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사기 02:11-23 돌아서는 발, 돌이키시는 마음

*

여호수아 세대가 지나간 뒤의 이스라엘을 화자가 한자리에 모아 요약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에게 절합니다(11-13절). 진노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기시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니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습니다(14-15절). 그러나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워 구원하십니다. 백성은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았고, 사사가 죽으면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했습니다(16-19절). 마침내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쫓아내지 않겠다 하시며, 그 남겨 두심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지 시험하십니다(20-23절).

*

# 사사기의 서론은 두 겹입니다. 첫째 겹(1:1-2:5)은 지파별 정복의 성적표이고, 둘째 겹(2:6-3:6)은 그 성적표의 원인을 캐는 진단서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구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부분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들을 온전히 내보내지 못한 사회 정치적 타협을 보여 준다면, 둘째 부분은 그러한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불순종을 지적한다." 어제 읽은 2장 1-10절이 그 진단서의 앞머리였다면, 오늘 본문은 진단서의 본문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처음으로 사사 시대 전체를 압축한 지도를 펼쳐 보입니다.

# 그 지도의 이름이 순환 구조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11-19절을 네 단계로 나눕니다. 타락(11-13절), 심판(14-15절), 구원(16절), 재타락(17-19절)입니다. 묵상과설교는 여기에 부르짖음(18절)을 더해 다섯 마디로 읽습니다. 이 다섯 마디가 사사기 안에서 여섯 번 되풀이되는데, 되풀이될 때마다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원이 아니라 나선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박유미 교수는 여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점점 타락한 것과 사사 개인들의 신앙은 구분해서 보아야 하며, 초기의 옷니엘과 에훗과 드보라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단순한 도식으로만 사사기를 읽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 이스라엘이 넘어간 자리에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있었습니다. 바알은 폭풍과 비를 몰고 오는 풍요의 신이고, 아스다롯은 그의 배우자로 전쟁과 다산을 관장하는 여신이었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11절의 '바알들'이 정관사에 복수형이 결합한 '합베알림'임에 주목하며 두 가지 읽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강조 복수로 '가장 위대한 주'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하던 여러 바알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가장 익숙한 신을 섬겼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하나님이 밀밭과 포도원에서는 서툴러 보였던 것입니다.

# 화자가 쓰는 낱말 하나가 이 단락 전체를 꿰뚫습니다. '손에 넘겨주다'(나탄 베야드)입니다. 이 표현은 원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실 때 쓰시던 말이었습니다. 사사기 1장 2절에서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신 그 말이 14절에서는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섭니다. 이스라엘이 손안에 넣던 자리에서 손안에 넘겨지는 자리로 옮겨 간 것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낱말은 '여호와의 목전에'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히브리어 표현이 사사기 마지막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17:6; 21:25)와 같은 어법임을 지적합니다. 2장에서는 그래도 판단의 기준이 여호와였지만, 마지막에 가면 기준 자체가 자기 자신으로 바뀝니다. 오늘 본문은 그 긴 내리막의 첫 계단입니다.

*

# 11-13절 여럿 가운데 하나가 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곁에 다른 신 하나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버림받았다고 말씀하실 만큼, 우리와 배타적인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

화자는 새 세대의 첫 행위를 한 문장으로 규정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11). 그다음 12절과 13절은 그 악이 무엇인지를 풀어 씁니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였고, 그리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이 다시 한번 못을 박습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짧은 세 절 안에서 '버리고'가 두 번, '섬기며'가 세 번 나옵니다.

.

