니다. 훈련은 받았으나 그 훈련이 쓰일 자리가 없는 사람, 자기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알면서도 그 목적과 상관없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세우셨습니다'.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던 사람을 들어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에훗은 준비합니다. 한 규빗은 대략 45센티미터쯤 되지만 이 낱말을 22센티미터 정도의 짧은 단검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옷 속에 감출 만한 크기입니다. 좌우에 날이 선 칼을 스스로 만들어 오른쪽 허벅지에 찼습니다. 오른손잡이는 왼쪽 허벅지에 칼을 차기 때문에 경비병들은 왼쪽만 살폈을 것입니다. 그의 왼손이 몸수색을 통과시킨 셈입니다. 19절의 '돌 뜨는 곳'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페실림'에는 '우상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가 발길을 돌린 자리가 하필 우상들 곁이었다는 것은 화자의 세심한 배치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격을 새로 만들어 내지 않으시고,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몸에 밴 기술과 서 있던 자리까지 그대로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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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는 쓰임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성도가 많습니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재능을 알아보아 주는 자리가 없어서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은 몇 가지 눈에 띄는 역할만 은사로 셉니다. 그래서 설교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앞에 서지 않는 이들은 자기 손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물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른손이 묶인 사람을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눈은 사람의 결함을 특기로 바꾸어 보는 눈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나르고 있습니까. 에훗은 오래 공물을 날랐습니다. 그 세월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을 익혔고 그 궁궐을 익혔고 왕의 습관을 익혔습니다. 나중에 쓰인 것은 그 지루한 반복 속에서 몸에 밴 것들이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인다면 조금만 더 견뎌 주십시오. 매일 여는 가게 문, 매일 짓는 밥,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는 출근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봉사가 실은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급할 때 사람을 급조하지 않으시고 오래 준비된 사람을 그때 꺼내어 쓰십니다. 내 손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아껴 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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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절 하나님의 것
하나님은 사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자리에까지 이르시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공의의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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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이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납니다(20절). 에훗은 왼손을 뻗쳐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찔렀고,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 기름이 칼날에 엉겼습니다(21-22절). 그가 현관에 나와 다락문들을 잠그자(23절), 신하들은 왕이 발을 가리는 줄 알고 오래 기다렸고,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어 있었습니다(24-25절). 그동안 에훗은 스이라로 피합니다(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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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의 열쇠는 두 마디 말에 있습니다. 19절에서 에훗은 "은밀한 일"이 있다고 했고, 20절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고 했습니다. 원문에서 두 문장은 거의 같은 모양입니다. '당신을 위한 은밀한 다바르가 내게 있습니다'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다바르가 내게 있습니다'입니다.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이기도 하고 일이기도 하고 물건이기도 합니다. 에글론은 공물 외에 따로 준비된 귀한 물건이거나 신탁이라고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물리고, 신탁을 받으려고 예를 갖추어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이방의 왕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일어서는데, 정작 그 말씀을 받은 백성은 앉아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훗이 말한 '하나님의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숨겨 들여온 칼이었습니다.
화자는 여기서 이야기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늦춥니다. 칼자루가 날을 따라 들어가고, 칼을 빼지 않았고, 기름이 엉겼다고 한 동작 한 동작을 나누어 적습니다. 성경 내러티브에서 시간이 늘어지는 자리가 절정입니다. 22절 끝에는 개역개정이 옮기지 않은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파르쉐도나'인데, 대개 오물을 뜻하는 말로 봅니다. 상처를 통해 내용물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 냄새 때문에 신하들은 왕이 용변을 보는 중이라고 지레짐작했고, 그 착각이 에훗에게 도망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24절과 25절에는 '보라'라는 감탄사가 두 번 삽입되어 있습니다.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보라, 그들의 주인이 땅에 엎드러져 죽어 있는 것을 보라. 화자는 독자의 눈을 그 문 앞에 붙들어 둡니다.