먼저 이 단락의 짜임새를 보아야 합니다. 박유미 교수는 11-13절이 동심원 구조로 기록되었다고 읽습니다. 바깥에 '바알을 섬김'과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김'이 놓이고, 그 안쪽에 '야웨를 버림'과 '야웨를 버리고'가 놓이며, 한가운데 '다른 신을 따르고 그들에게 절하며'가 자리합니다. 이 배열이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우상을 섬긴 사건의 한복판에 있는 진짜 사건은 여호와를 버린 일이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종교 행위의 변경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배신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기 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중단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점을 힘주어 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멈춘 적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었다." 조상이 섬기던 야웨를 섬기면서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섬기는 것,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분명한 배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부부처럼 상호배타적인 관계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함께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확장이 아니라 사랑의 파기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세대의 영적 이력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11절에 의하면 이 세대는 야웨 하나님보다 풍요의 신 바알과 그의 아내 신인 아스다롯을 섬긴다. 출애굽의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사방에 있는 주변 민족들의 신들을 격렬하게 쫓는다." 그리고 이어서 무서운 한 문장을 덧붙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 사사 시대를 경험한다." 사사 시대는 연대표 위의 한 시기가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다시 열릴 수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과 순종의 소멸, 우상숭배와 세속화, 하나님 백성이 세속주의적 세력과 맺는 공존과 제휴가 그 상태의 표지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스라엘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사려 깊게 헤아립니다. 그들이 따랐던 신들은 "자기 주위에 있는 백성들"의 신들이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 이스라엘은 그 환경에 어울리는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섬기던 여호와가 새롭게 정착한 농경지에서는 효험이 없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배교는 하나님을 미워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서 일어난 일입니다. 묵상과설교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위험한 우상숭배는 나는 하나님을 안 믿는다가 아니라 하나님도 필요하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부가 아닌 상태, 바로 그 자리에 우상이 들어옵니다.

정경의 문맥에서 보면 이 배교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남겨 둔 가나안 주민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삿 2:3)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올무가 실제로 조여드는 장면입니다. 쫓아내지 않은 이웃은 곧 매일 마주치는 이웃이 되고, 매일 마주치는 신은 어느새 익숙한 신이 되고, 익숙한 신은 마침내 내 신이 됩니다. 그리고 이 흐름의 끝에서 신약은 훨씬 더 깊은 자리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하시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못 박으셨습니다. 사사기가 바알이라고 부른 자리를 복음서는 재물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자리는 같습니다.

.

오늘 한국 교회 앞에 놓인 시험도 무신론이 아니라 혼합주의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새벽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삶의 실제 안정은 어디에서 구하고 있는지를 물으면 대답이 달라집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구하면서 노후는 수익률에 맡기고, 천국은 하나님께 바라면서 자녀의 앞길은 성적과 인맥에 맡깁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을 두고 "여호와를 버리고"라고 적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화하는 것,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만드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전부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번 주에 이 질문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내 달력에서 가장 양보하지 못하는 시간은 무엇입니까. 내 통장에서 가장 손대기 싫은 항목은 무엇입니까. 내가 불안할 때 가장 먼저 붙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내가 실제로 섬기는 신입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 결단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자는 것입니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오늘의 회개입니다. 곁에 세워 둔 작은 제단 하나를 이번 주에 헐어 내는 것, 거기서 신앙은 다시 시작됩니다.

*

# 14-15절 승리를 약속하던 손이 돌아설 때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도 목적을 잃지 않으시는 분, 심판마저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려는 사랑의 언어로 쓰시는 분이십니다.

.

하나님의 반응이 곧바로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삿 2:14). 그리고 15절은 그 진노가 얼마나 촘촘했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고, 그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습니다. 두 절 안에 '손'이 세 번 나옵니다.

.

박유미 교수는 14절이 이중 강조의 구조로 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주사'와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가 한 쌍을 이루고,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넘기시매'와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가 또 한 쌍을 이룹니다.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은 강조입니다. 여기서 '노략하는 자'는 가나안 족속만이 아니라 그 땅을 노리던 주변의 모든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사방으로 열린 들판이 되었습니다.

가장 아픈 대목은 낱말의 방향이 뒤집힌 자리입니다. 앞서 보았듯 '손에 넘겨주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실 때 쓰시던 표현이었습니다. 그 말이 이제 적들에게 적용됩니다. 묵상과설교는 이것을 두고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결국 그들을 적들과 전세가 뒤바뀌는 처지로 만들어 버린다"고 정리합니다. 김회권 교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 팔아 버리는 행위는 노예살이로부터 구원해 주신 출애굽을 무효화하는 반(反)출애굽적인 행위인 것이다." 애굽에서 값 없이 건져 내신 백성을 다시 값을 받고 파신다는 표현은, 구원의 역사를 되감는 무서운 은유입니다. 그런데 그 되감기를 행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15절의 "어디로 가든지"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렇게 관찰합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리고 가나안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어디를 가든지 그들을 보호하던 여호와의 손이 이제는 그들을 공격하는 손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손입니다. 방향만 바뀌었습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대목을 신학적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경영할지라도 그 걸음을 옮기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이스라엘은 심각하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투에 나갈 때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대적하여 작용했고, 그래서 그들은 매번 좌절하고 패퇴를 거듭했습니다.