이 장면을 통쾌한 무용담으로만 읽으면 본문을 놓칩니다. 화자가 더 오래 비추는 것은 에훗의 솜씨가 아니라 에글론의 착각입니다. 그는 너무 강했기 때문에 방심했고, 너무 성공했기 때문에 분별을 잃었습니다. 가장 살진 왕이 가장 무력하게 죽고, 가장 많은 신하를 거느린 사람이 문 하나 사이에서 홀로 죽습니다. 사람이 두르는 두께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방패가 되지 못합니다. 사사기가 폭로하는 것은 약함의 서러움이 아니라 강함의 허상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라고 하셨습니다. 잠긴 문 안에서 벌어진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겨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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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이 대목에서 들어야 할 경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규모와 조직과 평판이라는 두께를 두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두께는 안전이 아닙니다. 문이 잠겨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없어 보이지만, 문은 언젠가 열립니다. 교회가 스스로 열지 않으면 남이 열쇠를 가지고 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깥의 비판이 아니라 안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죽음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잠긴 다락방이 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시간, 아무도 보지 않는 화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관계와 계산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이 잠겨 있으니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잠긴 문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발견을 늦출 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는 잠가 둔 문 하나를 하나님 앞에서 먼저 열어 보십시다. 사람에게 다 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는 잠그지 마십시다. 그리고 신뢰할 만한 한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십시다. 스스로 여는 문은 회개의 문이 되지만, 남이 여는 문은 대개 심판의 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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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30절 나를 따르라
하나님은 한 사람의 순종을 지렛대로 삼아 온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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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삿 3:27). 그는 백성에게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라고 외쳤고, 무리가 그를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했습니다(28절). 그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였고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했습니다(29절).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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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은 혼자 시작했지만 혼자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팔을 부는 것이었습니다. 나팔은 개인의 승전보가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위한 소집 신호입니다. 그리고 그가 백성에게 한 말의 순서를 보십시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이 먼저 나오고 곧바로 "여호와께서 넘겨 주셨느니라"는 선언이 이어집니다. 아직 싸우지 않았는데 이미 넘겨 주셨다고 말합니다. 완료된 사실로 선포된 미래입니다. 지도자가 백성을 움직이는 힘은 자기 무용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는 자신이 왕을 죽였다고 자랑하는 대신, 이 전쟁이 누구의 전쟁인지를 먼저 알렸습니다.
전술도 정확합니다.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한 것은 퇴로를 끊은 것입니다. 모압 본토에서 넘어온 점령군이 돌아갈 길을 막았습니다. 29절이 죽은 자들을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라고 표현한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장사'로 옮겨진 말은 문자적으로 '기름진 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비둔한 왕을 섬기던 사람들을 향한 조롱이 담겼다고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왕도 기름졌고 그 군대도 기름졌으나, 그 기름진 힘이 하나도 그들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는 보고는 사사기가 여호와의 전쟁을 이야기할 때 붙이는 표지입니다. 사람의 작전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넘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놀랍습니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습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가장 긴 안식입니다. 옷니엘은 사십 년이었고 드보라도 사십 년이었습니다. 사사기에서 평온의 보고는 단순히 전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간 동안 백성이 말씀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두 세대가 여호와의 전쟁을 기억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두 세대의 평화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온도 결국 끝납니다. 4장 1절은 다시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읽는 이의 마음에 갈증을 남깁니다. 팔십 년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주실 분은 없는가. 그 갈증의 끝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하신 분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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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지도자가 부는 나팔에 응답하는 일에는 서툽니다. 에훗의 승리는 그가 왕을 죽인 순간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산지에서 내려온 이름 없는 사람들이 나루를 지켰기 때문에 완성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에훗의 거사는 한 사람의 사건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교회의 회복도 몇 사람의 결단이 아니라, 그 결단에 응답해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개인의 자리에서 오늘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나루를 지키고 있습니까.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도 지켜야 할 나루가 여럿 있습니다. 주일 예배의 자리, 새벽의 자리, 다음 세대를 붙드는 교사의 자리, 몸이 불편한 지체를 살피는 자리, 이웃과 나누는 자리가 그것입니다. 화려하지 않고 이름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루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승리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하십시다. 팔십 년의 평온도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되지 않으면 끝납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이 어디서 왔는지 자녀에게 말해 주십시오. 말해지지 않은 은혜는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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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절 소 모는 막대기
하나님은 아무도 세지 않는 사람을 세시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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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삿 3:31). 단 한 절입니다. 몇 해 동안 사사로 있었는지도 없고, 백성이 부르짖었다는 말도 없으며,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를 사사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 마디가 붙습니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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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갈이라는 이름부터 낯섭니다. 히브리어 낱말은 보통 세 개의 자음을 뿌리로 삼는데 삼갈은 자음이 넷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낫의 아들'이라는 소개도 두 갈래로 읽힙니다. 벳아낫이라는 지역 출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가나안의 전쟁 여신 아낫을 섬기던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그는 언약 백성의 안쪽에 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 게다가 우상 숭배의 배경을 지녔을 가능성을 본문은 굳이 지우지 않습니다.