이 심판이 자의적인 분노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화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라고 두 번 적습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구절을 여호수아 23장 15절과 연결합니다. 나이 많은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라고 경고했습니다. 신명기 28-29장의 축복과 저주의 원리가 여기서 그대로 작동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언약의 이행입니다. 박유미 교수의 말대로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은 죄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고 복 주기를 기뻐하시지만, 공평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기에 언약을 어기고 범죄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목적을 잘못 읽으면 안 됩니다. 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각성입니다. 묵상과설교는 이를 "버림이 아닌 회복의 언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우상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그들이 떠난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징계하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돌아오기를 원하시기에 징계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같은 이치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6).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넘겨지심으로(롬 8:32), 이 넘겨주심의 역사는 마침내 방향을 되돌립니다.

.

경제적 풍요를 기대하며 우상을 섬겼는데 결과가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더 안전해지려고 붙든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자유로워지려고 손에 쥔 것이 우리를 묶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세월 성장과 규모를 향해 달려온 자리에서 지금 겪는 피로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앞세우면, 그것이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를 지배합니다. 노략하려고 달려든 대적을 우리 손으로 불러들인 셈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 겪는 어려움을 해석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모든 고난이 징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분명히 부르심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이번 주에 자신의 자리에서 이렇게 물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셔서일까요, 아니면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의 정체를 보여 주시려는 것일까요. 징계는 하나님이 멀어지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여전히 붙들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운 성도를 만날 때 정죄의 말이 아니라 이 소망의 말을 건네는 공동체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이 무거워 보이는 그 순간에도 그 손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

# 16-19절 신음 소리에도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회개의 자격을 먼저 묻지 않으시고 고통의 신음 소리에 먼저 반응하시는, 긍휼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심판의 한복판에서 이야기가 뜻밖의 방향으로 꺾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삿 2:16). 그러나 17절은 곧바로 반전을 뒤집습니다. 그들은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했습니다. 18절은 다시 하나님 편으로 돌아와,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19절이 다시 내려앉습니다.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했습니다.

.

이 네 절은 두 개의 마음이 번갈아 나타나는 교차 구조입니다. 16절 하나님, 17절 이스라엘, 18절 하나님, 19절 이스라엘. 화자는 논평하지 않고 배열만 합니다. 그런데 그 배열이 논평보다 더 크게 말합니다. 사람의 변덕과 하나님의 한결같음이 나란히 놓일 때, 놀라운 것은 사람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사사 시대 전체를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반역과 죄악 가운데서도 은혜와 자비가 왕 노릇 하는 시기가 바로 사사 시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야웨께서는 반역적인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에게 압제를 당하게 함으로써, 즉 낮춤으로써 당신의 자비와 긍휼이 크게 두드러지게 하신다."

17절에는 화자의 강조가 문법으로 남아 있습니다. 묵상과설교는 '또한 사사들의 말도'(감 엘 쇼프테헴)라는 표현이 문장 서두에 놓였음을 지적합니다. 개역개정의 "그 사사들에게도"라는 번역이 그 어감을 살립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우신 사람의 말조차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성민 교수도 같은 낱말을 짚으며, 다른 신을 따라간 행위가 '음행'으로 묘사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부 관계에 견주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음행'에 두 겹의 뜻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신부인 이스라엘이 신랑인 야웨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간다는 상징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가나안 종교의 제의에 참여했다는 문자적 의미입니다.