무기는 더 초라합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밭을 갈 때 소를 몰기 위해 끝에 쇠붙이를 박은 긴 장대입니다. 전쟁 무기가 아니라 농기구입니다. 그가 훈련된 용사가 아니라 목동이었으리라는 짐작은 여기서 나옵니다. 당시 블레셋은 철기를 독점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조차 없었습니다(삼상 13:19-22). 가진 무기라고는 밭에서 쓰던 연장뿐이었던 사람이, 육백 명을 무너뜨렸습니다. 화자는 여기에 '감'이라는 짧은 낱말을 붙여 강조합니다. 우리말로 "그도"라고 옮겨진 그 한 글자입니다. 그도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이 한 절을 에훗 이야기 끝에 놓은 자리가 절묘합니다. 첫 사사 옷니엘은 유다 지파의 모범생이었습니다. 두 번째 에훗은 유다와 대립하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오른손이 묶인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 삼갈은 아예 이스라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사람이고 무기는 농기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폭이 한 걸음씩 넓어집니다. 우리의 예상은 계속 빗나가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계속 이루어집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 하시고"(고전 1:27)라고 쓴 그 원리가 사사기 3장 끝에 이미 한 줄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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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준비된 사람'을 강조해 왔습니다. 훈련과 자격과 검증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자체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 강조가 지나쳐 하나님이 쓰실 사람의 명단을 우리가 미리 작성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학벌과 경력과 헌금 액수와 교회 안의 연차가 그 명단의 기준이 됩니다. 삼갈은 그 명단 어디에도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구원자의 계보 안에 적어 넣었습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단이 우리 명단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에 대한 겸손입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분들께 이 한 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삼갈에게 새 무기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늘 쥐고 있던 막대기를 그대로 쓰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손에 붙들려 있느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보십시오. 주방의 국자일 수도 있고, 작업장의 공구일 수도 있고, 가게의 계산기일 수도 있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곧 여러분의 소 모는 막대기입니다. 하나님께 그 막대기를 내어 드리십시오. 삼갈을 쓰신 하나님이 나를 쓰시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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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우리는 또 그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무너뜨려 주신 여리고를 다시 내어 주고도
무엇을 잃었는지 몰랐습니다.
고통은 있었으나 각성은 없었습니다.
익숙해진 압제 속에서 우리를 깨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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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를 세우시는 하나님,
우리는 오른손이 묶인 채 공물을 나르며 살았습니다.
쓸모없다 여겼던 그 손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하찮아 보여도 그 자리를 지키게 하시고
때가 되면 부르실 주님을 잠잠히 기다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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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우신 주님,
잠긴 문 뒤에서 아무 일도 없는 척 살았습니다.
두께가 안전인 줄 알았고 성공이 분별인 줄 알았습니다.
사람에게 감춘 문을 주님 앞에서 먼저 열게 하시고
강함의 허상을 벗고 믿음의 실상을 붙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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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나팔 소리에 응답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이름 없이 나루를 지키는 그 손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도 한 시대를 살리시는 주님,
우리 손에 들린 작은 것을 주님 손에 올려 드립니다.
팔십 년의 평온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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