이 단락의 심장은 18절의 한 낱말에 있습니다. '슬피 부르짖으므로'로 옮겨진 히브리어 '느아카'입니다. 묵상과설교는 이 말이 소리를 내어 부르짖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 속에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아파서 앓는 소리를 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작은 신음 소리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사를 보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전성민 교수가 힘주어 말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자동판매기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 낸 것이 아니며, 사람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근본적 동인은 고통의 신음소리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19절에는 더 아픈 언어의 뒤집힘이 있습니다. 묵상과설교는 일반적으로 '회개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슈브'가 여기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의미로 쓰였다고 지적합니다. 돌이킴이라는 같은 낱말이 18절에서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는 은혜가 되고, 19절에서는 백성이 등을 돌리는 배신이 됩니다. 같은 말이 반대 방향으로 달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갑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대목을 "이런 집요하고 뿌리 깊은 이스라엘의 패역"이라고 부릅니다. 사사기의 나선은 여기서 처음으로 아래를 향해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에서 복음이 보입니다. 사사는 살아 있는 동안만 구원할 수 있었지만, 영원히 살아 계셔서 항상 간구하시는 대제사장(히 7:25)이 오셨습니다. 사사기의 모든 사사가 남긴 빈자리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만 바르게 살았다는 이 기록은 오늘 우리 신앙의 뿌리를 묻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을 때만, 열심 있는 소그룹 인도자가 곁에 있을 때만, 분위기 좋은 수련회 직후에만 뜨거운 신앙은 빌려 온 신앙입니다. 빌려 온 것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할 때가 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겪는 어려움의 상당 부분도 여기에 뿌리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기대어 세운 믿음은 그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함께 무너집니다. 우리는 은혜를 삶의 본질적인 변화의 기회로 삼기보다 위기 탈출의 도구로 소비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남기는 더 큰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음이 훌륭한 기도가 아니어도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 앓는 소리, 문장이 되지 못한 한숨, 기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은 탄식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안에도 지금 그런 자리에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할 힘조차 없다고 느끼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잘 회개해서가 아니라 그저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 신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두십시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서로의 신음을 듣는 귀가 되기를 바랍니다. 잘 정돈된 간증만 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정돈되지 않은 앓는 소리도 품는 공동체, 그것이 하나님을 닮은 교회입니다.

*

# 20-23절 심판이 아니라 시험으로 남겨 두심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도 순종의 기회를 남겨 두시는 분, 우리를 포기하시는 대신 시험하시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

마지막 네 절은 하나님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삿 2:20). 그리고 선언이 따릅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21절). 그 이유는 22절에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23절은 그 결과를 담담히 적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

먼저 20절의 호칭이 서늘합니다. 묵상과설교는 하나님이 여기서 더 이상 그들을 '이스라엘'이나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이 민족'(학고이 핫제)이라고 부르시며 거리를 두신다고 지적합니다. 관계의 단절과 긴장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21절에도 문법적 강조가 남아 있습니다. '나도 또한'(감 아니)이 문장 서두에 놓였습니다. 너희가 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으니 나도 또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도'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22절에서 이 선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남겨 두심의 목적이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2장 3절과 이 대목의 차이를 정확히 짚습니다. "2:3에서는 이방 민족들을 남기는 것에 심판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그 목적을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불순종 때문에 심판을 받지만, 이스라엘이 그러한 심판 속에서 다시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새로운 순종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험과 심판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심판은 문을 닫는 일이지만 시험은 문을 열어 두는 일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남겨 두심을 하나님의 전략으로 읽습니다. "열국을 가나안 땅에 잔류케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의 예상되는 불순종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정복을 완결하지 못한 것도 여호수아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23절이 분명히 밝히듯 하나님이 그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손'이 등장합니다. 승리도 미완의 승리도 모두 여호와의 손안에 있습니다. 김회권 교수는 아울러 사사기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낱말이 '호리쉬'(박탈하다, dispossess)임을 지적하며, 이것은 인종 청소와 같은 대량 학살이 아니라 땅의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이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이웃의 신념 체계가 삶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남겨진 민족은 무엇입니까. 묵상과설교의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적이기 전에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 앞에서 두려움도 드러나고 욕망도 드러나고 순종도 드러납니다. 그래서 남겨진 가나안은 장애물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너는 무엇으로 살 것인가, 군사력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 질문은 다음 장에서 그대로 이어집니다. 사사기 3장 1-2절은 하나님이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치시려고 이방 민족을 남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 교육의 내용은 칼 쓰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두고 세 번 간구했으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응답을 받은 것도 같은 문법입니다. 하나님은 가시를 뽑아 주시는 대신 그 가시 곁에서 은혜를 배우게 하십니다.

.

우리 삶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습관, 낫지 않는 몸, 풀리지 않는 관계, 반복되는 재정의 압박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으신다고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남겨진 문제는 하나님이 손을 놓으신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도 시험 가운데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은 무섭게 들리지만 실은 소망의 말입니다. 시험이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사사기의 정복 전쟁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연장되고 계승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는 것은 "이교적 가치, 바알과 아스다롯적인 가치와 신념과 법과 제도를 폐기하고, 그것들을 떠받치고 구현하는 인적 구성체를 무장 해제시키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남겨진 가나안은 도망칠 대상이 아니라 마주 설 자리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광양이라는 도시에서 감당할 몫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지역의 가장 강한 가치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새벽부터 달리는지, 그 자리에 복음이 어떻게 다른 삶을 제안할 수 있는지를 함께 묻는 것입니다. 각 가정에서는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만 하지 않겠습니다. 이 가시 곁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십시오.

*

# 거둠의 기도

주님,

우리는 주님을 부인한 적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주님 곁에

작은 제단 하나를 더 놓았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구원은 주님께 구하면서

안정은 다른 손에서 찾던 마음을

오늘 주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이 전부가 아닌 자리마다

우상이 들어선다는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 주옵소서.

.

공의로우신 하나님,

승리를 약속하시던 그 손이

우리를 넘기시는 손이 되었을 때

그것이 미움이 아니라

부르심인 줄 알게 하옵소서.

붙들고 있는 것의 정체를

고통을 통해서라도 보게 하시고

무거운 손 아래서

여전히 열려 있는 품을 보게 하옵소서.

.

긍휼이 많으신 주님,

우리의 신음은

잘 다듬어진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문장이 되지 못한 앓는 소리였는데

주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오늘도 기도할 힘조차 없는 이들의

그 작은 숨소리를 들어 주시고

말이 되지 못한 자리에서

먼저 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

남겨 두시는 하나님,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들 앞에서

주께서 우리를 포기하셨다고

성급히 말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것이 심판이 아니라 시험이라면

지금도 순종의 문이 열려 있음을 믿고

가시를 뽑아 달라는 기도 대신

가시 곁에서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구하게 하옵소서.

.

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사람에게 기대어 서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께 뿌리내린 교회가 되게 하시고

사사가 살아 있을 때만이 아니라

사사가 없는 날에도

주의 도를 지켜 행하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서로의 신음을 듣는 귀를 주시고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발을

주께로 돌이키는 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사사기 02:11-23 돌아서는 발, 돌이키시는 마음 new 평화의길벗 2026.09.04 19
1256 사사기 02:01-10 울고도 헐지 않은 제단, 물려주고도 잊힌 이름 평화의길벗 2026.09.03 22
1255 사사기 01:22-36 벧엘이라 부르고 루스를 남기다 평화의길벗 2026.09.02 25
1254 사사기 01:11-21 샘을 구한 손, 철 병거 앞에 멈춘 발 평화의길벗 2026.09.01 19
1253 사사기 01:01-10 먼저 여쭈운 입, 가나안을 닮은 손 평화의길벗 2026.08.31 27
1252 이사야 39:01-08 창고를 열어 보인 왕 평화의길벗 2026.08.30 36
1251 이사야 38:01-22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 평화의길벗 2026.08.29 39
1250 이사야 37:21-38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이다 평화의길벗 2026.08.28 41
1249 이사야 37:1-20 여호와 앞에 그 글을 펴 놓고 평화의길벗 2026.08.27 52
1248 이사야 36:01-22 잠잠함이 대답이 되는 자리 평화의길벗 2026.08.26 41
1247 이사야 35:01-10 광야에 난 거룩한 길 평화의길벗 2026.08.25 40
1246 이사야 34:01-17 여호와의 책에 적힌 대로 평화의길벗 2026.08.24 49
1245 이사야 33:01-24 소멸하는 불 곁에 사는 사람들 평화의길벗 2026.08.23 50
1244 이사야 32:01-20 정의와 공의가 거하는 땅 평화의길벗 2026.08.22 54
1243 이사야 31:01-9 내려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평화의길벗 2026.08.21 47
1242 이사야 30:18-33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뒤에서 들리는 음성 평화의길벗 2026.08.20 46
1241 이사야 30:1-17 내려가는 길과 돌이키는 길 평화의길벗 2026.08.19 69
1240 이사야 29:15-24 숨긴 계획과 토기장이의 손 평화의길벗 2026.08.18 65
1239 이사야 29:01-14 꿈같은 구원과 봉한 책 평화의길벗 2026.08.17 44
1238 이사야 28:14-29 거짓의 피난처와 시험한 돌 평화의길벗 2026.08.16 10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63 Next
/ 63
XE Login